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대적자 (4)
크락스알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빛의 법전에 그런 기적도 있습니까?”
부패 가속이라니, 어느 신앙에도 그런 부정‘해 보이는’ 기적은 같은 신도들 사이에서 비난받기 쉽다. 불사 교단처럼 백골을 숭배하는 신앙이라면 일부러 살점을 발라내기 위해 시도해 봄직도 하지만, 상대는 빛의 법전이다.
“글쎄. 성배기사가 사실 괴물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저쪽에 워낙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였으니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도 있겠지. 하여튼 시간을 끄는 것이 저들의 계략이라면 성공하고 있다는 거요.”
“무당들께서 기적을 발휘해 막을 수는 없는 겁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기에 키마는 화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패와 벌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오. 올칸의 권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적들은 그걸 단순히 부추기고 있을 뿐이고. 발동되는 순간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워낙 산발적인 데다 다른 위협을 고려하면 거기에만 주의를 기울이기가 어렵소. 같은 이유로 적의 탓이라고 비난하기도 어렵군.”
키마는 거기에 조언을 덧붙였다.
“일단 해충 구제책을 지시해 둔 상태요. 하지만 썩으면 같은 통에 있던 것도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평소보다 군량이 2할 정도 빠르게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군.”
엄청난 군세는 엄청난 군량을 소모한다.
평소에 어느 정도 손실 분량을 감안하고 보급을 하긴 하지만, 2할의 군량 추가 소모는 지휘관 입장에서 머리가 아득해지는 숫자였다. 이 정도면 보급을 수월하게 하려고 산을 다지면서 걷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알겠습니다.”
“아쉽게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도 반격을 위한 의식을 준비하고는 있소. 하지만 곧 겨울이고, 식량도 무한하지는 않소. 죽은 오크를 잡아먹으면서 진군하는 17번째 경험은 사양하고 싶군.”
“좀 많아 보입니다. 키마 장군 무당님.”
“16번째 때도 같은 말을 했다가 같은 대답을 들었지. 정 계속 신중하고 싶다면 병사들에게 오크 조리법을 좀 알려 줘야 할 것 같군.”
물론 비슷한 경험은 크락스알도 있었기에 굳이 조리법 전수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키마의 말이 옳았다.
수십, 수백만의 군대가 소모하는 식량은 어마어마하다. 이 진군 속도로는 이사크레아 영지를 점령한다고 해도 소모량을 메꿀 수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모하고 불태우는 군대였다.
크락스알은 다소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전략을 대거 수정하기로 했다.
***
“전략을 바꿨군.”
아이작은 크락스알을 중심으로 한 오크들의 움직임이 변하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이제 오크들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중심으로 민첩하게 돌파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대신 크락스알은 막대한 숫자의 척후대를 먼저 보내 공격당할시 빠르게 대응하는 것으로 전술을 바꾼 모양이었다.
“똑똑한 놈이야. 내가 유격전을 벌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
아이작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움직이는 오크들의 군세를 지켜보며 말했다. 오크들의 숫자만으로도 땅의 색이 변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기 때문에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헤사벨은 아이작의 말에 헤죽 웃으며 대답했다.
“알면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라고 말해 주고 싶군요.”
“그렇지. 시작하자.”
아이작은 권속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이작이 가지고 있는 전력은 이사크레아 영지의 병력만이 아니다. 그가 힘써 끌어모은 권속들과 성물, 의식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보여 줄 수 없는 것이기에, 유격전에서 빛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아이작이 원하던 전장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작의 권속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움직일 채비를 시작했다.
***
그날 밤, 올칸 규율의 군대는 겔리퍼드 산맥의 첫 번째 능선을 점령했다. 속도전으로 변경한 이상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한 크락스알의 지시에 의해 군대는 상당한 강행군을 감수해 돌파했다. 그 과정에 소수 저항이 있긴 했지만, 사상자는 두 자릿수도 안될 정도로 적었다.
“이대로 이틀만 돌파하면 이사크레아 영지가 코앞이다.”
빠르게 달리는 말이면 하루 만에도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크락스알은 아직 이사크레아 군의 병력은 물론이고 아이작조차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틀은 분명 그 과정에 충돌이 있을 것을 감안한 시간이었다. 그조차도 상당한 강행군이 될 것이다.
크락스알은 키마와 함께 새롭게 바뀐 작전을 상의했다. 쇠르에서 입수한 지도는 이사크레아 영지 공략전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소 옛날에 만들어진 지도였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믿고 공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중적인 저항이 예상되는 위치는 계곡의 다리와 퍼스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성기사 몇 명만 늘어서서 막아선다면 부대 전체를 틀어막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익의 데론 만호장이 퍼스 계곡 위쪽을 시간에 맞춰 공략한다면 우리가 통과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리는 어떻소?”
“다리가 문제입니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견고한 돌다리지만, 놈들이 다리를 파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계곡의 깊이가 상당하니 복구에 시간이 걸릴 겁니다.”
“파괴하는 걸 상정하는 게 좋지 않겠소?”
“글쎄요. 이 다리는 사실상 이사크레아 영지의 가치 그 자체나 다름없습니다. 이 다리가 없으면 이사크레아 영지는 동서를 잇는 요충지에서 제국의 변방으로 추락하게 되지요. 반면 우리는 가교를 건설하면 될 뿐이니 잠깐 지체될 뿐이고.”
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은 필사적이니 파괴를 상정하고 목수들에게 가교 건설 준비를 시켜두는 게 좋겠소. 적들은 빛의 법전 광신도요. 이번에 군영에 잡혀 온 그 사제를 보시오. 내가 전생을 합쳐서 400년 정도 살았는데, 그런 또라이는 본 적이 없어…….”
“저도 들었습니다. 고문관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면서요?”
“그뿐만이 아니오. 눈알이 정말 유리알인가 싶어서 왼쪽을 파냈는데 손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웠다더군. 기적이 담겨있던 거지. 빛의 법전 사제들이 전부 저 모양 저 꼴이라면 나는 그냥 칸에게 적당히 발 빼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드릴 참이오.”
크락스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마의 한탄이 빈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들의 사기가 그렇게 무시무시하다면 올칸 규율의 군대가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좌절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키마가 고개를 번쩍 들고 일어섰다. 그는 허공을 향해 뚫어져라 보더니 급히 크락스알에게 손짓했다.
“만호장.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게 좋겠소. 기적이 느껴지는군.”
크락스알은 다급히 무기를 들고 병영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를 맞이한 것은 분명 막사를 차리기 전까지만 해도 본 적 없던 짙은 안개였다. 산 위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키마가 경고한 이상 부자연스러운 일이 분명했다.
“일어나라!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적습에 대비해라!”
강행군을 마치고 막 잠들 채비를 했던 오크들은 투덜거렸지만, 베테랑답게 태세를 정비했다.
키마는 즉시 자리에 앉아 나름의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크락스알은 살벌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며 안개 너머를 주시했다.
짐승과 벌레마저 달아난 숲은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산스레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일개 징집병들이 이 정도 기도비닉을 유지할 수 있다면 크락스알은 제국군 전부를 기사급 정예병으로 인정할 자신이 있었다.
쉬익, 턱!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린 순간 크락스알은 아슬아슬하게 손을 들어 날아든 화살을 막아냈다. 화살은 그의 손바닥을 관통했지만, 그뿐이었다.
크락스알은 화살을 부러뜨리고 손에서 뽑아냈다.
‘붉은 깃털?’
깃대에는 붉은 깃털이 박혀 있었다. 크락스알은 쇠르에서 죽은 천호장과 백호장들의 머리 대다수에 붉은 깃털의 화살이 박혀 있던 것을 떠올렸다. 저쪽에 악마 들린 저격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화살이 안개 너머에서 몇 대 더 날아들었다.
쉭, 쉬릭, 쉭! 이번에는 화살이 크락스알 같은 실력자 대신 멍하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안개를 응시하던 오크들의 얼굴이나 목에 박혔다.
“저격이다! 대응 사격해!”
크락스알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짙은 안개에서는 오크들이 아무리 명사수라도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상대방은 나무 위를 날아다니면서 쏘기라도 하는 건지 빠르게 위치를 바꾸면서 오크들의 머리통을 꿰고 있었다. 상대방은 볼 수 있는데 자신들은 보지도 못하고 당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오크들의 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이런 젠장, 저건 무슨 악귀인가…… 5, 6천호장! 적습에 대비하며 수색을 진행해라! 무당들은 화살의 위치를 역추적해 주시오!”
결국 크락스알은 위험을 감수하고 병력을 내보냈다.
한밤중, 그것도 짙은 안개가 낀 와중에 하는 수색이다. 이사크레아 군의 매복에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격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고, 설령 매복이 있다 한들 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색대가 파견되자 저격수는 어쩔 수 없었던 건지 저격을 중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영 쪽에서 연녹빛의 은은한 파동을 내뿜으며 안개를 밀어냈다. 키마 장군무당이 의식을 성공시킨 것이다. 크락스알은 우울하게 저격당한 오크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전부 27명. 대부분 일반병이거나 계급이 높아 봐야 십호장 정도였기에 큰 피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28대의 화살 중 크락스알을 노린 것을 제외한 27발의 화살이 목과 머리를 꿰뚫었으니 사기가 바닥을 쳤다. 케식이 쏘는 조상신이 인도하는 화살도 이 정도 명중률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수색대를 다시 불러들이게.”
크락스알은 부관에게 저격수를 찾으러 갔던 수색대의 귀환을 명령했다. 다행히 싸우는 소리가 나지 않은 걸 보니 매복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수색대가 귀환했을 때 크락스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수색에 나선 오크들 중 돌아오지 못한 오크들이 대략 100여 명이었다. 그 안에 5, 6천호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끼어있었다.
불과 30분도 안 되는 수색 시간 동안 벌어진 참상에 크락스알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알 수 있었다.
숲 곳곳에 오크들의 시체가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가지에 꿰인 오크들은 절묘하게 머리에는 닿지 않지만 시야에는 들어올 정도로 전시된 상태였다. 일부는 먹어 치우기라도 한 건지 거친 단면과 함께 신체 일부를 찾을 수 없었다.
그중 5, 6천호장의 머리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잡아먹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입맞춤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서로의 입을 깨무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 형상을 본 크락스알은 자신이 대체 뭘 상대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이게 무슨 광기의 산물이란 말인가?
“키마 장군무당. 우리가 빛의 법전을 상대하는 건 맞습니까?”
“……모르겠군.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오. 우리가 빛의 법전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왔던 모든 물품들은 이 전장에서 쓸모없을 것 같군.”
그러나 크락스알의 좌절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
“헉, 헉……!”
오크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산길을 달렸다.
숨이 목까지 닿고 쇠맛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도저히 달음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연신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아직도 추적자를 따돌렸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뒤를 돌아본 대가로 그는 발밑의 나무뿌리를 놓치고 말았다.
“컥, 헉!”
힘차게 나뒹군 오크는 다급히 몸을 돌려 칼을 뽑았다. 다행히 뒤에는 여전히 아무도 따라붙지 않은 상태였다. 그제야 추적자를 따돌렸다고 확신한 오크는 숨을 토해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 쉬었니? 그럼 이제 일하자.”
순간 등 뒤에서 소름 돋는 목소리와 함께 불쑥 얼굴이 튀어나왔다. 오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숨이 끝까지 찬 폐는 쇳소리만 겨우 토해 낼 뿐이었다.
오크가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남자는, 그대로 그를 찍어 누르며 얼굴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나 남자의 왼쪽 눈에는 그 아름다운 외모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촉수 다발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아는 걸 다 털어놔라.”
콰드드득, 콰득. 오크가 입을 열 것도 없이, 촉수들이 오크의 두 눈 사이로 파고들어 두개골 안쪽 깊은 곳까지 헤집었다. 뇌 안이 촉수로 가득 차면서 으스러진 파편과 뇌수가 구멍 난 눈을 통해 울컥울컥 스며 나왔다.
잠시 뒤, 혼돈의 눈을 회수한 아이작은 자신의 것인지 오크의 것인지 모를 피눈물을 닦아 냈다. 상당히 고급 정보를 가진 오크였다.
‘열심히 추적한 보람이 있었군.’
그날 아침, 크락스알은 우익의 데론 만호장이 이끌던 부대가 갑작스러운 산사태로 진군을 중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던 데론 만호장이 어째선지 숲 한가운데서 뇌와 눈이 녹아내린 상태로 발견됐다는 보고도.
크락스알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본대에 전령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방에 칸의 호위대인 케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올칸 규율의 대족장인 사훌란 칸이 지금 이 전장에 와 있으며, 직접 군대를 지휘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