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91)
291화. 화로가 속삭이는 말 (3)
성지는 신, 혹은 천사와 깊은 관련이 있어, 깊은 신성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
엘릴의 무덤이 된 엘리온, 미래에 새로운 태양이 탄생할 지역이라 믿는 대화로, 등대지기의 시신이 여전히 불타고 있는 리히트하임, 소금 의회의 신이 묻혀있는 미르미아…… 많은 성지가 있고, 성지마다 중요도와 품고 있는 격이 다르다.
하지만 특정한 지명 없이 ‘성지’라고 하면 모두 한곳을 떠올린다.
무수한 신앙이 발원하고 성자와 천사들이 뼈를 묻은 성지, 루아.
지금은 죽은 자들에 의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버린 차가운 사막 도시.
모든 빛의 법전 신도들은 물론이고 신학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모두들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살아서 도착할 수 없는 그 땅.
살아 있는 신, 불사황제 베셰크가 군림하는 왕좌로 가겠노라고 아이작은 말하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투할린은 못마땅하다는 듯 큰소리로 쯧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미친 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었군.”
그는 분개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떠날 듯 망치를 집어 올렸다.
“모처럼 빛의 법전에 멀쩡한 성기사가 나타났나 했는데, 자네도 여명군이니 어쩌니 하는 광신도였나? 성지를 점령하고 질서를 바로 세워 천년 왕국을 불러와? 하, 백번 그 말이 옳다 쳐도 대체 내가 왜 등대지기 밑 닦아주는 일을 해야 하나?”
하지만 에델레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함께 하겠노라. 애초에 우리 기사단이 바다를 건너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니.”
“허, 참.”
투할린은 어이없다는 듯 한 번 더 혀를 찼다. 에델레드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미 대전쟁은 시작되었다. 엘릴께서는 이 전장에서 그분의 종들이 명예와 영광을 되찾길 바라신다. 저 차가운 사막의 동토에서 엘릴의 깃대를 높이 세우고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쁠 일이 없겠지.”
에델레드는 입가를 만지며 웃었다.
“만약 엘릴의 기사들이 빛의 법전보다 먼저 성지 루아에 발을 디딜 수 있다면 그보다 통쾌한 일이 더 있겠느냐? 엘릴 왕국은 이 전장을 거부하지 않는다.”
예상했던 바였다. 엘릴이 꿈꾸던 대정복전쟁은 아니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세상의 화로가 대륙에 발을 디디면서 이제 모든 신앙들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수백 년 만에 벌어지는 대전쟁이라도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빛의 법전은 성지 수복을 위해, 엘릴은 명예와 영광을 위해, 소금 의회는 그들의 신의 부활을 위해, 황금 우상 상단은 돈 냄새를 맡고, 올칸 규율은 대약탈을, 붉은 성배는 이 아귀다툼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불사 교단은 늘 그렇듯, 영원한 삶을 위해.
다만 아직 모호한 것은 세상의 화로였다.
투할린 입장에선 바다 건너 아득한 먼 땅에 굳이 동포와 신도들의 목숨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싸울 이유가 없다’고 멈춰 있는 것은 모두가 변화를 좇아가는 지금 이 순간, 혼자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괜찮겠습니까, 투할린?”
“뭐가?”
“당신이 뭐라든 등대지기는 리히트 조약까지 파기하면서 제국을 신성 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1차 여명군 이래 최대의 여명군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요. 올칸 규율은 신앙의 사활을 걸고 대약탈에 나섰고, 다른 신앙들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다음’을 위해서요.”
투할린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각 신앙들이 격변하며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연을 끊은 은둔자들의 섬에서조차 포착되는 변화였다.
“모두가 뜨겁게 변화하는 와중에 당신들만 차갑게 식어 있을 예정입니까?”
“이놈이…….”
세상의 화로는 고리타분한 이미지와 달리 변화와 미래적인 가치를 지향한다.
‘빛의 법전은 세상의 화로 속으로 들어갔으며, 지금 있는 빛의 법전은 허구이고, 앞으로 태어날 빛의 법전이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것이다’라는 가장 중요한 교리가 그것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대화로 곁에서 잔불이나 쬐면서 빛의 법전이 탄생하기를 기다려 왔지요. 하지만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울스텐 같은 ‘신의 재탄생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직접 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극단주의자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화로 엔딩을 본 아이작은 울스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의 화로 승리 선언은 강대해진 플레이어가 대화로에 몸을 던져서 신의 육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불완전한 세상의 껍질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재정립할 구세주가 나타나는 것.
화로 장인들은 이 태아에 불과한 신의 산모이자 산파이자 보육자다.
“오만방자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어린놈이!”
투할린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고 차분히 그를 응시했다.
“화로 장인들이 화로의 온기나 즐기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느냐! 우리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네놈들이 칼이나 뚱땅거리는 동안 세상과 신성의 비의를 깨우쳤다! 신께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셨을 때 그분의 손가락에 가락지 하나라도 달아주고자 하는 마음에!”
아이작도 당연히 알고 있다. 세상의 화로가 가진 기술력은 현대인 기준에서도 오버테크놀로지 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있을 정도다. 다만 그 기술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투할린이 들고나오지 못했을 뿐이다.
그 기술은 오직 신이 다룰 무기요, 도구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예쁜 배냇저고리나 몇 벌 장만한다고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겠습니까? 지금은 격변의 시기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거짓 빛의 법전이 영원히 질서를 행세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과격한 말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도발하기 위해서라지만 빛의 법전 성기사가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투할린은 단어 하나보다 아이작이 하는 말의 의미에 분노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망치를 들어 올리더니 아이작의 코앞에 내려쳤다.
쿠르르릉, 쾅!
아이작으로부터 수십 보 뒤쪽에서 굉음과 함께 벼락이 솟구쳤다. 벼락은 하늘에 꽂히면서 광범위하게 퍼지다가 사그라들었다.
아이작은 꼼짝도 안 하고 투할린을 바라보았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다가, 투할린이 먼저 등을 돌렸다.
숲속으로 사라지는 투할린을 보면서 에델레드는 조바심을 느꼈다.
“……선생님. 선생님의 능력을 믿긴 하지만, 너무 도발한 게 아닐까요? 투할린이 전사대를 이끌고 덥석 스반바르 군도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싶습니다.”
“안 돌아갈 겁니다.”
아이작은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투할린처럼 자부심 강한 전사는 절대로 자기가 할 일을 남한테 안 미룹니다. 오히려 살살 잘 달랬다면 ‘이 사기꾼 같은 놈이 뭐라는 거지?’ 하면서 돌아갔겠지요.”
***
투할린이 들었으면 분개하며 한 번 더 망치를 내려쳤겠지만, 실제로 아이작 말대로였다.
그는 거칠게 성큼성큼 산비탈을 내려가면서도 아이작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빌어먹을 성기사 놈.’
투할린은 늙은 드워프다. 신앙심 강한 그는 자신의 생애 중에 세상의 껍질이 깨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이작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토록 신의 탄생을 기다려 왔지만, 정작 신이 탄생하는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워프의 수명을 고려해도 한참 늙은 나이다. 이제 그가 신의 탄생을 지켜볼 확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과격한 급진주의자들이 신을 깨우거나, 하다못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일 때마다 그는 망치를 휘두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은 알이고, 그 알 껍질 아래에는 신이 자라고 있다.
‘알 껍질을 강제로 벗기면 새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단 말인가?’
어미 새가 할 일은 알을 따뜻하게 품어 주고 잘 돌봐주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주제넘은 짓이요, 재탄생할 신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작의 말에 흔들리는 것은 투할린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열에 달구고, 두들기고, 식혀야 한다. 모든 탄생은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이라고 예외이겠는가?
루앗딘은 평범한 등대지기에서 화형대 위에 올라 불타고서야 첫 번째 명천사가 되었다. 엘릴은 반역하고서야 신이 될 수 있었고, 천둥 장인은 벼락으로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며 신명을 철판에 새기고서야 세상의 화로의 명천사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전조도 없이 신이 깨어나 ‘응애’하고 울지는 않겠지.’
투할린은 그런 상상을 하자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엄격한 화로 장인답게 바로 표정을 굳혔다.
문득 투할린은 멈춰 섰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바닥에 주저앉아 주변의 흙과 자갈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오목한 그릇 안에 나뭇잎이 수북하게 쌓이자 아주 간단한 형태의 화덕이 완성되었다. 거기에 투할린이 손가락을 툭툭 비비자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박한 제단이었다.
‘애초에 내가 혼자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천둥 장인으로부터 받은 직무는 올칸 규율을 물리치고 훔쳐 간 기술에 대한 충분한 피의 대가를 받아내는 것. 다른 일을 하려면 다시 허락을 받아야겠지.’
투할린은 자그맣게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며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화로가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시간이 지났지만 세상의 화로는 아이작의 머리를 부수러 오지도, 섬으로 내빼지도 않았다. 어쨌든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아이작은 안도했다.
솔직히 아이작도 올칸 규율 때문에 바다를 건너온 드워프들에게 ‘온 김에 뭐라도 해야겠으니 겸사겸사 같이 성지 정복하지 않을래?’라는 제안이 터무니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면 그냥 그들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굳이 아이작과 함께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에델레드 폐하, 성지로 원정을 가시게 된다면 왕국을 오래 비울 텐데 괜찮으신 겁니까?”
아이작의 말에 에델레드는 머쓱한 표정을 했다.
“안 그래도 모르스 기드온 장군이 그걸 걱정하더군요. 하지만 왕국은 엘릴 이래 처음으로 견고하게 단합한 상태입니다. 마녀 헤카틀리는 성배기사님 덕분에 늪에 숨은 지 오래됐고, 게오르크 가문도 협력적인 데다, 로잘린드 부인은 이번에 원정을 위한 배를 빌려주기까지 했지요.”
엘릴 입장에서는 정말 몇백 년 만에 맞이하는 평화 무드였다. 게다가 이걸 일궈낸 자가 직접 우르반수스까지 가서 엘릴을 대면하고 온 젊은 왕이니, 에델레드를 향한 지지와 충성이 견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델레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사실 엘릴 왕국보다 게르토니아 제국, 아니, 신성 제국이 좀 더 걱정스럽더군요. 원래 원정군은 루주베르크를 거쳐 울텐하임으로 가려 했습니다. 일단 외국 군대가 들어오는 셈이니 그게 좋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출발 직전에 발트제메르 황제가 파문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
에델레드의 말을 듣고 아이작은 누가 누굴 걱정하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엘릴 왕국을 걱정할 처지던가.
지금 게르토니아 제국은 엘릴 왕국 내전 이상으로 난장판이었다.
황제가 쫓겨나면서 체계 상당수가 망가졌고, 사제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귀족들의 권력은 약해졌다. 사제들이 어색하게 도망친 행정 관료들의 업무까지 손대 보려고 했지만 여명군 말고는 제대로 돌아가는 체계가 하나도 없다고 봐야 했다.
‘엘릴 왕국더러 한심하다고 했던 과거의 제 교만한 태도를 반성합니다…….’
이웃 왕국이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비웃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였던 셈이다. 눈물이 다 나온다.
하지만 덕분에 외국 군대 수만 명이 국경을 들락거려도 상관없게 되었으니, 아이작 입장에선 다행인 일이었다.
하기사, 제국을 약탈하겠다고 몰려오는 오크 마적떼도 무시하는 마당에 엘릴 기사들이나 드워프 장인들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 천사(깽판 안 침)처럼 모시면 모를까.
깡, 깡. 아이작과 에델레드가 수도원에 다시 들어갔을 때였다.
수도원 한쪽에 마련된 대장간에서 오랜만에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스텐이 들어와 작업하는 건가 싶어서 다가갔더니, 투할린이 모루 앞에서 작업하는 것이 보였다.
울스텐은 그 곁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투할린은 그 늙은 몸으로 거침없이 누군가의 칼을 두들겼다.
화덕에 쑤셔 넣어 달굴 필요도 없이, 오직 투할린의 망치질만으로도 검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찰흙처럼 형태를 바꿔 갔다. 아이작이 도착해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작업하던 그는, 마침내 만족스러운 형태가 나온 듯 손으로 뜨거운 검을 꽉 쥐고 훑어냈다.
후두둑. 손길을 따라 불순물이 섞여 나오자, 검은 빠르게 식으면서 온전한 형태를 찾아갔다.
솔직히 검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아이작이 보기에도 훌륭한 명검이었다.
투할린은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푹 쑤셔 넣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이미 비슷한 검 수십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제야 투할린은 아이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 영지 지하에 있는 물건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네. 참전 여부는 그다음 답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