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96)
296화. 저울 반대편에는 (3)
레오노라 베시아는 표면상 다른 신앙의 플레이어들 눈에 크게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그래봤자 결국 상인, 그래 봤자 결국 이인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금 우상 상단 플레이할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베시아 가문은 벌써 5대째 황금 우상 상단의 상단주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금 가주인 벨만 베시아 밑에는 3명의 자매가 있다.
그중 차녀인 레오노라는 가장 특출난 재능을 가졌다.
그녀는 플레이어를 철저하게 장기말로 부려 먹으며 같은 자매든, 적이든, 아군이든 가차 없이 잡아먹고 황금 우상 상단이 이 비좁은 틈에서 승리할 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의 증명이 아닌 오로지 스스로의 출세를 위한 것이다.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괴물, 황금 우상 상단의 영웅으로 부족함이 없는 인재였다.
그녀와 동업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수많은 도덕적 갈등과 속이 안 좋아지는 상황들을 여러 번 겪게 된다.
‘게임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이겨야 하는가?’ 하는 인간성을 시험받는 것이 황금 우상 상단 플레이의 딜레마다.
‘레오노라가 왜 여기에?’
그것도 왜 자신의 손을 붙든 채 부끄러워하고 있단 말인가?
아이작은 뒤늦게 이 부끄러워하는 반응 역시도 계산된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행동인 셈이다.
아이작은 재빨리 손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레오노라 양.”
“예? 성배기사님이 제 이름을 들을 일이 있었나요?”
아이작은 아차 싶었다. 둘은 활동 영역이 전혀 겹치지 않는다. 그리고 레오노라가 이름을 알려 봤자 악명뿐일 것이다.
“캐틀린이 황금 우상 상단에 아주 훌륭한 후계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단주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아가씨라면서요.”
캐틀린은 자기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보았지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곧 자기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레오노라에 대해 칭찬했는지 늘어놓았다.
캐틀린의 칭찬에도 레오노라는 멋쩍은 미소만 옅게 지을 뿐, 아이작에게서 사랑에 빠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연기라면 황금 우상 상단은 연극의 기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아이작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피해 자리에 앉았다.
레오노라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아이작에게는 뱀 같은 시선일 뿐이었다.
“아름다우신…… 아니, 이름 높은 성배기사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상단 역시 성배기사님의 귀한 명성을 온갖 입을 통해 듣고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선물 몇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레오노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수북이 쌓인 상자를 하나하나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얽히면 안 된다고 생각한 아이작은 겸허하게 사양하려고 했지만, 첫 상자부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성배기사들은 성물을 수집하여 신에게 돌려주는 일을 주요 미덕으로 삼는다고 들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빛의 법전의 성물처럼 보이는 향로가 담겨 있었다.
척 보는 것만으로도 주교급 인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성물이었다.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원래 대부분의 성물들은 그렇다. 단지 품고 있는 신성력이 강할 뿐이다. 그 강한 신성력이 사제의 기적과 합쳐지면 훨씬 더 강력한 기적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아이작은 뒤이어 다른 상자들도 열어 보았다. 앞선 향로 정도는 아니지만 하나하나 적지 않은 가치를 품은 성물들이었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아이작조차 홀릴 만한 보물들의 향연이었다.
그때 아이작은 눈에 띄는 물건을 하나 더 발견했다.
“이건 염료군요?”
보라색 가루가 다섯 개의 유리병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어쩐지 신비로운 빛깔을 가진 그 보랏빛이 묘하게 아이작의 시선을 끌었다. 염료는 선물하기엔 미묘한 물건이었기에 더욱 신기했다.
레오노라는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귀한 물건을 알아보시는군요. 지금은 잊힌 고대 유적지에 들러붙은 색상을 갈아내어 모은 것입니다. 거의 신전 한 채를 하얗게 갈아내다시피 했지요. 한 병에 황금 한 상자를 내놓겠다는 귀족도 있었습니다.”
레오노라의 말을 듣고 나자 눈앞에 황금 다섯 상자가 진열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황금 상자라니. 이보다 운송 효율이 좋은 물건도 드물 것이다.
하나하나 눈을 돌리기 힘든 보물들이었기에, 아이작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일단 꺼냈다.
“……너무 과한 물건들입니다.”
”성배기사님이 세상과 저희 상단에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부족한 선물입니다.”
레오노라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금 우상 상단이 끌어모은 보물들이 엄청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성물들을 기꺼이 선물로 내놓는 걸 보니 섬뜩할 정도다.
황금 우상 상단은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레오노라라면 더더욱.
“성배기사님이 애써주신 덕분에 엘릴 왕국과 소금 의회의 협조, 세상의 화로까지 대륙에 발을 딛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그것만으로도 큰돈을 벌고 있습니다. 전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의 화로가 대륙에 발을 디딘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벌써 그사이에 뭔가 장사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어도 이 정도 호의를 가볍게 베푸는 걸 보니 최근 돈을 적지 않게 번 듯했다.
“이번 전쟁으로 돈을 많이 번 모양이군요?”
아이작은 조금 분위기가 차가워질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지만 레오노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 미소에서 소시오패스의 편린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예. 보통 전쟁이 벌어지면 무역이 끊어지고 경기가 얼어붙지요. 그래서 황금 우상 상단은 전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더군요.”
레오노라는 수줍은 미소를 띤 입가로 와인 잔을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황제가 일부 품목에 대한 군납 독점을 허락하면서 이득을 보았습니다. 경기 위축으로 인한 손실을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였지요.”
“발트제메르 황제가 실각해서 실망스러우시겠군요?”
“아아, 물론 그때 ‘일부 불한당’들이 상인들을 습격하면서 문제가 생길 뻔했지만, 오히려 교단이 전권을 틀어쥐니 상황이 더 나아지더군요. 사제들이 졸지에 국가 경영도 해야 하는데, 행정에 재능이 없다 보니 제국에서 운영하던 사업 몇 가지를 ‘경영효율화’를 위해 불하받았습니다.”
“호오, 어떤 걸까요?”
“흐음, 기존에 행하던 군납은 기본이고 납세, 세금 운송, 도로관리, 항만 이용료, 광산독점 채굴권…… 뭐, 몇 가지만 추리자면 그 정도지요. 황제가 있을 때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지요. 게다가 사제들은 여명군과 관련된 거라면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돈을 펑펑 쓰더군요. 빛의 법전에 축복이 있기를.”
이것이 끔찍한 민영화 판타지─아포칼립스다.
장담컨대 ‘일부 품목 군납 독점’에서의 품목이란 베시아 일가의 자매 중 분명 레오노라가 담당하고 있던 품목들일 것이며, ‘일부 불한당들의 상인 습격’은 경쟁하는 자매가 운영하는 상단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교단으로부터 얻어낸 사업권 또한 레오나가 뜯어냈을 것이고.
아이작이 황금 우상 신앙으로 플레이할 때 주로 하던 일들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레오노라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이내 지나치게 뿌듯한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얻는 이득은 일시적일 뿐이지요. 상황이 어려워지면 교단도 다시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니, 그 전에 전쟁이 끝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금 우상 상단은 이번 전쟁의 빠른 종전과 승리를 기원합니다.”
레오노라는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나 신앙 증명, 승리 선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작은 후안을 자본주의 속물이라고 욕한 적 있었지만 레오노라와 비교하니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역시 ‘진짜’는 다르다.
아이작은 레오노라가 가져온 선물들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에게 투자하려는 것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논공행상을 할 테니, 그때 분명 큰 공을 세울 아이작에게 미리 베팅을 하는 셈이었다. 실제로 아이작은 성지를 공략할 자신이 있었으니 그녀의 안목은 실로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아이작이 사실상 이교도라는 점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콩깍지가 씌었거나.
‘황금 우상 상단도 필사적이군.’
레오노라는 자랑하듯 말했지만, 아이작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늘어놓은 성과는 결국 황금 우상 상단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강조였다.
이런 종교적 광기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황금 우상 상단은 신앙 중 세력이 가장 약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강력한 신앙에 의존하는 한편,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강하게 들러붙는 수밖에 없다.
만약 빛의 법전이 황금 우상 상단을 쳐 내려면 팔을 잘라 내는 고통 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공생하는 관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시오패스긴 하지만 황금 우상 상단이 살아남을 방법은 이런 방법밖에 없긴 하지…….’
“그리고 성배기사님께서 저희 상단에 베푸신 큰 은혜가 한 가지 더 있지 않습니까.”
레오노라는 문득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캐틀린의 옆자리에 안젤라가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셀몬 상인의 살아남은 아이라고 들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 저희는 상인들을 후원하고 투자하고 지켜주긴 하지만, 셀몬 상인들만큼은 어떻게 가호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홀로 내버려 두고 떠나도 좋을 정도로 돈을 버는 게 중요할까요?”
레오노라가 안젤라를 바라보며 눈시울마저 붉히자, 아이작은 인지부조화를 느꼈다.
잘생긴 성배기사를 보며 부끄러워하고, 부모 잃은 고아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 여자가 진짜 레오노라 맞나?
하지만 아이작은 곧 정신을 차렸다.
레오노라는 지금 여기서 울면서도 내일 채무자의 자식들을 노예로 파는 문서에 서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광기 넘치는 시대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지요.”
“불행 중 다행일지 모르겠지만, 캐틀린 지부장의 보고를 듣고 확인해 보니 안젤라의 큰어머니뻘 되는 친척이 베시아에 살고 있더군요. 셀몬 상인들은 종종 회합을 갖곤 하니 아마 만나 본 적도 있을 겁니다.”
아이작은 안젤라의 친척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생각지도 못한 기분을 느꼈다. 애당초 충동적으로 구출한 데다 부모도 다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으니 찾을 생각도 못 했지만, 이 미친 시대에 피가 이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 다행이군요.”
“그렇지요. 셀몬 상인들은 아무래도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아 상부상조하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먼 친척의 자식일지라도 기꺼이 입양하고 키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이작은 기묘한 서운함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라에게 엮인 비밀이나 지식은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성지 수복은 사제와 성기사와 천사들의 일이다. 열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라.
만약 안젤라에게 해 줄 만한 것이 남아있다면 나중에 불사 교단에서 리치 한 마리 잡아다가 협박해서 사망 보험과 각종 저주를 해제하는 것뿐이었다.
레오노라도 이렇게 말해 놓고서 안젤라를 어디 내다 팔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짓을 했다가 아이작의 원한이라도 사면 몇 배로 재앙이니, 오히려 반대라고 보는 편이 좋았다.
안젤라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곁에 두면서 후원함으로써 아이작과의 인연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일 것이라고.
‘나쁘지 않군.’
성배기사의 뒷배경과 부상단주의 후원.
말 못 하는 소녀라 할지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이만한 환경을 얻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아이작은 곧 원정을 떠난다. 안젤라를 이사크레아 영지에 방치해 두는 것보다는, 그녀의 친척들에게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물 공세를 마음에도 없이 거절하던 때와는 정반대의 마음으로, 아이작은 안젤라를 레오노라에게 맡겼다.
***
레오노라는 바로 그날 안젤라를 데리고 떠났다.
묵고 가라는 제안에도 레오노라는 상단의 일이 시급하다며 서둘렀다. 아이작은 끝까지 레오노라가 준 선물들을 겸손하게 사양했지만, 그녀는 말들이 선물을 지고 오느라 너무 지쳐서 다시 짊어질 수 없다는 되도 않은 핑계로 그대로 두고 떠났다.
풍족한 군자금과 성물이 갑작스럽게 추가되었다.
만족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어쩐지 휑한 마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안젤라 때문인가?’
아이작은 딱히 그 소녀와 그다지 인연을 쌓은 바가 없었다. 구출은 충동적이었고, 이후로는 적당히 맡길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말을 못 하니 대화도 못 한다.
‘강아지를 키우다가 없어졌을 때의 상실감하고 비슷할지도…….’
결국 안젤라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이 자리를 차지했다가, 그대로 공백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결국 안젤라의 본명이 뭐였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젤라는 본명이 아니잖아. 울텐하임의 고아원에서 지어준 이름이지.’
아이작은 소파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레오노라는 대체 무슨 기록을 보고 안젤라의 친척을 찾은 거지?’
섬뜩한 생각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작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감을 따라 수도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냐는 헤사벨의 질문에 대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레오노라 일행은 아직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멍청한 짓을 되돌릴 시간은 충분했다.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