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화로가 속삭이는 말 (1)
아틀란의 모친이 사망한 것까지는 물론 아이작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애당초 아이작은 오르테아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고, 계산에도 끼워놓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사훌란 칸을 도망치게 하고, 아틀란을 살려 두었으며, 투할린에게 미묘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든다는 업적을 이뤄 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이작이 의도한 바가 맞았다.
“어느 정도는.”
“……일부러 우리 군대를 영지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였다고?”
“기본적으로는 쇠르에서 벌어진 일의 재탕이야. 그걸 스케일 크게 벌였을 뿐이지.”
물론 디테일한 부분은 크게 다르다.
쇠르에서는 무당들을 제거하여 오크들의 사기를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이사크레아 영지에서는 적들이 퇴각하기 힘들 정도로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동맹군을 드러냈을 뿐이다.
아이작은 기왕 입을 연 김에 에델레드에게도 알려 줄 겸 설명을 시작했다.
“세상의 화로는 이미 일찍 이곳에 와 있었다. 이사크레아 영지는 원래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고, 드워프들에게 광산은 집 같은 곳이지. 그들은 그곳에서 머물면서 너희들이 머리 위로 지나가길 기다렸어.”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며 동쪽을 가리켰다.
“만생자가 듣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지식을 가져오겠다던 내 약속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나도 구하지 못했을 뿐이야. 리히트하임에서 벌어진 난리를 너희도 들었을 것 아니냐.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기왕 실패했으니, 너희들을 도발하는 용도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지.”
“……미쳤군.”
“천사를 도발할 기회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거든. 당연히 바로 날름 넘어오더군. 다만 칸까지 오는 것은 예상 못 했어.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뚫렸고…… 너희들 앞에서 협상하는 척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놔야 했지.”
간발의 차이였지만, 엘릴 기사단이 반나절만 늦었다면 마을은 불타고 수도원은 무너졌을 것이다. 이미 전투에 휩쓸린 마을의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최악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법했다.
아틀란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냐?”
“왜냐니? 이게 이길 방법이었으니까?”
“세상의 화로가 일찍 도착했다고 했었지. 싸울 것도 없이, 세상의 화로 교단이 산맥에서 농성하는 모습만 봤어도 우리는 한참 남쪽으로 우회하거나 이사크레아 영지를 포기했을 거다. 만생자께선 화를 내더라도 의미 없는 보복에 신도들을 소모하실 분이 아니시니.”
그 말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틀란의 말대로다. 굳이 위험과 도박을 감수하고 올칸 규율을 끌어들이고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다 같이 산맥 위에서 농성하는 쪽이 훨씬 더 유리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굳이 오크들을 끌어들여 큰 피해를 강요하기로 했다.
“전쟁영웅이 되고 싶었나?”
아틀란의 비꼬는 말투에 아이작은 피식 웃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는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작에게 명성은 이미 넉넉했다.
아이작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야 남쪽으로 갈 너희 병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 아니냐.”
“……뭐라고?”
“너희는 이곳 점령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만생자도 여기서 기다렸어. 아틀란이라는 불세출의 용사도 지켜보고 있었고. 아마 많은 병력들이 여기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
“만약 싸우지도 않고 너희들을 물리치게 되면, 네놈들은 고스란히 남쪽으로 향했을 것 아냐? 그러면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 너희 미친 오크 도적떼들을 맞이하게 되겠지. 나는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아이작이 대신 싸우기로 했다.
그가 직접 달려가서 돕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적들을 많이 끌어들이고 이곳에서 희생을 강요하는 식으로.
칸까지 죽일 수 있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녀석은 도망쳤다. 하지만 20만에 가까운 전사자와 무수한 자원의 손실은 지우기 힘든 피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잃은 명천사들의 신뢰는 대약탈 자체를 어렵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아틀란은 아이작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로군.”
***
맥락 없는 말에 아이작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에델레드를 돌아보았다.
곁에서 선망하는 눈길로 지켜보던 에델레드는 화들짝 놀라 망토를 추슬렀다.
“어떻게 할까요, 에델레드 폐하?”
“예, 예?”
“이 오크를 어떻게 할까요? 아틀란은 다시 나오기 힘든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지금도 강하지만 이대로 성장한다면 투할린이나 데라 헤만 같은 존재도 될 수 있겠지요. 그 영웅의 생사여탈권이 우리에게 있군요.”
에델레드는 그 중요한 질문을 왜 자신에게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아이작은 차분하게 그 대답을 기다렸다. 에델레드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대단한 용사라면 분명 가호하는 천사가 있겠지요?”
아이작은 미소 지었다.
“예.”
“그 천사에게 맹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용사를 풀어 주는 대가로 대약탈을 중단하고 물러가는 것으로요.”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애당초 엘릴 신도인 에델레드에게 물어본 시점에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딱히 비겁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훌륭한 전사를 숭배하고 경외한다. 그것이 심지어 왕(칸)을 구하고 사로잡힌 전사라면 훌륭한 기사도적 표상이다. 적이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강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그다지 상관없었다.
헤사벨이었다면 뇌에 벌레 박고 마약이든 뭐든 중독시켜서 노예로 만든 다음 보내자고 했겠지만, 모범적인 성배기사(촉수 포함)인 아이작은 그런 끔찍한 짓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선량한 행보에 아틀란이 초를 쳤다.
“올칸께서는 리히트하임의 비밀 서고에서 지식을 얻기 위해 만생자와 황천에게 명령해 대약탈을 일으키셨다. 설마 천만 대군이 고작 손끝 좀 다쳤다고 물러날 것 같은가?”
아이작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네가 더더욱 돌아가야지.”
“……뭐라고?”
“천만 대군이 과장한 숫자라는 건 나도 안다. 설사 진짜더라도 어린애, 노약자, 전부 포함한 숫자겠지. 그 숫자가 전부 죽어 나가면 올칸 규율 그 자체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너희들은 빛의 법전뿐만 아니라 엘릴과 세상의 화로,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를 상대해야 해. 자신 있나? 이쯤 되면 대약탈 말고도 다른 방법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이미 칸이 참패해 물러난 이상, 오크들도 대약탈 그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아틀란이 그 ‘반대파’의 기수가 되기를 바랐다.
만생자를 설득하는 것도, 처를 잃은 사훌란 칸의 분노를 상대하는 것도 아틀란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대로 대약탈이 계속된다면 서로 피를 흘릴 것이 분명했다.
‘이도 저도 안 돼서 결국 대약탈이 계속되더라도…… 아틀란을 따르는 무리가 따로 내분만 일으킬 수 있다면 그걸로 이득이지.’
아틀란은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그러하듯, 케식인 아틀란 또한 올칸 규율에 대한 신실한 신도다. 하지만 전사로서 이번 원정 자체에 의문을 품은 것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모친에 대한 콤플렉스 극복과 아이작과의 싸움이 그의 심경에 뭔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만생자께 의견을 여쭙겠다.”
이 정도로 의견을 돌려놓은 것만이라도 충분한 성과였다.
아틀란은 잠시 눈을 감은 채 기도하듯 속삭였다. 하지만 만생자가 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전사로서 계속된 실패에 만생자도 가호를 그만두고 떠났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아이작은 만생자의 안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생자는 다치고 부상을 입은 자신의 대행자에게 강림하여 무리를 주는 대신, 색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여치 하나가 아틀란의 몸 위로 뛰어올랐다. 여치는 더듬이를 다듬다가 찌륵거리는 울음소리를, 하지만 어째선지 언어의 형태를 가진 소리를 냈다.
[나는 네 이름이 거짓된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첫 마디부터 꺼낸 말에 아이작은 내심 명색이 명천사인 만생자가 속이 좁아서 꽁해 있다고 생각했다.
“아, 그래요. 제 진짜 이름은 이삭입니다. 그거 원한 거 맞습니까?”
아이작의 대답에 만생자는 잠시 침묵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불쾌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 또한 네 이름이 아니다. 성배기사, 너는 네 이름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는 질 것이다.]“좀 더 맥락을 갖추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은 우르반수스에서 살아서 그런가 종종 앞뒤가 없는 맥락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아이작은 그 어법이 거슬렸다. 지금 자신이 지고 있다는 말인가? 지금부터는 솔직히 올칸 규율이 얼마나 쳐들어오든 지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러나 만생자는 더 친절하게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로부터 거둔 승리는 아무 의미 없다.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패배한다.]그녀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지식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패배한다…….]만생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치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휙 풀밭으로 뛰어갔다. 아이작은 만생자가 패전의 충격에 치매라도 걸린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복기 후 딱히 내뱉은 말 중에 적대적인 표현은 없었음을 재확인했다.
노망 걸린 예언자 같은 말만 중얼거려서 그렇지.
‘이삭이 내 이름이 아니라고?’
아이작도, 이삭도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육신의 이름이다. 처음 이 육신에 빙의했던 당시 아이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긴 했지만, 그게 진짜 이름인지는 모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예언 따위에 오래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당장 졸지에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모여든 이사크레아 영지에 해야 할 일들이 무수하게 쌓여있는 상태였으니까.
***
아틀란에 대한 처분은 일단 치료 후 돌려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투할린은 침묵으로 인정했고, 에델레드가 제시한 의견이란 말에 엘릴 기사들도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아틀란만이 이제 입장이 반대가 되어 버렸을 올칸 규율로 돌아가는 것을 껄끄러워했다.
하지만 그는 만생자가 남긴 말을 아이작보다 오래 곱씹는 듯했다.
“아이작. 나는 대약탈과는 별개로 만생자께서 내리신 질문의 해답을 찾을 생각이다.”
“흠, 흑제국 영역은 빛의 법전 교단이 샅샅이 뒤지지 못했을 테니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한 단서를 찾기가 더 쉬울 수도 있겠군.”
“그래. 굳이 리히트하임을 털지 않아도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대약탈을 중단시킬 명분도 선다. 겨울나기는 이미 약탈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고.”
아이작한테 좀 무시당하긴 했지만 올칸 규율은 이미 이사크레아 영지까지 오면서 무수한 도시와 작은 나라들을 약탈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면 게르토니아 제국까지 넘어가야겠지만, 이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 해답을 너보다 우리가 먼저 찾으면 우리가 ‘이길’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승자와 패자의 입장은 뒤바뀌겠지. 빛의 법전은 운이 좋군.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벌써 리히트하임을 불태웠을 거다.”
아틀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구 이름을 먼저 찾겠다고 자신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르토니아 제국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발트제메르 황제가 호구처럼 보여? 그 작자도 사훌란 칸 못지않은 전사다. 파문당하지만 않고 욕심만 안 부렸어도 지금 제국군이 오크들 머리에 창을 꿰고 다녔을걸.”
아이작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황제가 동부의 위협보다 내부의 위협을 더 경계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결국 거기서 비롯된 교만이 황제를 무너뜨린 셈이니까.
“아, 그래. 그거……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궁금한 게 있었지.”
아틀란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제가 파문당했다는 게 진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