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93)
293화. 화로가 속삭이는 말 (5)
‘신이 된다라.’
칼센의 계획이 실패한다는 것을 아는 아이작이 굳이 그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칼센과 자신이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아이작은 이미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이쁨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보통 남의 시체를 함부로 손댈 때 당사자의 허락은 그다지 중요하진 않은 편이다. 이미 이름 없는 혼돈의 시체에 들끓는 벌레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 남긴 유산을 모조리 접수한 것이나 다름없다.
경쟁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성기사가 사실은 ㈜이름 없는 혼돈의 전권대리인이자 상속자, 신임 회장, 언더커버 보스란 말이다.
새로운 신은 아니더라도 이름 없는 혼돈을 부활시키기에는 조건이 충분할 것은 분명했다.
“딱 잘라 말하지요. 안 합니다. 안 할 거구요. 안 해요.”
아이작의 단호한 말투에 투할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말했다시피 나는 빛의 법전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조금 손봐줄 생각이긴 하지만, 그뿐입니다. 만약 그 과정에서 촉수 괴물들이 들끓을 것 같다면, 차라리…… 음, 먼 곳에 가서 살죠.”
말이라도 자살하겠다는 말은 목숨이 아까워서 못 하겠다.
아무것도 없던 수도원 생활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다.
이런 변명을 투할린이 들어줄까 싶었지만, 다행히 투할린은 아이작의 내면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애당초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신도들에게 휘둘리는 존재일 뿐이라구요. 전지전능한 절대자도 아니고, 왜 그런 걸 해야 하죠? 차라리 황제를 하고 말지.”
“옳은 말이야.”
투할린은 음울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어떤 신도 남들을 다스리고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신이 된 것은 아니라네. 모두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
아이작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가 이 땅에 자리 잡은 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애초에 헨드락 영주가 저를 초대했다니까요? 카일 헨드락이 아직 여기 있으니 물어보십시오.”
물론 거짓말이다. 아이작은 헨드락 영지가 귀한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가치가 나날이 떡상하니 자리를 잘 잡은 것 같긴 한데, 어째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맨홀 뚜껑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자네의 품성은 믿네. 하지만 자네가 신이 되지 않을 것이란 말은 믿기가 어렵군.”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아이작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품성이 다소 의심스러운 반면, 신은 정말로 될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명천사 고지가 거북해서 거절하려다가 실패한 상황인데 신이라니?
“만약 자네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빛의 법전에 의해 학살당하고 핍박받는다면, 그래서 그들을 지킬 방법이 자네가 신이 되는 길밖에 없다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건…….”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엘릴도 같은 이유로 신이 되었다.
빛의 법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물론 그럼에도 패배했지만, 사람들을 지킬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아이작에게도 선택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등대지기와 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투할린의 말은 상당히 실현 가능성이 높은 예언이었다.
아이작이 대답 못 하자 화덕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할린은 잠시 그곳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화가 끝났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이작은 망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투할린은 아이작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듯 손을 내밀었다.
“좋은 답변이 되었네. 아이작. 앞으로 잘 부탁하지.”
“예?”
“세상의 화로는 이사크레아와 함께 하겠다.”
***
“여전히 생각은 그대로이십니까, 천둥 장인이시여.”
아이작이 떠난 뒤, 투할린은 잔불만 남아있는 화덕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저는 아직 그 성배기사를 완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자는 이기적이고, 음흉하고, 비밀스러운 자입니다. 세간의 평가는 그자가 네필림이라서 현혹된 자들이 긍정적으로 퍼뜨린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화덕에서 잔불이 타탁 튀었다. 투할린은 그 소리를 듣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모든 신들이 그러하다구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모든 신들은 자신의 신도들을 위해 이기적이고 음흉하고,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투할린은 망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망치로 그는 고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부수지 못하는 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창조하기도,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전대미문의 원재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화덕의 불꽃이 속삭였다. 투할린은 죄책감 어린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천둥 장인께서는 이 원정을 반대하신 이유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는 망치를 손에 꽉 쥐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없어도 그 젊은이는 분명 장래에 무언가가 될 겁니다. 천둥 장인께서 우려하신 그런 몹쓸 것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도록 두들기고, 훈육하고, 설득하는 것이 늙은이들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망치에서 흘러나온 뇌전이 파직거리며 주변의 칼과 망치 사이로 튀었다.
“만약 고칠 수 없다면, 그 젊은이가 몹쓸 것이 되기 전에 제 손으로 직접 부수는 것도 제가 짊어진 짐이겠지요.”
***
아이작은 예상치 못했던 ‘세상의 화로의 협력’이라는 대박 카드를 받고 기뻐 날뛰었다.
물론 영주이자 성배기사로서의 품위와 겸손을 위해 방 안의 침대에서 굴러다니는 것으로 기쁨을 표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천장에 헤사벨이 매달려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한참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헤사벨과 눈이 마주쳤을 때, 아이작은 점잖게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전에 감사를 표하는 의식이었다.”
“오, 아무 말도 안 하셨으면 그런 못 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정확한 의식 절차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못 본 척하고 넘어가. 별일 없었나?”
헤사벨은 천장에서 내려왔다.
황천의 사격에 휩쓸렸던 헤사벨은 추락으로 인한 부상에서 이미 벗어난 지 오래였다. 피만 보충하면 얼마든지 치유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크 시체가 즐비한 전장은 그녀에게 공짜야전병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요양을 가장한 채 영지 곳곳을 감시하고 다녔다. 주로 주요한 인물들이 있는 장소들을 위주로.
현재 이사크레아 영지에는 엘릴과 세상의 화로 측의 거물들이 갑자기 모여든 상태였기 때문에 과포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예상대로 헤사벨은 심각하게 말했다.
“에델레드 왕과 리안나 게오르크가 엊그제 겨우 손을 잡았던 모양이더라구요. 이렇게 숙맥이어서 대체 언제 같이 자고 언제 애를 만들죠? 에델레드가 어리니까 리안나가 리드해 주면 좋을 텐데, 이 아가씨는 전장이 아니면 관심도 없어 보여요.”
“좋아, 다음.”
“라이칸스로프 전사대의 라울록이라는 전사가 레이나 힐드에게 고백했어요. 팔씨름에서 거침없이 꺾어버리는 그 팔뚝에 반했대요.”
“그래, 다음.”
“클레스 사제가 네리아 양과 심야 데이트를…….”
“잠깐, 헤사벨.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뭐지? 가십거리 취재인가? 왜 이렇게 정보가 편중되어 있어?”
“이게 제 전공인데요. 이것만큼 중요한 주제가 있나요?”
“누가 누굴 죽이겠다고 이를 갈고 있거나, 수상한 자가 몰래 숨어들었는데 숨겨주고 있다거나 그런 일은 없나? 나는 지금 여기 모인 피 끓는 전사들이 서로 죽이기 전에 빨리 원정을 떠나고 싶단 말이다. 준비만 끝난다면!”
“아, 물론 있지요. 아이작 님을 죽일 가능성이 높은 자가 몰래 숨어들었는데, 에델레드 왕이 숨겨 주고 있거든요.”
“뭐라고?”
***
“……오랜만에 만납니다. 시드리크 경.”
‘변덕쟁이’ 시드리크.
엘릴의 소드마스터이자 엘릴 왕국에서는 로잘린드 부인을 도와 에델레드를 죽일 뻔하기까지 했던 그가 골목 반대편에 서 있었다.
시드리크는 헤사벨 앞에서 얼어붙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시드리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설마하니 에델레드 폐하께서 당신을 죽이려 했던 자를 숨겨 주고 있으실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숨어들어왔습니까? 또 누구의 의뢰라도 받았습니까?”
에델레드가 마련해 준 방에서 시드리크를 끌어내는 것은 간단했다. 창밖에 헤사벨이 외모를 드러낸 채 몇 번 골목을 왔다 갔다 했을 뿐이었다.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 받았을 것이 분명한 소드마스터는 그렇게 손쉽게 낚여 버렸다.
“아, 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배기사님. 다른 게 아니라…… 가는 길에 잠깐 들렀는데, 에델레드 폐하께서 꼭 성배기사님을 뵙고 가라더군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갑자기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에델레드 딴에는 배려를 한답시고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준 모양이다.
확실히 시드리크에게서는 더 이상 살의나 원한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에도 그다지 나쁘게 헤어진 편은 아니었으니, 흉흉한 의도로 온 것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는 길? 어디로 가던 길입니까?”
“그게…….”
시드리크는 머뭇거리면서 헤사벨을 힐긋거렸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기가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 오늘 밤은 영원히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헤사벨을 만나려고 오신 겁니까?”
“아, 아니. 오해입니다. 저는 동쪽으로 가던 길입니다. 거기서 우연히 옛 지인이 생각나 방문했을 뿐이구요.”
“저희가 지인이라고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동쪽 어디요?”
“그게…….”
“설마 왈라이카 왕국은 아니겠지요.”
“…….”
시드리크는 시선을 회피했다. 헤사벨은 말없이 쿡쿡 웃었다.
아이작은 처량 맞게 나이만 든 이 소드마스터가 불쌍해졌다.
헤사벨이 자신 앞에서 때때로 바보 같이 굴기는 해도 실상은 왈라이카 왕국의 공작가 출신이다.
시드리크 정도의 숙맥을 구워삶는 것은 그녀에게 손쉬운 일이었다. 심지어 시드리크는 헤사벨 때문에 한 번 패배했으면서도 여전히 반성이 없어 보였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한 남자를 구제해 준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엘릴 왕국을 떠나기 전에 데려가 보려고 찾았던 자였다.
“이런 여관에 숨어 있지 말고 수도원에서 머무십시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 미래에 대해 잠시 논의해 봅시다.”
소드마스터 정도의 전력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놓아줄 수는 없다.
시드리크가 좀 한심해 보이더라도 로잘린드 부인을 도와줬던 사건에서 보았듯, 필요할 때에는 놀라운 지략과 실력을 보여 주는 자다.
헤사벨이 웃으며 손등으로 시드리크의 손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엘릴의 용사님.”
여자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왕 휘둘리기 쉬운 존재라면 일찌감치 우리 편으로 코를 뚫어놓는 편이 좋아 보였다.
***
세상의 화로가 새로운 계획에 편입되면서, 아이작은 누가 영지에 남고 누가 원정에 참여할지 선별에 들어갔다.
모두가 원정을 떠날 수는 없었다. 올칸 규율이 다시 대약탈을 재개할지도 모르고, 빛의 법전도 안심할 수 없었다. 불사 교단도 성지가 위협받으면 후방 테러에 나설지도 모른다.
‘날 견제할 세력이야 차고 넘치지.’
그리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임무 특성상, 대규모 원정군보다는 소수 정예의 침투 급습이 더 유리했다. 거기에 맞는 아이작이 생각한 적당한 루트가 있었다.
엘릴 기사들은 당연히 전원 출정한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로 왔으니까.
라이칸스로프 전사대와 화로 장인들도 절반쯤 출정한다. 게벨과 로튼해머 성기사단도 함께하고, 이사크레아 군 소속의 병력도 참전했다. 소수 정예라고 싸울 병력만 있어선 안 되니, 그 외 보급과 정비 임무를 맡아줄 사람도 필요했다.
하지만 아이작도 전혀 예상치 못한 동행이 추가되었다.
“사망 보험을 풀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이작은 시라크사에서 이곳까지 데려온 고아 소녀, 안젤라에게 걸린 기적을 풀 수 없다는 말에 당황했다.
사망 보험 기적은 동네 사제도 해제할 수 있을 만큼, 어려운 기적이 아니다.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지의 수많은 사제들은 물론 화로 장인들까지 달려들어도 해제에 실패했다.
간신히 안젤라에게 얽힌 교리의 구조를 해석해 낸 사제가 식은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평범한 계약이 아닙니다. 애당초 어떤 지식을 발설하거나 드러낼 수 없다는 조건으로 여러 개의 보호 교리가 중첩되어 걸려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