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80)
280화. 대적자 (1)
아이작이 수도원 예배당으로 들어가자 대략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여사제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성배기사님이시군요.”
아이작은 전령 사제의 눈이 맑다 못해 유리알처럼 번뜩이는 것을 보고 잠깐 말을 잊었다. 정말 맑은 눈을 가진 것이라기보다 ‘게르토니아 신성 제국’ 선포 이후 두드러진 이상 현상이었다. 특히 종교적 신앙심이 과한 사제일수록 이런 현상이 강하게 두드러졌다.
‘어린 나이인데 이 정도면 여럿 불태워 본 광신도겠군.’
등대지기의 등장과 신성 제국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사제들에게 어떤 변화를 불어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보기에는 좀 섬뜩했지만, 그들은 이런 눈을 나름 자랑스러워했다.
“불민한 신도인 아이작 이사크레아입니다. 사제님께서는……?”
“유리 오터입니다. 부족하지만 로헨 추기경의 전언을 받아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추기경인 로헨 오터와 성이 같았다.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보아 파수자 회의일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유리라는 사제는 구슬 같은 눈을 번들거리며 곧바로 칙서를 꺼내 들었다.
“부디 아이작 이사크레아, 부활의 성자께서는 경건한 자세로 빛의 집에서 내려온 말씀을 받드십시오. 대저 천상의 권위가 마침내 빛으로 이 땅의 명암을 선명하게 밝힌바, 게르토니아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선 질서 속에, 양지에 선 모든 자들에게 등대지기의 전언을 전하노니…….”
“잠깐, 잠깐.”
“왜 그러십니까?”
유리는 칙서의 낭독이 중단당하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아이작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이미 칙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거리에서, 수도원에서, 예배당에서 세 번이나 낭독하셨다면서요? 어지간히 전령 역할을 맡은 것이 기쁘셨나 봅니다.”
아이작의 말에 유리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제가 처음으로 맡은 파견 임무라서…… 등대지기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니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칙서라는 것은 보통 수신자가 먼저 듣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뭐 문제 삼을 것은 아니고, 이미 들은 내용이니 빨리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문제없겠지요. 사제님?”
“아…… 어쩔 수 없지요.”
유리는 ‘바로 그’ 성배기사에게 전언을 전해 준다는 것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아이작은 저 아득한 길이의 칙서를 끝까지 다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이사크레아 영지에는 할 일이 잔뜩 있었다.
“여명군에 병사와 물자를 파견하라는 내용이지요, 유리 사제님?”
“예. 모든 빛의 법전 신도들이 일치단결하여 단숨에 성지를 향해 들이닥친다면 불사 교단의 발악도 무의미하게 깨져버릴 것이라는 교황 성하의 판단이십니다. 그리고 이름 높은 부활의 성자께서 함께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작의 시원한 대답에 유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이라곤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에게 여명군이란 응당 참전해 마땅한 영광스러운 임무일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단순히 광신도와 싸우기 싫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뿐이었다.
“다만 아시다시피 이사크레아 영지는 수도원 영토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물자와 병사들을 각지의 수도원과 성당에 보내 모은 다음 출정한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물자와 병사들을 당장 다른 곳으로 보낼 필요는 없겠군요?”
“예? 어,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참으로 영광스러운 임무입니다. 안 그래도 곧 출정할 예정이긴 했는데, 이렇게 교황 성하께서 신성한 말씀으로 채찍질을 하여 주시니 볼기짝 맞은 군마처럼 달려가야겠군요. 다만 공교롭게도 동쪽의 교통로에 문제가 생겨서 출정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혹시 유리 사제님께서 동쪽의 상황을 살펴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 하지만 저는 전령인지라…….”
“제가 이토록 망설이는 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미욱하고 나약한 성기사입니다. 그저 유리 사제님 같은 신실하고 굳건한 인도자에게 의지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만약 유리 사제님께서 ‘동쪽은 문제없다! 가라!’고 명령하신다면 그저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어린 나이에 경솔한 태도를 보이는 광신도들은 대개 단 한 가지 욕구만을 위해 움직인다.
인정욕.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지독한 인정욕.
그 유명한 성배기사가 자세를 낮추며 ‘따르겠다’고 말하자 유리는 흥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필림의 매력이 광신도의 흥분을 부추기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부활의 성자와 함께하는 여명군 원정이라면 함께 하는 것도 영광이겠지요! 제가 먼저 빛의 척후로 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유리 사제님만 믿겠습니다.”
유리는 그 뒤로 몇 번 종교적 열망에 찬 헛소리를 떠들다가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잠시 뒤, 헤사벨이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저 보기만 해도 진 빠지는 여자애는 뭐예요? 눈만 마주쳤는데도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도망쳤잖아요.”
“나도 볼 때마다 무섭다. 제국에 저런 괴상한 사제들이 잔뜩 늘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아이작도 예배당 밖으로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헤사벨은 그런 그의 뒤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런데 동쪽에는 올칸 규율이 진을 치고 있잖아요? 거기에 쟤 하나 보내도 괜찮아요?”
“저 어린애가 혼자 왔을 리는 없고 성기사가 호위로 붙었겠지. 잡혀서 죽으면 운명인 거고, 살아서 돌아가면 동쪽이 얼마나 엉망인지 증언해 줄 증인이 될 거다. 눈깔 보아하니 태워죽인 사람도 한둘이 아니야. 별로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드는군.”
아이작은 여명군 징집을 명목으로, 걸을 수만 있으면 무기부터 쥐여주는 사제도 보았다. 아니, 무기도 없이 그저 동쪽으로 가라는 놈도 있었다.
이런 미친 시대에 스무 살짜리 광신도 사제는 어디 가서 살해당해도 자연사다.
***
아이작이 다음으로 신경 쓴 것은 피난민들의 정서와 안정성이었다.
갑자기 인구가 대량으로 늘었으니 사고가 안 터질 수가 없다. 다행히 늦가을인 데다 피난민들이 식량도 적지 않게 가지고 와서 당장 굶주림이 시작될 염려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난동이라도 벌어졌다간 이사크레아 영지는 올칸 규율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건 딱히 걱정하실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아이작의 염려에 대해 대답한 것은 클레르였다.
그간 이사크레아 영지에 생긴 변화 중 아이작이 가장 의외라고 느낀 것은 네리아와 클레르를 중심으로 한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의 부흥이었다.
물론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이름 대신 ‘이사크레아 새벽기도회’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이 모임에 거의 영지 인구의 1/4쯤은 참석하는 것 같았다. 참석하지는 않지만 영향을 받는 사람들까지 치면 더 많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특히 원래 영지민들이 아닌 난민과 이주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원래 영지에 머물던 사제들은 새벽기도회가 수상한 민간 신앙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아이작이 곧잘 하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수도 출신 사제 클레르까지 합류하자 조금 묘한 ‘다른 해석’ 정도로 받아들였다.
특히 바깥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혐오감을 가진 일부 사제들과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사크레아 영지에 이런 ‘이성적인’ 교리가 있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생각하며 참석하기도 했다.
‘흠, 솔직히 교리도 심심하고 딱히 책임지는 게 없는 신앙이라서 인기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의외라고 생각하셨지요?”
클레르의 웃음기 섞인 말에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은 이 새벽기도회가 주민들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함께 다니며 배급을 도와주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만큼이나 클레르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을 보며 새삼 그 인기를 실감했다.
“솔직히 적을 불태우고 검기 쫙쫙 뿜어내거나 불사의 해골로 만들어 내는 신앙에 비하면 네리아 씨 이야기가 좀 심심한 건 사실이지요.”
물론 깊게 들어가면 촉수 쫙쫙 뿜어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어지간하면 아이작 혼자 독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민 대다수는 빛의 법전 교단에 실망하거나 도망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빛의 법전을 더 이상 믿기 힘들어했지만, 더 이상 의지할 신앙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뭐든 믿고 기댈 것을 원했고, 너희들이 찾아갔다는 거군.”
“약해진 사람들은 조그만 호의에도 쉽게 마음을 여니까요. 하지만 아이작 님의 명성도 크게 한몫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뒷배경 없이는 저희도 이렇게 성장하기 어려웠겠지요.”
“그래도 마땅한 기적도 보여 주지 않았을 텐데.”
“왜 기적이 없겠습니까?”
클레르는 웃으며 대답했다.
“휘황찬란한 기적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기적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바로 그 기적이 되고자 했고, 난민들 역시 이곳에 오는 동안 서로에게 나름대로 ‘기적’을 경험한 것 같더군요.”
클레르가 거기에 대해 난민의 무수한 경험을 뭉뚱그려 이야기했다.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위기와 고난이 닥쳐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을 구해준 것은 기적도 천사도 아닌 함께해 온 이웃들이었다. 쇠르에 대약탈이 닥쳐왔을 때도 그들은 연대해서 강적을 막아 내는 기적을 경험했다.
이미 그들은 기적의 수혜자가 아닌 기적을 발휘하는 당사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제 파문이라는 사태 이후 신의 자비에 기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더군요. 그리고 무너졌을 때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이웃과 친구들이라는 것도…….”
요컨대 빛의 법전이 광기를 드러낼수록, 올칸 규율이 포악한 약탈을 벌일수록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이 연대하려는 힘이 커진다는 말이었다.
아이작은 300년 전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흐름에 기묘함을 느꼈다. 그때도 종교적 광기는 커져 가고 무수한 사람이 핍박받았다. 하지만 왜 그때는 사람들이 멸망을 염원하게 되었고, 지금은 연대를 원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살아남을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배기사님 덕분입니다.”
클레르의 말에 아이작은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해 왔을 뿐이다. 물론 자신이 어느 정도 불어넣은 동기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존경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연대하고 있다면, 그건 그냥 사람들이 원래 서로를 돕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 내가 무슨 모범을 보여서가 아니라.”
아이작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결코 본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 그러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하지만 굳이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면, 사람들이 원래 서로 돕기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약한 인간이 생태계에서 살아남고, 부락을 이루거나 큰 건물을 짓는 것은 단합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본능 때문이다. 이 세계의 신앙이라는 것부터가 그렇지. 혼자서는 이뤄낼 수 없는 기적을, 수많은 신도들이 기도함으로써 이루어 낼 수 있으니까.”
아이작은 그동안 얻은 지식이 저절로 흘러나오듯 중얼거렸다.
“다만 이것 때문에 ‘우리’와 ‘저쪽’의 구분이 강해지면서 죄책감 없이 학살하고 전쟁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 갈등이 궁극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구나.”
“아이작 님…….”
“그리고 이곳은 광기와 전쟁, 살육을 피해 모인 자들의 밑바닥 수렁 같은 곳이 되었지. 사람들은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힘겹게 깨워가고 있구나. 애당초 신앙이라는 것은 두렵고 공포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누구 하나가 탁월하게 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아이작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물론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사크레아 새벽기도회는 미완성이고 나약했다. 규모가 커질수록 빛의 법전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었다.
클레르는 멍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님, 생각지도 못했는데 의외로 생각이 깊으셨군요.”
“뭐? 아니, 평소에 날 어떻게…….”
아이작은 발끈하려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면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술술 풀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말을 하자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 내용을 정리해 준 것처럼 말투까지 바뀌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아이작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들이 흰올빼미가 쓴 책의 지식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씹어 삼킨 지식은 마치 자연스럽게 아이작의 머릿속에 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 뇌를 세뇌하기라도 하는 건가?’
아이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의 기록이 자신이 원래 하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생각이 닿자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는 우르반수스를 떠올렸다. 수많은 시간과 지식, 역사의 축적. 그것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을 끊임없이 압박하며 내면을 채워 넣는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현대인으로서의 자아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생각했다.
현대인의 자아가 남아있는 동안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주의를 주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하지만 언젠가 그 메시지가 아이작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이 세상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지가 무던하게 굴러간다니 다행이군. 마저 일을 할 수 있겠어.”
아이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클레르가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십니까?”
“만생자를 만나러. 이미 내가 도착한 걸 알 테니 더 머뭇거리면 군대를 보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