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나락에서 다시 (2)
발트제메르가 흐느끼며 토로하는 후회에 아이작은 의문을 가졌다.
만약 발트제메르가 등대지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교단에 맞섰다면 파문 선언을 피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실 등대지기는 황제를 함부로 파문할 수 없다. 리히트 조약이 있기 때문이다.
지상의 권력을 이미 인정한 이상, 권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리 행사는 문제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발트제메르가 등대지기에게 그 권한을 위탁한 시점에서 리히트 조약을 파기할 명분을 주었다.
다만 같은 이유로 황제가 교황의 권력을 강제로 빼앗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이 역시 리히트 조약을 파기하는 행위니까.
즉, 발트제메르가 교만에 빠져 더 높은 권위, 더 강한 힘을 원한 순간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 교만으로 가는 길은 등대지기가 섬세하게 깔아 두었을 것이다.
다시금 교단이 인간들을 통치하는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 때문에 그 많은 희생으로 피가 흘렀는데 내 교만이 전부 무의미하게 만들었네. 내 가족, 내 친구, 내 형제들, 에셀허트, 델리아, 디트리히…… 르네까지도.”
아이작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는 마땅한 증거가 없어서, 정황상 교단의 행위가 명확해 보여서 파기했던 의심을 다시 되살렸다.
“루주베르크에서 종말처리자를 소환한 것은 당신 짓이었습니까?”
“……맞네.”
발트제메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교단이 뒤에서 하는 구린 짓들을 캐다가 알아낸 정보와 성물을 이용했지. 나는 이걸 잘만 이용하면 교단의 약점을 잡을 구실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네. 나는 교단의 권위를 끌어내리고 도덕적 결함을 확대하기에 급급했으니까.”
아무것도 몰랐던 바슐도, 아이작도 할 말을 잃었다.
발트제메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물론 그는 도박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깔아 놓은 판에서 벌어진 도박이니까. 하지만 그 도박은 실패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었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근위 기사 르네 로메르크도.
“하지만 아이작, 자네 때문에 너무 상황이 쉽게 끝나 버렸어. 내가 제대로 된 위협을 당하기도 전에. 그래서 르네가 중독되었을 때 죽였네. ‘교단의 암살 시도 때문에 내 부하의 피가 흘렀다’는 명분을 만들고 싶어서.”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쥐었다.
르네를 잘 안다고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 수련에 매진했으면서도 느슨하게 잘 웃던 기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면 애도하는 마음은 가졌을지언정 분노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의 정치 공작에 휘말려 죽었다면…….
아이작이 칼을 만지작거리자 바슐은 긴장한 안색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내 살기를 가라앉혔다.
르네는 종말처리자에게 중독당한 시점에서 살 확률이 희박했다. 아이작이 애를 썼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려면 그가 가진 힘을 드러내야만 했다.
게다가 발트제메르가 문제였겠는가.
황제도, 교황도, 그리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두가 그저 천상의 대계를 따라 움직이는 장기 말에 불과하다. 그 설계에서 벗어나면 우르반수스를 통해 ‘정정’되거나 대체 당할 뿐이다. 르네나 발트제메르나, 본질적인 면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말들을 움직이는 자는 누구인가? 명천사들? 아홉 신들?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 게임을 벌이고 있는가?
발트제메르는 인간이 지상을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하를 희생시켰다. 숭고하다면 숭고한 목적이며, 아이작 역시 찬성하고 부추겼다.
그 ‘목적을 위한 희생’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아이작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발트제메르의 고민과 분노, 갈등은 곧 아이작이 겪거나 겪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 역시도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였으므로.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닥쳐.’
이름 없는 혼돈이 과몰입을 방지하는 주문을 불어넣자 아이작은 분노로 그 메시지를 밀쳐 냈다.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는 그가 이 세상을 게임처럼 바라보고 적응하게 해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게임을 보는 감각으로 계속 세상을 바라보면 발트제메르나 등대지기와 다를 것이 없다.
아이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희생은 없어.”
바슐과 발트제메르가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인물 중 고인물이다. 수 싸움 없어도 이길 수 있어. 정 희생이 필요하거든 내 팔뚝이라도 잘라가라고 해. 그러면 그 팔뚝 뒤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을 테니.”
***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바슐이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이작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혼잣말을 한 것이다.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대화는 르네의 죽음에 대한 발트제메르의 자백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발트제메르는 아이작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입을 열었다.
“‘고인 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게 많은 말이군.”
발트제메르는 이 감옥에서 본 이후로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가끔 의심스럽긴 했지만, 자네는 확실히 훌륭한 성기사야. 교단의 반만이라도 전부 자네 같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칭찬이긴 했지만 아이작은 정말 교단이 그랬다간 어떨 꼴이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바슐, 나 좀 일으켜 세워 주게.”
발트제메르가 손을 뻗자 바슐은 그의 팔을 어깨에 걸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말에 반쯤 끌려온 탓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죽지 않게 치료 기적 정도는 걸어 준 것 같았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제야 탈출할 마음이 든 모양이지?”
“나는 여전히 내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자네 둘은 내가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밖에서 발버둥이라도 치는 꼴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하니, 죗값을 조금이라도 치르려면 추잡하게라도 뒹굴어 줘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들 생각이야말로 궁금하군. 나는 이제 뿔도 없고, 부여받은 기적도, 권력도, 영토도 모두 잃었어. 그냥 바르바리 노인네에 불과해. 이런 내가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건가?”
아이작은 바슐을 바라보았다.
그도 찬성하긴 했지만, 먼저 발트제메르를 구해야 한다고 의욕적으로 나선 것은 바슐이다. 하지만 바슐은 당황한 기색으로 어물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발트제메르는 금방 알아차렸다.
“엘릴의 의지인가?”
“……예.”
발트제메르는 힘없이 웃었다.
평생을 신앙하던 빛의 법전에게서는 일방적으로 파문당하고, 엉뚱한 엘릴에게 구원받았다. 이 역시 또 다른 장기 말의 역할일지도 모르지만, 발트제메르는 선선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슐과 같은 이유였다.
“좋아. 교단에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지.”
반면 아이작은 좀 더 실리적인 이유에서 황제 구출을 찬성하고 있었다.
‘황제가 탈출한다면 교단이 제국을 집어삼키기가 어려워지겠지.’
교단은 황제 파문을 근거로 리히트 조약을 파기했으며, 황제가 쥐고 있던 제국의 권력을 통째로 씹어 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 발트제메르라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한순간에 몰락한 이상 그 움직임에 저항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발트제메르가 리히트하임에서 살아서 탈출한다면?
교단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제국의 기득권층은 분명 교단의 권위와 힘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이득에 따라 이합집산을 계산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분명 아이작에게도 떨어지는 콩고물이 있다.
그리고 발트제메르도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델리아 리옹은 봤나?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다치긴 했지만 죽을 상처는 아니었는데.”
“보진 못했습니다.”
“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발트제메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델리아 리옹을 구출할 수 없다면 죽이는 쪽이 낫다. 살려두면 교단이 델리아를 앞세워서 귀족원을 장악할 테니까. 디트리히만 해도 그래. 브란트 공작이 죽는 바람에 교단은 북부 연합을 길들이기 어려워질 거다. 그래서 나 하나 파문하는 걸로 끝내는 것이 가장 좋았겠지. 그런데…….”
도망치기로 마음먹자마자 무섭게 황제병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천상 황제는 황제인 모양이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고 수십 년간 수족으로 활동해 온 델리아 리옹을 죽이는 게 좋겠다고 얘기하는 걸 보니.
아이작은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발트제메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졸지에 엉덩이를 발에 채인 발트제메르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고 탈출하기나 하십쇼. 헛소리하지 말고.”
“……내가 허튼소리를 떠들었군. 이건 고질병인 모양이야. 입조심하겠네.”
발트제메르는 얻어맞은 엉덩이가 생소한 느낌인지 더듬거리며 걸어갔다. 하긴 열 살 이후로 누가 황제 궁둥짝을 때려 줬겠는가. 하지만 헛소리를 할 때 엉덩이를 때려 줄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
아이작은 발트제메르에게 적당한 거적을 씌워 죄수로 변장시키고 끌고 갔다. 고해 사제들이 죄수를 이송하는 것은 이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에 띄진 않았다.
‘뿔이 떨어져 나간 게 천만다행이군.’
그 특징적인 뿔이 안 보이니 발트제메르의 모습은 어쩐지 밍숭맹숭 밋밋해 보였다.
그게 평범한 사람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탈출하는 와중에 뿔이 달려 있었다면 손수 잘라 내야 했을 판이었다.
그렇게 리히트하임 지하 복도의 중반쯤 지났을 무렵,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동시에 복도를 채우고 있던 등이 일제히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바슐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들켰군. 뛰자.”
들킬 만한 이유는 충분히 넘치고도 남았다.
고해 사제 두 명이 보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발트제메르가 갇혀 있던 감옥의 성기사들이 경계 교대 시간이 되어서 들킨 것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이 기적이었다.
셋은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복도의 등이 일제히 꺼지면서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창문이 없는 지하 복도는 등불이 사라지자마자 시커먼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숨 막히는 어둠이 찾아온 순간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움직이지 마!”
“뭐?”
“움직이지 마세요. 리히트하임의 경계 태세입니다. 탈출한 자가 있는 경우 일제히 소등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즉시 멈추도록 명령받습니다. 허락받은 수색대 외에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바로 탈출범이라는 뜻이죠.”
발트제메르와 바슐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수색대가 올 때까지?”
물론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움직이는 순간 그들의 위치는 바로 특정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아이작은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그러나 이미 불운하게도 그들이 걸어온 복도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우르반수스로 되돌렸던 과거가 마침내 현실을 따라잡았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와 대등한 수준의 위협과 장애가 찾아왔다는 것도.
그러나 여전히 아이작은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붉은 등이 들어올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이작, 네가 뭐든지 아니까 묻는 건데…… 리히트하임에서 수색대라는 건…….”
“황금사자 성기사단이죠.”
그제야 복도 저 끝에서 붉은 등의 빛에 휩싸인 채 성큼성큼 달려오는 황금 가면의 남자가 보였다.
데라 헤만. 이번에는 잠옷이 아니라 갑옷을 전부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도서관장의 소환이 얼마나 긴급했던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나, 완전무장 상태의 데라 헤만을 상대해야 한다는 끔찍한 결론이기도 했다.
이대로 있으면 그냥 데라 헤만과 마주칠 판이었다.
아이작이 아직 머리를 쥐어 짜내던 중, 바슐이 굳은 표정으로 성큼 데라 헤만을 향해 다가갔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백색 등이 들어왔다.
선명한 빛이 그의 몸을 비췄다.
“바슐!”
“조용해라, 아이작. 너는 충분히 잘했다. 나는 너를 쫄래쫄래 따라다닌 것밖에 안 했어. 여기부턴 내가 맡기로 한 일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