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대적자 (5)
마왕(馬王), 동방의 공포, 성과 도시를 훔치는 자, 왕관 수집가, 만마의 지배자.
명성과 권력이 강한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사훌란 칸 역시 가리키는 호칭은 많았다.
역대 칸들이 그러했듯 사훌란 역시 강대한 힘과 지성, 야망을 갖춘 모자람 없는 지도자였다. 설령 그렇지 않은 자였더라도 역대 칸들을 보좌하고 지도해 온 지혜로운 명천사 ‘황천’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천조차도 고치지 못한 사훌란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단 한 가지, 바로 말에 대한 다소 왜곡된 사랑이었다. 그의 말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조련사나 사육사로서의 애정을 넘어서 난해한 영역에 이르렀다.
물론 그런 오크가 사훌란이 최초는 아니었고, 최후도 아닐 것이다. 오직 올칸 규율에서만 탄생하는 적지 않은 케식들이 이 취향이 결코 마이너한 취향이 아니란 것을 입증했다.
말 못 하는 말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증언해 줄 수 없으므로, 역대 칸들은 모든 케식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여 키웠다. 심지어 올칸마저 말을 과하게 아끼고 사랑했다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사훌란에게 성적 취향을 이유로 시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아틀란은 사훌란이 그의 군마를 끌고 산 정상까지 올라왔을 때 눈살을 찌푸릴지언정 놀라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칸이라지만 애인을 전장까지 데리고 오다니, 제정신인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발상만으로도 아득해질 문장이었지만 오크들에게는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케식들은 예법대로 칸이 다가오자 무릎을 꿇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틀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앞으로 사훌란이 끌고 온 군마가 말발굽을 남기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훌란은 일반적인 오크였지만, 케식들과 비슷한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거인이라고 불려도 이상함이 없을 정도였다.
나이는 이제 거의 60대로,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오크치고 상당히 늙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의 근육은 여전히 튼튼한 군마처럼 정정하고 탄탄했다.
“저곳이 이사크레아 영지인가?”
사훌란은 겔리퍼드 산자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험한 산자락 아래 낮게 깔린 안개가 비정상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굽어진 산의 길목을 따라 깎아지른 계곡 사이로 작은 농경지와 마을, 성이 이어졌다.
사훌란은 아틀란을 힐긋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시골 마을에 너도 꺾지 못할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놈은 괴물입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들었다. 촉수를 사용했다고?”
아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빠짐없이 사훌란에게 보고했다. 그 외에도 아이작에게 사냥당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영혼 몇몇이 비슷한 보고를 올렸다.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니다.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온 기괴한 무엇이다.
하지만 이걸 이용할 방법은 없었다. 아군에게 퍼뜨렸다간 공포심만 부추길 테고, 적들에게 퍼뜨려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다. 시험 삼아 사로잡힌 사제에게도 말해봤는데,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사훌란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작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만약 그놈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괴물이라면, 아마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내면은 괴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애초에 빛의 법전은 놈을 용납하지 않을 텐데 왜 무리해서 저쪽 편에 서 있는지 모르겠군.”
“내부에서 붕괴시키려는 수작일지도 모르지요.”
“그럴지도. 하지만 하찮은 수작이다. 빛의 법전은 음모 따위로 무너질 신앙이 아니야. 정주민들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지반과도 같은 자들이지.”
푸르르릉. 사훌란은 자신의 곁에 선 군마가 콧바람을 내뿜자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오르테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 군마는 말의 수명을 고려하면 상당히 늙은 나이였지만 사훌란의 순애보는 여전해 보였다. 또한 아틀란의 생물학적 어머니이기도 했지만, 아틀란은 굳이 그 사실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 오르테아의 말대로 이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압도적인 힘뿐이다. 뭔지도 모를 괴물이 아니라.”
“……그렇군요.”
사훌란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살펴보고 코웃음 치며 뒤로 물러났다.
“나의 대적자는 발트제메르 황제나 데라 헤만 같은 전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변방이 아니라 제국 깊숙한 곳에서 마주칠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르테아의 등에 멘 커다란 활을 꺼냈다. 어지간한 오크만 한 크기의 대궁이었다. 올칸이 동방의 드래곤을 잡아 직접 만든 이 활은, 평범한 오크는 활시위를 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니, 애당초 칸만이 쥐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이 활에는 올칸 규율이라면 누구라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심지어 칸조차도 정중한 예우를 갖춰야 하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사훌란 칸은 ‘황천’에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을 쟀다. 철시가 당겨지며 섬뜩한 비명을 내질렀다.
황천에 깃들어 있는 조상들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칸은 환생이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후 황천에 깃들어 후임자를 위해 조언하고 힘을 보탤 의무가 있다.
만생자가 수천의 삶을 경험한 존재라면, 황천은 백여 명의 칸들이 하나로 군집한 존재였다.
황천이 아득한 비명을 지르자 케식들은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사훌란 칸은 그들이 마저 대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활시위를 놓았다.
광풍이 밀어닥쳤다.
***
아이작은 데론 만호장의 머릿속을 헤집은 대가로 올칸 규율이 어떤 전략과 방침을 세웠는지 알 수 있었다. 귀중한 군사기밀까지도 습득한 아이작은 좀 더 수월하게 올칸 규율을 저지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정오 늦게부터 올칸 규율의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뭐지?’
간밤의 야습으로 오크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주긴 했지만, 적들은 오전부터 지금까지 능선 위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부패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할 텐데, 이상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사벨, 적들에게서 뭔가 보이나?’
헤사벨은 아이작 대신 넬 위에 올라타 하늘 위에서 오크들의 움직임을 감시 중이었다. 헤사벨의 낮 시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벽 속의 쥐’를 심어놓은 덕분에 아이작도 시야를 공유받을 수 있었다.
‘아뇨, 어젯밤부터 꼼짝도 안 하고 있어요. 음, 하지만 북동쪽 산봉우리 위에 뭔가 움직임이 있긴 한데…….’
‘움직임?’
‘그 오크랑 말 합쳐진 놈들 있잖아요? 케식? 걔네들이 그쪽에 좀 많이 나타났네요. 그리고 웬 덩치 큰 오크도 하나…… 와, 거의 말 탄 사람급으로 큰데요?’
아이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덩치가 큰 오크는 많지 않다. 그리고 케식이 경호하는 오크는 단 한 명뿐이다.
사훌란 칸, 그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헤사벨, 즉시 넬을 데리고 이탈해라.’
‘넵.’
헤사벨은 아이작의 말에 의문도 갖지 않고 뒤로 빠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뒤로 빠지는 중에도 그녀의 정찰은 계속됐다.
‘아, 지금 쟤 무슨 화살 같은 걸 재는데…… 설마 여기서 도시까지 쏘려고? 말이 되나?’
아이작은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권속들 모두에게 즉시 자리를 벗어나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달린다고 화살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아이작의 시야에 나무들이 찢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먼지구름이 뒤따르고, 충격파가 산줄기를 여러 차례 쪼개 놓았다. 산골 어딘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겔리퍼드 산맥을 뒤흔드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음속을 아득한 속도로 돌파한 화살은 지면에 닿은 순간 폭발하며 나무 수십 그루를 뿌리째 뽑아 허공에 집어 던졌다.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다. 바닥에 꽂힌 화살을 중심으로 땅거죽이 출렁이면서 국소적인 지진이 일어났다.
겔리퍼드 산맥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났다.
아이작은 재빨리 능선을 타고 올라가 화살이 내리꽂힌 장소를 찾아보았다. 무슨 박격포라도 떨어진 것처럼 황폐해진 구덩이가 보였다. 정확히 퍼스 계곡에 보루를 세워놓았던 장소였다.
성기사 두셋만 있어도 막을 수 있던 좁은 길목은 이제 뻥 뚫린 대로가 되어 있었다.
아이작은 지금 이 충격으로 그가 수 주간에 걸쳐 급조한 방벽과 장애물들 역시 모조리 무너져 내렸을 것을 직감했다.
‘아이작 님? 저게 대체 뭐죠? 아니, 잠깐, 저거…….’
헤사벨의 다급한 의지가 들려오다가 급하게 멎었다. 아이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넬은 작은 새처럼 보이는 고도에 있었지만, 이 끔찍한 재앙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넬이 갑자기 궤도를 팩 트는 순간, 붉은 점이 빠르게 추락했다. 구름이 보이지 않은 궤적을 따라 갈기갈기 찢어졌다. 다시 한번 파공음이 산맥에 귀 아플 정도로 울려 퍼졌다.
‘헤사벨, 정신 차려라!’
넬은 몇 번 날갯짓 하다가 추락에 가까운 속도로 땅에 떨어졌고, 헤사벨은 추락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이 든 듯 힘겹게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숲 어딘가로 불시착하고 말았다.
이런 재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기는 하나뿐이었다.
황천. 도구의 형태로 임하고 있는 명천사.
물론 그 역시도 우르반수스에서는 진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활의 형태를 한 황천은 천사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최상급의 성물이었다.
황천을 닥치는 대로 쏴 갈기면 이사크레아 영지를 통째로 난도질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머리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 황천이 더 이상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황천에는 횟수 제한이 있지. 사용자 부담도 크고. 평범한 활이라기보다 전술 병기쯤으로 취급하는 게 맞아.’
하지만 그 말은 즉, 사훌란은 이 정도만 써먹어도 아이작을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아이작은 적의 방심과 태만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불쾌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훌란이 직접 왔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지우고도 남을 만한 희열을 느꼈다.
‘내가 상대할 만한 적수라고 판단했다는 뜻이군.’
아이작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이를 갈았다.
‘좋다, 그럼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되어 주마.’
병사 몇 명과 저주, 권속 따위로 싸울 거라고 생각했다면 칸의 큰 오산이었다.
이미 이사크레아 영지는 올칸 규율을 잡아먹기 위한 거대한 덫이었다. 이제 그 덫이 사훌란 칸이라는 전대미문의 커다란 호랑이를 잡아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가 관건이었다.
***
뿌우─ 뿌우─
사훌란 칸의 철시가 산맥을 두드린 직후, 여기저기서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대기 중이던 오크들이 서서히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제 비탈을 따라 내려가는 오크들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가벼웠다.
크락스알 만호장은 비탈을 따라 만들어진 조잡한 함정들이 황천이 만들어 낸 지진에 붕괴된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역시 이런 자잘한 잔수작 따위가 전략의 전부인가? 사기를 깎고 보급을 저지하는 것?
영리하지만 그 역시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무당들은 본격적인 보복을 위한 의식을 준비 중이었다.
산 높은 곳에서 세 명의 장군 무당이 모여 의식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훌란 칸이 만들어 낸 지진은 이 땅의 사이한 기운을 걷어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단지 화살을 꽂는 위치에 약간의 실용성을 더했을 뿐.
사훌란 칸을 직접 보좌하는 장군 무당, 테헤르마는 춤을 추며 깃털과 종이 달린 봉을 흔들고 제문을 외웠다. 그들 앞에 놓인 붉게 옻칠한 상 위에는 이 지역에서 나는 과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일들에 갑작스레 이빨 자국이 생겼다.
아삭, 콰득, 우득. 과일들은 순식간에 그 뼈대만 남긴 채 쌓였다.
테헤르마는 땀이 흥건한 모습으로 제문을 더욱 빠르게 외우다가 갑작스레 서쪽을 향해 봉을 휘둘렀다.
투두두두둑. 땀으로 흥건한 땅 위에 갑자기 오크의 발자국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반응은 즉시 이사크레아 영지에 나타났다.
“뭐, 뭐야!”
창고에 새로 훈제한 고기를 꺼내오려던 주민은, 눈앞에서 식량들이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씹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다급히 고기를 떼 오려다가 손가락이 씹혀 잘리고서야 비명 지르며 물러섰다. 그제야 이게 다른 무언가의 사악한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사제를 찾기 위해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제때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수도원에서조차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사제들이 그걸 방어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사크레아 영지 곳곳에서, 빵과 고기, 치즈, 심지어 수확조차 하지 않은 밀까지 줄기째 씹혀 사라지고 있었다.
올칸 규율의 아귀 떼.
굶어 죽은 오크의 영혼을 이용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건드리지 않지만 ‘먹을 것’이라고 인식되면 뭐든 씹어 삼키고 우르반수스로 보내 버리는 악령들이었다.
부패 기적에 대한 대응으로, 이사크레아 영지는 악령들에게 식량을 약탈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