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나락에서 다시 (4)
발트제메르는 허리를 폈다.
이제 제국은 그의 손을 떠났다. 저울추로써의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겠지만, 뿔을 잃은 이상 다시 재기하는 것은 이제 순수하게 발트제메르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그럼 자네에게는 제국의 동쪽을 막아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군. 부디 잘 부탁하네.”
마치 아직 자신이 제국을 소유한 것처럼 말하는 발트제메르의 말투에 아이작은 피식 웃었다. 역시 이 야망 넘치는 권력 광인은 단순히 저울추로만 소모당하다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올칸 규율은 막아야지요. 하지만 그건 그냥 단순히 제가 지나쳐야 할 장애물입니다.”
“장애물?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나?”
아이작은 동쪽의 떠오르는 여명을 응시했다.
“성지를 수복해야지요.”
아이작의 대답에 발트제메르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너도 역시 어쩔 수 없는 빛의 법전 성기사였냐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성지와 여명군이란 지긋지긋한 원수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래저래 발목을 잡히고 동기도 뒤틀리긴 했지만 아이작의 목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여전히 성지 수복이다.
단 빛의 법전이 환장하고 성지를 점령하려 한다면 아이작은 그것을 한번 꼬아 줄 생각이었다.
“고생하십쇼. 혹시 바르바리라서 서러운 일을 당한다면, 바르바리라도 아낌없이 차별하지 않고 베푸는 신앙이 있는데 한번 들어나 보십쇼.”
“제국 안에 그런 게 있나?”
“최신 유행이라서요. 관심 있다면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고.”
“내가 다시 신앙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여튼 알겠네.”
***
“황제가 도주했다고?”
다음 날 점심 무렵에서야 발트제메르의 도주 사실을 전달받은 교황, 호르마 크무엘은 자신이 들은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리히트하임 지하에 엄중하게 갇혀 있던 발트제메르가 탈출한 것도 믿기지 않지만, 그 사실을 점심 무렵에서야 보고받았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황금사자 성기사단이 지키고 있지 않았나? 누구의 짓이지?”
“데라 헤만의 보고에 의하면 엘릴의 명천사인 재투성이가 나타났다가 부상을 입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만 재투성이가 또 독단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정말 엘릴의 개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와중에 엘릴까지 적으로 돌리면 끔찍하다. 솔직히 교황은 늘상 그렇듯 재투성이의 독단행위라고 믿고 싶었다.
“천사들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리히트하임 한복판에서 황제가 탈출했다면 이 또한 대계의 일부 아니겠나?”
교황은 약간의 비아냥을 담아 대답했다.
“황제가 아니라 배교자 발트제메르입니다. 교황 성하.”
로헨 오터 추기경은 인내심을 가지고 강조했다.
로헨은 등대지기의 등장으로 진정한 교단의 권력을 교황이 아닌 파수자 회의가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나, 여전히 교황에게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교황은 자신이 그저 욕받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트제메르의 탈출에 대한 그의 반응도 담담했다.
“그래, 알겠네.”
“……그뿐이십니까?”
“어차피 파문당한 바르바리 아닌가? 이제 아무것도 아닌 자를 왜 탈출시켰는지도 모르겠군. 알아서 처리하게. 어차피 그럴 생각 아니었나?”
교황의 비아냥에 로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이미 수색대도 보냈고, 각지의 귀족들에 황제가 파문당했다는 공문까지 보내 둔 상태였다. 교황은 이미 모든 처리가 끝난 다음 그저 사후 보고를 듣는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발트제메르를 풀어 준 것도 파수자 회의의 짓일지도 모르지. 데라 헤만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을 리가?’
교황은 그렇게도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모든 절차가 파수자 회의의 손을 거쳐 이뤄지고 있었으니.
로헨은 대회의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기 직전, 지나가듯이 말했다.
“아참, 그리고 오전에 추기경 선거가 진행되었습니다. 다행히 아밀라 엔데 주교가 뽑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밀라 엔데라면 로헨 추기경이 추천한 또 다른 파수자 회의의 사제다. 애초에 머리 위에 등대지기가 나타나서 경쟁자였던 주교를 불태워 버렸으니, 다른 사람이 뽑힐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제 추기경 중 둘이 파수자 회의 출신이다. 자신도 파수자 회의의 후원을 받아 교황이 되긴 했으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후안 추기경은 교황을 대적하고 성문을 열었던 것 때문에 방에 틀어박혀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그를 벌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애당초 리히트하임 안에서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사제들만 절반이 넘는다. 그들 전부를 벌할 수도 없을 뿐더러, 천사의 의지가 어디 있는지 확인한 상황에서 사제들이 반항할 이유도 없었다. 교황의 권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방에서 벌벌 떨고 싶은 건 교황도 마찬가지였다.
호르마는 귀찮다는 듯 손짓해서 로헨을 쫓아냈다. 로헨은 인사 없이 문을 닫았다.
‘도망친 황제라.’
교황은 흐릿한 눈으로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저 평야 너머 어딘가에 권력도 뿔도 잃은 황제가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어디로 도망칠지는 알 수 없었다. 공작을 잃은 브란트 영지? 엘릴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으니 엘릴 왕국? 아니면 아예 흑제국으로 도망칠지도 모른다. 많은 권력자들이 복수와 분노를 품고 언데드가 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무슨 길을 선택하든 만약 그가 다시 리히트하임으로 돌아온다면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택하든, 발트제메르, 꼭 살아남아라.’
호르마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가 스스로의 감정에 놀랐다.
그는 황제를 응원하고 있었다.
신에게 버림받고 나락에 떨어진 사내가 다시 재기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교황은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자 어쩐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나쁜 장난을 상상하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마침내 리히트하임을 불태우고 로헨 추기경의 머리를 짓밟는 모습을 본다면, 자신은 그 불바다 속에서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발트제메르 황제 파문.
이 소식은 교단이 보낸 파발과 각지의 성당, 교회, 수도원 등의 사제들의 입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일반 시민이건 귀족이건 이교도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발트제메르 황제는 이러나저러나 인기가 나쁘지 않은 황제였고,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증표인 성체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파문이라니?
하지만 제국군의 봉쇄로 길이 막혀 리히트하임 주변에 머물러 있던 무수한 사람들이 증인이 되었다. 목격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공통된 증언을 했다. 300년 만에 등대지기가 현현했으며, 모두가 눈멀고 그을리는 고통 속에서 황제가 파문되었다고. 황제는 뿔을 잃고 부하들 손에 노예처럼 끌려갔노라고.
일관된 증언에 사람들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오래된 경구를 중얼거렸다.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신도가 하나니.’
가장 충격에 빠진 것은 귀족들이었다.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리히트하임을 ‘방위’하러 간 것이 사실 ‘공격’이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중앙귀족들도 알고 있었다. 델리아 리옹부터가 바로 그 중앙귀족들의 모임인 귀족원의 수장이었으니까. 디트리히 브란트도 마찬가지다.
내심 교단의 권력과 재산이 탐났던 그들은 은연중에 황제를 응원하고 후원해 왔다. 하지만 이토록 처참한 패배를 당할 줄 몰랐던 그들은 이후 닥쳐올 여파를 걱정했다. 행동이 빠른 몇몇은 잽싸게 근처 성당에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며 눈치를 살폈고, 그럴만한 재산이 없는 귀족들은 자식들이라도 서둘러 수도원이나 성당으로 보내 뒷배를 얻으려 애썼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그저 윗대가리들의 권력다툼일 뿐’이라며 신경 쓰지 않던 평민들도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제국은 이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제국은 교단의 통치를 받는다. 교황은 곧 황제이며, 사제들은 명실상부한 제1계급으로서 신도들을 통치한다. 제국을 움직이는 모든 통치 행위는 교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귀족들은 그 수족에 불과할 것이다.
이 새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교단에 막대한 양의 영토와 재산을 기부했다. 그 광풍은 마침내 중앙을 넘어 북부까지 휩쓸기 시작했다.
제국의 일인자인 황제가 저물고, 이인자인 브란트 공작이 죽었다. 다만 브란트 가의 저력은 건재했으니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브란트 공작가는 디트리히 공작의 죽음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프리야 공작 부인은 복수를 선언하지도, 교단에 굴종하지도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들은 이전부터 신실한 빛의 법전 신도였으며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난공불락의 루주베르크를 상대로 쓸데없이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기는 교단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평화를 사려면 돈을 내야 했다. ‘여명군 기부헌납’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브란트 공작가는 빼앗기듯이 영토와 재산 상당량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소수나마 이 불합리한 착취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브란트 공작가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브란트 공작가도 표면적으로는 교단의 권위에 숙였으니, 빛의 법전 교단은 제국이라는 짐승에게 완전히 고삐를 채운 셈이었다. 이제 교단에 대적할 방법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교단 역시 브란트 공작가가 찜찜하기는 해도 그들이 이렇다 할 반항을 할 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힘을 여명군으로 돌렸다.
중요한 것은 성지다. 시에로 여명군은 전보다 훨씬 더 기승을 부리며 사람들을 모집했고, 교단 역시 막대한 자원을 여명군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천사가 마치 자신들의 뒷배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광신도들의 광기가 제국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광기 속에서 제국은 모든 칼끝을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국을 겨냥한 치명적인 발굽 소리도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
후욱.
넬이 날갯짓하며 이사크레아 수도원 외곽에 내려앉자 먼지바람이 일었다. 제국에서도 북부에 속한 이사크레아 영지에는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어 낙엽이 날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지친 표정으로 간만에 돌아온 영지의 상태를 살폈다.
“성배기사님! 오셨습니까?!”
“음, 이건…… 무슨 꼴이지?”
아이작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자클렛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가 반가워서라기보다는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상당한 것 같았다.
이사크레아 영지는 언뜻 보기에는 번화해 보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엉망진창이었다.
“쇠르에서 몰려온 피난민은 물론이고 그보다 먼 곳에서 올칸 규율의 약탈을 피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교단의 패악질을 피해서 온 사람들도 있구요. 동쪽만 대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동서남북 전부에서 몰려오는 중입니다.”
아이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사크레아 영지의 인구는 세배 가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문제가 터지지 않을 수 없는 숫자다. 경비대장인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보이듯 뻔했다.
“고생했다. 그래도 이제 당분간 나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라.”
아이작의 말에 자클렛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영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황제 파문 이후 아이작은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발트제메르가 남긴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애썼다. 단순한 금은 따위가 아니라 인맥, 정보, 밀약 등등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데다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발트제메르가 알려 준 정보 덕분에 적지 않은 자산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산 중에는 인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작은 교단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설득해 이사크레아 영지에 머물도록 유도했다. 덕분에 탈주했던 황제파 기사들 상당수가 이사크레아 영지에 신분을 숨긴 채 머물러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끌어모으기만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작은 당장 올칸 규율과 맞서야 할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뭐가 되었든 일단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만생자는 약속을 지킨 듯 딱히 이사크레아 영지를 침략하지 않았고, 그 사이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요새도시에 준하는 수준으로 급조해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산세가 험한 데다 반역을 염두에 두었던 영지라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것도 칸이 직접 온다면 모래성이나 다름없겠지만…….’
만생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아이작은 올칸 규율 전체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자신은 있었다. 만약 늦게라도 빛의 법전 교단에서 도움이 온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아참, 성배기사님. 교단에서 전령이 찾아왔었습니다.”
“전령? 무슨 일로?”
이어지는 자클렛의 말은 아이작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여명군 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병사를 헌납하라더군요. 그리고 성배기사님도 직접 여명군에 참전할 것을 명령한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