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대적자 (7)
아이작 역시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눈과 코, 입에서 피가 줄줄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 빡세다, 빡세. 괜히 무리했네.”
“이게…… 무슨.”
아틀란은 숨을 헐떡이며 검을 쥐려다가, 검은 이미 박살 났으며 팔도 부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면 아이작은 내면이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여전히 선 채로 칼을 들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승부는 정해졌다.
아이작이 새로운 상급검술을 만들기 위해 이미지화 한 것은 블랙홀이었다.
상대가 빛처럼 빠르다면 그 빛을 먹어 치우면 되는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결론이지만, 아이작은 충실한 빛의 법전 성기사다운(?) 결론을 내렸다.
아이작은 코피를 슥 훔치고 혀로 핥았다.
이삭 검술이 포만감만을 소모할 뿐, 신체 부담은 극도로 적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죽은 신의 내장 덕분에 내상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긴 했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아틀란 앞에서 배가 고파서 쓰러질 뻔했다.
‘이삭 검술: 사상지평선’은 엘릴의 검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엘릴의 검술이 압도적으로 빠른 검이었다면, 사상지평선은 압도적으로 무거운 검이었다.
본질적으로는 단순한 내려베기다.
거기에 상급 검술 특유의 현실 왜곡 효과와,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으로서 쌓아올린 경험이 쌓여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 내려베기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천사 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물론 위력은 아이작이 예상한 것보다 한참 모자랐다.
‘기대했던 위력의…… 2% 정도 되려나?’
어쨌든 성공했다는 점에서 1%,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1% 가산점이다.
애당초 천사나 신을 상대하기 위해 구상한 검술이다. 이런 일개 필멸자가 아니라.
아직 성능은 한참 갈 길이 멀었지만,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아이작은 힘겹게 몸을 세우며 아틀란을 노려보았다.
“어쩔까, 아틀란. 아직 승부가 안 났다고 할 생각인가?”
“…….”
아틀란에게선 더 이상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그걸 보고도 덤빌 마음이 있다면 아이작 역시 감탄해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싸울 기력이 없는 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아틀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부러 살려준 건가?”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지도?”
“왜지?”
“아니, 아틀란. 일부러 명확하게 말 안 하고 있잖아. 살려줬다고 하면 네 자존심이 상할 테고, 아니라고 하면 네가 나중에 다시 덤벼들까 봐 겁난단 말이다. 보면 알겠지만 아무 때나 막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야. 힘들어 죽겠다고.”
아이작의 타박에 아틀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승부를 받아들이고 깔끔하게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다. 아틀란은 물러나기 전에 아이작을 향해 한 번 더 말을 붙였다.
“아이작, 항복해라.”
“또 염병하네?”
“네가 항복한다면 칸께 만호장, 아니, 장군 지위를 보장해달라고 부탁드리겠다. 배교자가 얻기 힘든 명예와 지위야. 어차피 너는 빛의 법전 성기사도 아니잖나. 이사크레아 영지가 파괴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네가 결정만 한다면.”
“…….”
아이작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틀란은 그것이 답답했다.
아이작이 대단한 위용을 보여 주긴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방금 검술은 아무 때나 막 쓸 수도 없는 검술이다. 기껏 해봐야 한두 번 쓰고 올칸 군대에게 짓밟힐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에야 항복하는 게 낫지 않나?
아틀란은 아이작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지, 아틀란. 항복해라.”
“……뭐라고?”
“항복하면 우리 마을 경비대장 자리를 주마. 지금 경비대장도 너라면 납득하고 물러날 거야. 정규병은 천 명이 안 되고, 평시에는 오백 명 정도인데,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나름 감투야. 그리고 우리는 다른 신앙이라고 딱히 차별하지 않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래, 잘 알았다. 고생해라.”
아이작은 그 말만을 남기고 숲 쪽으로 사라졌다.
아틀란은 허탈한 표정으로 아이작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
아이작은 헤사벨과 넬을 무사히 구출했지만, 그뿐이었다.
무당들과 케식, 사훌란 칸과 황천에 의해 이사크레아 군의 저항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된 아이작도 유격전을 포기하고 이사크레아 영지로 물러났다. 아틀란의 참패가 알려지긴 했지만, 칸은 양패구상 정도로 판단하고 요양을 명령했다.
유격전을 펼칠 만한 전력이 사라지자 아이작은 보루에 남아있던 병력도 철수를 명령했다. 결사항전은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펼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제와 성기사가 가호하는 수도원이라야 무당의 저주와 주술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예상대로군.”
사훌란은 빠르게 붕괴하는 이사크레아 영토를 점령하며 나아갔다. 이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만 건너면 이사크레아 마을이라 할 수 있는 땅이었다. 그리고 그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예상대로 붕괴된 상태였다.
“발악이라도 하는 중이니 이럴 수밖에 없겠지. 가교를 놓아라.”
사훌란 칸은 큰 감흥도 없이 목수들에게 가교 건설을 지시했다. 이미 굵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기 때문에 목재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수백 년 된 다리를 파괴한 대가로 이사크레아 영지가 번 시간은 고작 한나절이었다.
마침내 오크들의 발자국이 이사크레아 영지에 새겨졌다.
정확히 이틀.
크락스알이 예상했던 시간 안에 칸의 군대가 이사크레아 마을에 진입한 것이다. 아이작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강물을 홀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좌익의 우회가 때맞춰 이뤄진다면 완전한 포위망이 갖춰진다. 성배기사도 빠져나갈 틈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사훌란은 아이작의 반항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고작 이 정도 전력으로 올칸 규율의 대군을 며칠이나 저지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아틀란이 또 한 번 도전했음에도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그 올칸 규율에 반항하는 대적자를 향해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사훌란은 이 성배기사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했다.
마을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당당하게 이사크레아 시가지 안으로 진입하는 오크들의 군세는 거침이 없었다.
점령군이 아닌 개선 행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포효나 피, 약탈, 방화도 없었다. 이제 이곳은 그들의 전초기지로 쓰일 장소였으니 당연했다.
사훌란 칸은 진입하는 군대를 지켜보다가 좀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을이 위치한 계곡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성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지금은 수도원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훌륭한 성채였다.
물론 대포 몇 발이면 으스러지겠지만.
“저항할 전력은 전부 저 안쪽에 있는 모양이군.”
성에서는 심상찮은 신성력이 느껴졌다. 성배기사는 물론, 그가 끌어모은 성물과 바리바리 끌어모은 성기사들, 사제들이 전부 모여 있을 테니 당연했다.
사훌란 칸은 힐긋 자신의 장군 무당, 테헤르마를 돌아보았다.
테헤르마는 잠시 수도원을 노려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 신앙의 기적과 성물이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저 혼자서는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인가?”
“빛의 법전의 태양의 보호 기적, 엘릴의 수호자의 방패, 소금 의회의 백색정화 교리, 심지어 세상의 화로에서 새긴 대지거죽의 룬까지 있군요. 이걸 충돌 없이 섞을 수 있다니, 전 세계를 뒤져봐도 드물 겁니다. 성 자체가 성물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테헤르마의 눈은 흥미와 흥분이 담겨있었다. 사제로서의 경외감과 학자로서의 호기심, 그리고 약탈자로서의 탐욕이 섞인 눈빛이었다.
그러나 사훌란은 그 감정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여전히 썩고 있다고 하니,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대포를 방열하라.”
“아…….”
테헤르마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험한 산을 빠르게 돌파하느라 무거운 대포를 많이 가져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짊어지고 온 다섯 개의 대포만으로도 성채를 박살 내기에는 충분했다. 사훌란은 잠깐 황천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껴두기로 했다.
‘대포로 두들기면 성배기사가 반응을 보이겠지. 아틀란을 무릎 꿇린 그 검술이 칸의 화살까지 막을 수 있는지 보고 싶군.’
대포가 일제히 정렬하여 수도원을 겨냥했다.
그때, 수도원 문이 조그맣게 열렸다. 그리곤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중지.”
“포격 중지!”
사훌란은 중지 명령을 내리고 다가오는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속도로,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터벅터벅 오크 대군을 향해 다가왔다. 사훌란은 유목민다운 훌륭한 시력으로 그가 그 잘생겼다는 성배기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아이작은 느리게 걸어왔지만 사훌란은 그를 부추기지도, 병사를 보내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장수가 홀로 군대 앞에 나선다는 의미는 명확했다. 사실상 무릎 꿇고 기어오는 것이나 다름없는 성배기사에게, 사훌란은 느긋한 아량을 베풀었다.
마침내 아이작이 오크 대군 앞에 홀로 섰다.
이때까지 그들을 괴롭히고 죽인 아이작을 향해 욕설이나 위협을 가할 법도 했지만 아무도 입을 떼는 오크가 없었다.
칸의 앞이기도 했지만 아이작에게서 심상찮은 압박감을 느낀 것이다.
아이작 앞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크락스알 만호장과 키마 장군무당이었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맨손으로 나온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크락스알이 먼저 칸을 대리하는 전령으로서 입을 열었다.
“항복하는 모습치고는 제법 당당하군? 하지만 너무 늦었으니 네 목숨은 내놓아야 할 것이다. 대신 주민들은 살려주마. 당분간 칸의 노예로 일해야겠지만.”
아이작은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같잖다는 듯 크락스알과 키마를 둘러보았다. 이내 그는 관심을 잃은 듯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네가 결정권자가 아니라면 더 높은 놈을 불러와라.”
“뭐라고?”
“칸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 어차피 뒤로 쫄래쫄래 달려가서 물어보고 돌아올 거 아냐. 귀찮게 시간 끌지 말고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
크락스알은 아이작이 마침내 공포와 좌절로 정신이 나가 버렸나 생각했다. 너무 황당해서 지금 네 눈앞에 수만의 오크 대군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없었다.
키마가 대신해서 말했다.
“항복이라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그래? 항복은 너희가 결정할 수 있다고? 잘됐군.”
아이작은 목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올칸 규율은 지금 즉시 항복한다면 무사히 너희 황무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내주겠다. 대신 사훌란 칸은 앞으로 나와 파괴한 도시와 살해당한 주민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하며, 그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고, 또…….”
“그만, 그만!”
아이작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하자 크락스알은 기겁하며 제지했다. 하지만 그가 막은 보람도 없이, 뒤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훌란 칸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였다.
성배기사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된다. 아이작이 미쳐 버린 게 아니란 것만 증명할 수 있다면 사훌란은 그를 두고두고 아껴 줄 생각이었다.
그는 웃음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툭, 투툭.
어느새 그림자처럼 케식들이 크락스알을 지나쳐 아이작 앞으로 나아갔다. 총 여덟 명의 케식들. 아틀란 정도는 아니지만 케식 중에서도 정예한 자들이었다.
케식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릎과 팔을 잘라서 예의를 가르치란 명령이시다.”
그와 동시에 오크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무당들 또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크락스알은 이제 곧 아이작을 향해 몰아닥칠 무자비한 파괴를 예상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어쩌자고 미친 소리를 지껄여서 개죽음을 당한단 말인가. 위대한 전사에게, 칸의 대적자에게 맞지 않는 아쉬운 결말이었다.
“정말 칸이 이끄시는 수백만 대군을 고작 이따위 잡병과 조약돌로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 그 조그마한 머리에 광기를 담는다고 뭐라도 될 줄 안 건가!”
크락스알이 안타까움에 일갈하자, 아이작은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저 병사만으로 너희들을 막겠다고 했지?”
“그럼 어떻게…….”
“나는 용감한 거지 미친 게 아니다.”
그 순간 키마가 갑작스레 고개를 움찔 떨었다.
크락스알은 그 반응을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많은 영혼을 받아들였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크락스알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을 때 키마가 입을 뻐끔거리며 서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좌익에서 우회하던 군대가…….”
두두두두…… 땅이 잔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모든 시야가 아이작에게 쏠린 사이, 어느 샌지 이사크레아 영지 계곡 서편에서 막대한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회해 퇴로를 차단하던 올칸 규율의 군대를 박살 내고 달려오는 새로운 군세였다.
빠빠라 빠암─!
호쾌하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은 오크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나팔 소리의 의미를 깨달은 자들은 다른 신앙에 해박한 무당들뿐이었다.
“……이건, 엘릴?”
엘릴의 기사들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제야 이변을 알아차린 크락스알이 다급히 전투 태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을 한 번 더 혼란에 빠뜨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르르릉! 마치 지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천둥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굉음의 충격파가 땅거죽 위로 튀어 올라 휩쓴 순간, 오크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내 뒤쪽에서도 다급한 고함과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화로! 화로 교단의 드워프와 라이칸스로프들이 광신 입구들에서 기어 나오고 있습니다!”
전술의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많은 군세를 현명하게 상대할 방법은 더 많은 군세뿐이다.
물론 아이작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