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대적자 (9)
아이작은 부려 먹을 천사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신앙을 끌어들인 이상 명천사들도 자신이 아끼는 전사들을 내버려 둘 수 없을 것이다.
리안나의 몸에 임한 명천사는 호수의 귀부인, 니믈롯이었다.
호수의 귀부인이 임했다는 것을 알자 엘릴 기사들은 사기가 더더욱 불타올라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호수의 귀부인은 엘릴 신앙에서 전사한 기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존재다. 그녀가 가호하는 전장은 곧 천국이 보장된 천국이니, 몸을 사릴 이유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엘릴 기사들의 특징 중 하나는, 전장의 광기에 물들수록 강해진다는 점이다.
“니믈롯이시여, 제 전장을 지켜봐 주소서!”
엘릴 기사 한 명이 광기에 젖은 포효를 토해 내며 칼 한 자루로 케식의 몸통을 양단해 버렸다.
소드마스터도 아닌 일개 기사가, 그 두꺼운 케식의 뼈까지 잘라버리는 광경에 오크들은 넋이 나가 버렸다. 그러나 엘릴 기사들은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질 수 없다는 듯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결국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열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칸이시여!”
테헤르마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사훌란은 혀를 찼다. 그는 만생자의 가호도 기대할 수 있으니, 여기서 호수의 귀부인과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사이 전방과 후방 모든 병력이 결딴날 것이다.
‘아깝군.’
사훌란에게는 엘릴 기사들이 몇 명이든, 세상의 화로에서 얼마나 몰려왔든 그들을 뭉개 버릴 만큼의 병력과 자원이 있었다. 하지만 전장이 좋지 않았다.
만약 세 신앙을 동시에 상대로 싸워야 할 줄 알았다면 그는 전략 자체를 완전히 바꿨을 것이다. 이를테면 일단 산맥에 불을 질러 놓고 시작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물러난다.”
사훌란은 이미 물러서기 시작한 병력들 사이로 빠르게 물러났다. 질서정연한 행진은 쉽지만 질서정연한 후퇴는 그 몇 배로 어렵다. 그것도 전장의 광기에 미친 기사들이 달려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국 사훌란은 겨우 만들었던 가교를 건너 지나갔을 때,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부숴라.”
그들의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은 다리를 반나절 만에 부수라고 명령하는 상황에 사훌란조차도 입맛이 썼다. 더군다나 아직 그 건너편에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들이 있는 상황에서.
적들이 건너기 직전에 부술까도 했지만, 저쪽에도 천사가 있는 만큼 결사적으로 지키려 들거나 그 전에 맹공격으로 다리를 탈환할 가능성이 컸다.
남은 병사들을 지킬 최선은 지금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쾅, 쾅! 다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도끼질이 시작되자 상황을 알아차린 엘릴 기사들이 더욱 맹렬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특히 니믈롯이 서슬 퍼런 창끝처럼 최선두에서 오크들을 분쇄해 나갔다.
하지만 오크들은 되레 결사적으로 기사들을 막아섰다. 어차피 죽어도 환생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칸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영혼은 결국 ‘후퇴’에 성공할 테니까.
결국 엘릴 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다리가 붕괴해 무너져 내렸다.
엘릴 기사들에게 떠밀린 전방에 무수한 오크들은 비명 지르며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테헤르마는 또 다시 무수히 죽어 나가는 영혼들을 받아들이고 인도하느라 두통을 앓는 표정이 되었다.
‘이걸로 추격은 막았나. 그러면 이제 드워프 놈들을…….’
그때 사훌란은 니믈롯의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니믈롯이 강신한 리안나는 무너져 내린 다리 앞에서도 전혀 돌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훌란이 그들의 광증을 의심하던 순간, 리안나가 냉기를 품은 성검, 루미아드를 허공에 흩뿌렸다.
무너져 내린 돌다리에서 새하얀 수정이 굉음이 내며 자라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자라난 수정 교각은 기사들 수십 명이 동시에 달려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사훌란은 그 모습을 보고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박찼다. 이곳에서 저 전쟁 광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위치가 좋지 않다. 일단 다시 쇠르로 돌아가서 병력을 수습해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운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콰르르르릉! 갑작스럽게 땅에서 솟구친 벼락에 사훌란은 한순간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탄 말, 오르테아가 강인하게 버티고 서 균형을 잡은 덕분에 쓰러지진 않았다.
수십 명의 오크들이 시커멓게 그을려서 쓰러진 와중에도 그들의 사랑은 강인했다.
사훌란은 땅에서 벼락을 퉁겨 올리는 사내를 알고 있었다. 늙은 몸으로 상대하기에는 거슬리는 적이었다. 사훌란 앞에 머리통만 한 망치를 든 늙은 애꾸눈 드워프가 나타났다.
드워프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사훌란.”
“투할린. 머리가 두 쪽이 나고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투할린은 커다란 안대에 덮여있는 왼쪽 눈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이야말로 네 늙은 말을 구워 먹어주마.”
사훌란은 이 충격적인 말에 분노했다.
이내 두 노전사가 맹렬한 포효를 토해 내며 함께 맞부딪쳤다.
***
올칸 규율과 빛의 법전, 세상의 화로, 엘릴.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지만 이름 없는 혼돈까지 끼어든 이 전투는 며칠에 걸쳐 벌어졌다.
세상의 화로 교단은 아이작조차 다 파악 못 한 폐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산 전체를 누볐다. 도저히 적이 나타날 수 없는 곳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드워프들과 라이칸스로프 전사들의 출현에 올칸 규율은 토막 나며 끊어졌다.
반면 엘릴의 기사단은 맹렬하게 마주치는 오크들을 찢어발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후퇴도 우회도 협상도 모른다는 듯 마주치는 오크들을 모조리 죽였다. 곳곳에서 몇몇 오크들의 영웅적인 분전이 있었지만 모든 지휘체계가 토막 난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진 못했다.
그러나 아이작이 생각하기에 가장 높게 평가받아도 좋다고 생각한 신앙은 올칸 규율이었다.
올칸 규율은 정면에는 엘릴이라는 망치를, 후방에는 겔리퍼드 산맥과 세상의 화로라는 모루를 둔 상태에서 놀랍게도 후퇴에 성공했다.
사훌란 칸이 상당한 병사들을 이끌고 빠져나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게 군사적으로 너무 사기란 말이죠.”
아이작은 오크들의 시체가 수없이 쌓여 가는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올칸 규율은 명령체계가 와해 된 상황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전사’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번 대약탈은 망했다고 판단하고 죽어서 귀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아이작에게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전략적으로는 그들이 우위에 있었지만, 올칸 규율의 오크들은 기본적으로 그 숫자가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사크레아 경이 퇴로를 만들면서 몰아붙이도록 조언해 주신 덕분에 피해를 줄이면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20만에 육박하는 오크들을 전부 다 상대했다가는 우리도 피해가 엄청났을 겁니다.”
엘릴 왕국의 어린 왕, 에델레드는 아이작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를 만났다가 헤어진 것이 반년 전의 일인데 에델레드는 당시의 경험이 큰 계기가 되었는지 어딘가 상당히 성숙해 보였다.
“그 꼬장꼬장한 드워프들이 말을 잘 들어줘서 고마울 따름이죠.”
아이작은 사실 그게 제일 떨떠름했다.
세상의 화로는 올칸 규율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다. 빛의 법전이 불사 교단을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하지만 세상의 화로 교단의 전사들을 이끄는 지도자, ‘벼락망치’ 투할린은 어째선지 오크들이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어달라는 아이작의 요청에 응해 주었다.
아이작은 그 의도를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덕분에 오크들의 피해는 엄청난 반면 아군의 피해는 적었다.
엘릴과 세상의 화로, 이사크레아 군의 피해가 총 천여 명을 겨우 넘기는 동안, 올칸 규율은 15만이 넘는 오크들이 죽거나 다쳤다. 겔리퍼드 산맥 어딘가에서 낙사하거나 길을 잃은 자들까지 합치면 추가로 2만은 더 보탤 수도 있었다.
대략 170:1의 사상자 비율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군사적으로 사훌란의 군대는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아직 후방에 그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지만, 칸이 이끌던 군사들과는 질적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통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둔 것은 천사가 개입한 사건을 제외하면 전무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두 신앙을 이 전장으로 끌어들인다는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화로는 올칸 규율이 아니었다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황제 파문이라는 사태가 없었다면 에델레드는 이사크레아 영지 대신 울텐하임으로 먼저 갔을 것이다.
역사적 우연이 이 압승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 압승에 칸의 탈출이라는 얼룩이 남아 있기는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투할린이 사훌란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아이작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탈출극을 이루어 낸 영웅은 결국 이사크레아 군에 사로잡혔다.
아이작과 에델레드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도착한 절벽 끄트머리에 한 케식이 무릎 꿇고 팔을 뒤로 꺾인 채 쓰러져 있었다.
눕기는커녕 쉽게 앉지도 않는 케식에겐 굴욕적인 모습이었으나, 표정은 평안해 보였다. 그 위에는 투할린이 앉아 있었다.
“성배기사가 오셨군.”
투할린은 피투성이 망치를 기름칠하며 힐긋 아이작을 볼 뿐이었다. 투할린의 지위는 빛의 법전에서 데라 헤만과 비슷한 위치였기 때문에 아이작이 먼저 예의를 차렸다.
“투할린 에데 파다, 낯선 땅에서 벌어진 낯선 전쟁에 참전해 주신 점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하, 낯선 땅은 아니지. 360년 전에도 여기서 오크들의 머리를 뭉개 놨었거든. 어디든 오크 피 냄새가 난다면 그곳이 내 전장이라네.”
360년이라는 말에 에델레드가 놀란 표정을 했다.
360년이면 드워프의 수명을 고려해도 오늘내일하는 늙은이다. 심지어 투할린은 이미 사후 명천사가 될 것을 고지받았고, 벌써 이름까지 지어진 상태였다. ‘벼락망치’라는 호칭이 바로 그가 사후 부여받게 될 새로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직 죽지 못한 투할린은 여전히 현역 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훌란 칸을 마지막까지 추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자가 마지막에 방해했다구요.”
“그렇지. 사훌란, 그 오크 마적떼 두목 놈. 몇 번이나 목숨 걸고 싸울 것처럼 굴더니 질 것 같을 때마다 잽싸게 내빼더군. 나중에는 그놈 마누라를 욕하는 것도 안 먹히지 뭐야. 요즘 젊은 오크들은 목숨을 귀하게 여긴단 말이지.”
투할린의 말에 바닥에 누워 있던 케식이 꿈틀거렸다.
투할린은 망치를 잠깐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케식이 신음을 흘렸다.
아이작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자의 이름은 아틀란입니다.”
“이름을 기억할 만큼 중요한 자인가?”
“올칸 규율의 용사라고 할 만한 자입니다. 사훌란 칸의 아들이고, 아마 별문제가 없었다면 다음 칸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이작이 아틀란을 일부러 살려 둔 이유 중에는 그것도 있었다.
사훌란이 죽는다면 아이작에게 마음의 빚을 가진 아틀란이 칸이 될 테고, 그럼 협상을 좀 더 유리하게 끌 수도 있다. 사훌란이 탈출하더라도 황천이 ‘무능한’ 칸 대신 젊은 칸을 임명하려 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아틀란 이상의 적임자가 없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의 조커였던 아틀란은 엉뚱하게 투할린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었다.
칸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에 투할린은 놀란 얼굴을 했다.
“실력은 별 볼 일 없던데 그 정도인가?”
“며칠 전에 저와 싸우면서 입은 상처가 심각해서 그럴 겁니다.”
투할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과 싸울 때 조금 기묘한 일이 있긴 했지.”
“기묘한 일이요?”
“겨우 사훌란을 거의 잡을 뻔했을 때였지. 갑자기 이놈이 달려들더군. 무기도 안 든 놈이 말이야. 급히 이 녀석 다리를 부러뜨렸지만, 그때 이미 사훌란은 달아나 버린 뒤였지.”
투할린은 툴툴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풀이로 이놈 머리통을 뭉개버리려고 했지. 그때 갑자기…… 사훌란이 맨날 타고 다니는 말. 사훌란이 마누라처럼 아끼는 그 말이 갑자기 사훌란을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들더군. 아니, 난생 말이 그렇게 미쳐 날뛰는 꼴은 처음 봤다니까.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오크 두목이 타고 다닐 만한가 하면서 골통을 부숴 놨지.”
투할린은 찜찜하다는 듯 아틀란을 가리켰다.
“그 순간 이놈이 어머니, 어쩌구 하더라고.”
“아, 음.”
“아니, 오크 놈들이 말한테 발정한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그게 진짜인가? 거기서 애가 나오는 게 말이 돼?”
“그게……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꼴을 보고 나니 이 녀석까지 죽이기가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끌고 와서 인생 교육을 좀 시켜 주고 있었다. 사내가 태어났으면 변혁을 꿈꾸며 세상에 맞서 싸워야지 게으르게 뺏고 약탈할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투할린은 그렇게 한참을 구시렁거리다가 아틀란에 대한 처분은 아이작에게 맡긴다는 듯 등을 돌려 사라졌다. 죽이든 살리든, 자신은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아이작은 말 많은 꼰대가 사라지고서야 한숨을 쉬며 아틀란 앞에 앉았다.
아틀란은 차분한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분노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아틀란이었다.
“전부 네 계략이었나, 성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