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90)
290화. 화로가 속삭이는 말 (2)
아이작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황제가 파문당한 게 진짜냐니, 무슨 헛소리야? 그럼 파문이 무슨 장난이나 농담 같은 건 줄 아냐? 너희도 파문 정도는 있잖아?”
“아니, 나는 틀림없이 빛의 법전에서 또 무슨 이상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리히트 조약이라는 걸 파기하고 다시 천사가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말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잖아. 지금 여기는 게르토니아 신성제국이라고.”
“이상한데?”
“뭐가?”
“나는 리히트 조약이라는 게 뭔지, 자세히는 모른다. 대충 지상과 천상의 권력을 나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그거 때문에 천사들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었는데, 황제가 권력을 스스로 내놓는 바람에 파기됐다면서?”
“제법 자세히 알고 있군? 아니,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 안 해도 된다.”
아이작은 올칸 규율에 잡혀가 고문당하며 ‘황제 파문에 대한 진상’을 강요받았을 사제들에게 약간의 애도를 표했다.
아틀란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면 황제를 칸으로 만들면 리히트 조약은 파기되는 거 아닌가? 어째서 황제를 파문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칸이 아니라 대행자나 교황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만, 아틀란은 대충 비슷하게 이해한 듯했다.
아이작은 한심하다는 듯 반박하려다가, 문득 듣고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천사에게 스스로의 권력을 내놓았기 때문에 리히트 조약이 파기되었다.
그 시점에서 등대지기는 발트제메르를 교황─황제로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이미 리히트 조약은 파기되었으니 발트제메르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도 상관없으니까.
무능한 교황보다 성체인 발트제메르가 훨씬 효율적이다.
‘발트제메르의 야심이 심상치 않아서 미리 배제하려고 한 건가?’
그랬다면 발트제메르를 파문할 것이 아니라 불태워 죽였어야 했다.
그게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굳이 파문하여 감옥에 가두고, 탈출할 기회까지 줬다. 결과적으로 빛의 법전은 배후에 위협 요인을 만들어 둔 셈이 되었다.
황제를 교황으로 만들거나, 아예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굳이 파문한 건…… 발트제메르를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는 뜻인가?’
아이작의 머릿속에 기분 나쁜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발트제메르의 탈출은 등대지기가 의도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
아틀란이 돌아갈 무렵, 겔리퍼드 산맥에는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아직 산맥 곳곳에 흩어진 오크들이 많이 있었지만, 포로가 되거나 추위에 고통받는 것보다는 자살이라는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놈들이 더 많았다.
아마 겨울이 되기 전에 대부분 정리될 것이다.
오크 잔당들은 차례차례 자살했지만, 반면 놈들은 말은 차마 죽일 수 없었는지 그냥 야생에 풀어 두었다.
상당수 말들이 올칸 규율의 군영으로 스스로 복귀했지만, 아이작은 산맥에서 질 좋은 군마를 꽤 포획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사크레아 영지는 졸지에 게르토니아 제국 안에서 가장 많은 군마를 보유한 영지가 되었다.
물론 마냥 많이 가지고 있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군마는 먹을 것도 가려서 먹여야 하고, 먹어 치우는 양도 어마어마한 데다, 용도도 한정되니까. 뭣보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마당에 이것들을 전부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올칸 규율에 보상금을 청구할 수도 없는 아이작은 겨울이 지나기 전에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을 바라보았다.
그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저희 상단에 파시죠.”
전쟁이 대충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잽싸게 복귀한 황금 우상 상단의 이사크레아 지부장, 캐틀린이 의기양양하게 제안했다.
“황금 우상 상단은 용병대의 규모와 질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포격과 행군에 특화된 만 사하르 산 군마라면 충분히 가치 있죠. 좋은 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상인들이 용병대 규모를 그렇게 키워도 되나? 손이 몸통보다 커지는 거 아냐?”
“용병이야 고용하지 않는 신앙이 적은데 뭐가 대수인가요? 용병들도 전부 황금 우상 상단 소속입니다. 짤랑거리고 반짝거리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도들이라 할 수 있죠.”
이 격변의 시대에는 황금 우상 상단도 나름 변화할 수밖에 없는 듯했다. 발트제메르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잠시 아찔한 순간이 왔지만, 그 와중에도 황금 우상 상단은 돈을 아낌없이 풀어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직접 성기사나 사제를 키울 수 없다면, 돈으로 만들어 내면 된다.
실로 금권주의의 화신 같은 집단이었다.
어떤 자들은 황제와 교단이 대립하던 시절에는 양쪽 모두에게 돈을 줘야 했는데 지금은 교단에만 돈을 줘도 된다는, 배은망덕하지만 실로 황금 우상 상인다운 말을 하기도 했다.
아이작은 고민 끝에 보유한 군마의 절반을 팔기로 했다.
캐틀린은 더 많은 군마에 눈독을 들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이작도 쓸 데가 있었다. 그 절반만으로도 아이작은 보상금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자금을 획득할 수 있었다.
***
캐틀린과의 협상을 마친 뒤, 아이작은 버석하게 마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제 곧 찾아올 겨울을 대비하듯 나무들은 앙상하게 마르며 낙엽을 흩뿌렸다. 무수한 낙엽 아래 전쟁의 흔적을 감춘 겔리퍼드 산맥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성배기사, 왔군.”
하지만 눈앞에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않은 자들이 남아있었다.
아이작 자신을 포함하여.
아이작은 폐광 입구 앞 공터에 들어서며 먼저 와있던 투할린과 에델레드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모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수도원이 정갈한 장소겠지만, 두 분은 아무래도 신앙이 다르시니 불편할 것 같아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투할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 성배기사는 예의와 배려를 아는 것 같아서 좋군. 전에 만난 성기사들은 죄 또라이 같았는데 말이지. 나야 이제는 이곳이 내 별장 같아서 좋네.”
“짐은 수도원도 상관없소. 이사크레아 경, 엘릴께서 빛을 부정하신 바는 없으니 말이오. 다만 아무래도 풍광이 좋으니 기분도 좋구려.”
투할린은 이 오래된 폐광이, 에델레드는 탁 트인 장엄한 산맥의 풍경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이작은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를 차렸다고 판단하고 허례허식을 생략한 뒤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두 분은 그동안 저마다의 일로 바쁘셨던 걸로 압니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다음 계획을 생각 중이실 것 같아서요.”
투할린은 그동안 라이칸스로프 전사대를 이끌고 겔리퍼드 산맥 곳곳에 흩어진 오크 잔당들을 잡기 위해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그리고 에델레드는 쇠르 근방까지 정찰 활동을 하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지 관찰했다.
올칸 규율은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고 상처를 핥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당장 대약탈이 재개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또 저 짐승이 발광하기 전에 아틀란이 제 역할을 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엘릴과 세상의 화로, 둘의 목적은 어쨌든 전쟁이었다.
투할린은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 다음 계획 말이지. 드디어 공세로 전환하는 건가?”
“짐은…… 짐의 기사들에게 군공을 세울 기회가 생긴다면 상관없을 것 같군.”
일단 둘은 전쟁에는 찬성인 것 같았다. 투할린은 오크를 죽이기 위해 고립을 깨고 내려왔고, 에델레드는 엘릴의 대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아이작은 일단 그들을 먼저 실망시킬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올칸 규율과 싸우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투할린이 먼저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이지, 성배기사? 나는 네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먼저 너를 도왔다. 빛의 법전은 이렇게 신의를 배반하는 건가?”
“은혜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투할린. 하지만 정확하게 말씀드리지요. 당신들이 평원에서 올칸 규율에게 직접 달려들어서 충돌했다면 장렬한 산화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겁니다.”
“이놈이…….”
“저는 당신들에게 식량과 물자, 안전한 식수, 지도를 제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엘릴과 제 도움 덕분에 더 많은 오크들의 골통을 부술 수 있었지요. 아닙니까?”
원정을 나섰을 때 현지인 협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투할린이야 방문한 적 있다고 했지만 360년의 시간이면 처음 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이사크레아 영지만 해도 2년 전과 크게 달라졌으니.
세상의 화로가 올칸 규율을 막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이 맞아떨어졌을 뿐, 아이작도 큰 도움을 주었으니 마냥 빚진 것만은 아니다.
아이작은 그걸 명확하게 하고자 했다.
투할린이 뭐라고 더 말하려 했을 때 에델레드가 입을 열었다.
“이사크레아 경은 신의를 아는 사람입니다. 먼저 말을 들어보시지요, 투할린.”
투할린이 입을 다물자 아이작은 에델레드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세상의 화로가 이웃에게 베푼 따스한 온기를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쇠르가 아니라 다른 곳을 전장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아이작은 가지고 온 지도를 펼쳤다.
투박하게 손으로 그려진 대륙 전도였다. 하지만 엘릴 왕국부터 만 사하르 평원, 스반바르 군도, 리히트하임, 불사 교단이 점령한 성지까지 중요한 장소는 모두 표기된 지도였다. 에델레드는 처음 보는 양식의 지도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 반면, 투할린은 제국민에게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을 스반바르 군도까지 정확하게 그려진 모습에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짐이 아는 지도와는 조금 다른 형태군. 새로 측량한 것인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일 겁니다, 폐하.”
왜냐면 아이작이 게임 속 맵을 기억을 더듬어 손수 그린 지도였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 그려 낸 것이긴 하지만 게임상에서 제공하는 지도와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고자 노력했다. 정확한 축적은 불가능했지만, 이 시대 기술력치고는 가장 나은 수준이었다. 특히 중요한 지역일수록 정확했다.
아이작은 우선 게르토니아 신성제국의 동북쪽, 이사크레아 영지와 남쪽으로 쭉 이어지는 산맥의 선을 가리켰다. 산맥 서쪽에는 태양이, 동쪽에는 오크들이 그려져 있었다.
“서쪽은 빛의 법전이, 동쪽은 올칸 규율이 점령한 강역을 의미하는 곳들입니다. 많은 게르토니아 신성제국의 영토와 소국들이 놈들에게 짓밟혔지요.”
백제국이 서로와 딱히 친하지 않듯, 흑제국도 딱히 서로와 친하지는 않다. 올칸 규율은 이번 대약탈에서 붉은 성배와 불사 교단 신앙을 가진 나라들까지 약탈함으로써 그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불사 교단과 붉은 성배는 여명군이 동쪽으로 향하는 와중이니 심하게 따지지 않았을 뿐, 서로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이 있을 것은 분명했다.
투할린은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와중에 신도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 성지를 향한 여명군을 진행하다니, 빛의 법전도 제정신 아닌 놈들이야. 그래서?”
아이작은 그 오크들에게 점령당한 동쪽의 영토를 손가락으로 죽 그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희가 빛의 법전이 해야 할 일을 하죠. 우리는 이 선을 따라 남하합니다.”
투할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오크들을 마주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불태워 버립니다.”
하지만 지도를 세로로 긋는 아이작의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손을 내리그으면서 각종 유명한 도시와 역사적 명소, 신성한 땅을 스쳐 지나갔다.
“오크들이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 내려갑니다.”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손끝이 닿는 부분들이 대충 긋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보급과 전략, 휴식을 감안하고 짠 장소들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되자 아이작의 계획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이작의 손이 마침내 바다를 건너자, 투할린은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작의 손이 멈춘 것은 지도 끝자락 아슬아슬한 부분에 걸쳐진 한 장소였다.
등대지기가 화형대에 올랐던 장소이자, 불사 황제 베셰크가 저승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곳.
여명군의 최종 목표.
“이곳, 성지가 제가 생각하는 최종 목표입니다. 저는 빛의 법전보다 먼저 성지를 탈환할 예정입니다.”
“자네…….”
“투할린, 에델레드 폐하. 바다 건너 이곳까지 와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 도와주러 오신 김에 조금 더 멀리까지 가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