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00)
300화. 황금을 쫓는 눈동자 (1)
원정은 바로 다음 날부터 이루어졌다.
이미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출정에도 당혹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갈 뿐이었다.
엘릴 군은 동쪽, 아직 올칸 규율의 잔존 병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정면 돌파하는 길을 선택했다. 올칸 규율은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그만한 공을 세우기 좋은 전장도 없는 데다 무엇보다 탁 트인 평야가 그들의 기동력을 살리기 좋았다.
세상의 화로는 산맥을 타고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했다.
험난한 산지는 라이칸스로프 전사대와 드워프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산맥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동선을 만들자 기사들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가능성까지 보였다. 당분간 오크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드워프들에 대한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사크레아 군은 다른 두 세력보다 정예함이 부족했지만 ‘이사크레아 성기사단’과 ‘성자 아이작’이 수호하는 군대라는 깃발 아래 사기가 충만했다.
로튼해머는 동선을 특이하게 잡았다. 아직 제국령에 속한 서남부를 통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이작은 그의 의도를 금방 알아보았다.
“여명군을 끌어들일 생각입니까?”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건 전쟁이니까. 도착했을 때 오히려 세가 는다면 그 또한 공 아니겠나?”
로튼해머는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여명군을 끌어들인다’는 말의 의미는 시에로 여명군 같은 오합지졸 무리나 강제 징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여명군에 참전을 결정하지 않은 성기사단들, 눈치를 보는 제국 기사들을 끌어들이겠다는 말이었다.
교단의 광기에 휩쓸리기 전에 그들을 구제하는 것도 분명 중요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웃으며 로튼해머의 의도를 받아 주었다. 어떤 의미로는 로튼해머가 선택한 길이 가장 어려운 길이었다.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안젤라는 이사크레아 군과 함께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게벨이 안젤라를 돌봐 주기로 했다.
넬에 실어서 냅다 데려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아이작 본인을 노리는 적도 있을 것이기에 안전한 선택이 아니었다.
로튼해머까지 떠나 보낸 뒤, 아이작은 헤사벨과 함께 영지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없는 동안 이사크레아 영지 전력은 크게 약화된다.
때문에 만약을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
이사크레아 수도원 지하,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
아이작은 두근거리는 심장 앞에서 의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새로운 사람 두 명이 더 서 있었다.
수도에서 온 젊은 사제, 클레르와 야매 사교도에서 진짜 사교도로 거듭난 네리아였다.
둘 다 이제는 이름 없는 혼돈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된 자들이었다.
아이작은 이들을 비롯한 ‘이사크레아 새벽기도회’ 신도들을 여명군에 끌어들일까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온갖 신앙이 부딪치는 여명군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아이작은 ‘쓸모’를 인정받아 신들로부터 관대한 처분을 받아 위기를 몇 번이나 모면했지만, 다른 신도들까지 그러란 법은 없었다. 아이작 자신의 몸을 챙기기에도 부족했다. 때문에 전장보다는 이 근거지를 지키는 전력으로 사용하는 쪽이 더 좋았다.
두 사람은 핏빛 혈관과 살점으로 가득한 지하실의 풍경을 보고 벌써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작 님, 이건 뭡니까?”
클레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성역의 풍경을 보면서 물었다. 반면 네리아는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했다. 긴 시간 이름 없는 혼돈을 연구하고 파문까지 당한 그녀에게 이 흔적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 실물은 처음 보는군요.”
“혼돈의 성역? 그런 것이 수도원 지하에 있었단 말입니까?!”
아이작은 클레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네리아는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설득할 대상은 한때 부정한 할머니 밑에서 ‘파수자 회의’ 사제 후보로 자랐지만, 이제는 이름 없는 혼돈의 사제가 되어버린 클레르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부서졌다가 다시 태어난 그가, 새로운 진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할 때였다.
“그래. 이곳은 내가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친 성역이다.”
아이작은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러면서 품속에서 ‘기어오는 공포’ 가면을 꺼냈다. 그걸 본 순간 네리아는 반사적으로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를 올렸다.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눈치채고 있었나 보군?”
“확신하진 못했으나,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같은 가르침을 배웠거나,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클레르는 ‘교주’라는 호칭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빛의 법전 교주는 교황이라 할 수 있으므로, 아이작에게 붙은 교주라는 호칭은 엉뚱한 사람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반역적인 발언이었다.
아이작은 클레르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을 주었다. 클레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님은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입니까?”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래.”
아이작은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고, 내 행동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계속 같은 일을 할 것이고, 너희들도 그러면 된다. 너희들에게 성역을 보여 준 이유는, 내가 이 자리를 비웠을 때 너희가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칸의 군대마저 물리친 성배기사의 땅을 위협한단 말입니까?”
네리아가 이해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당장은 없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아이작은 좀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다.
여명군의 결과가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그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빛의 법전보다 먼저 성지 루아를 점령할 수 있겠지만, 예상치 못한 실수나 방해로 인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다른 누군가가 승리할 것이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이사크레아 영지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너희에게 성물 몇 가지와 나의 권속들, 그리고 기적을 남겨 두고 가겠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버틸 정도는 될 거야. 하지만 그때가 된다면 더 이상 내 정체를 숨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영지를, 주민들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가 우려하는 순간이 온다면 주민들만이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 에델레드나 투할린, 이솔데 같은 사람들도 이곳에 몸을 의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이상 눈치를 보거나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어진다.
“그때가 오면 사람들은 너흴 두려워하고, 모욕하고, 침을 뱉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들을 지킬 수 있다면.”
“아…….”
“그 순간에도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지금과 똑같다. 기적을 보여 주어라. 너희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형태를 갖게 되었든, 서로가 서로에게 기적이 되는 것을 보여 줘라. 그게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전부다.”
클레르는 아이작이 말하는 ‘우리’의 범위가 단지 이름 없는 혼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폭넓은 범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그 범위에는 딱히 아이작을 응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단지 아쉬울 때 기댈 수 있는 이웃이면 충분하다.
클레르와 네리아는 아이작이 이 비밀을 평생 숨겨 왔던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이작이 지금 담담하게 한 이야기는 평생 동안 그가 지켜온 규칙들이었던 것이다.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이작을 두려워하고, 모욕하고, 침 뱉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하지만 아이작은 그 비밀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들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사람들이 공격당할 때 의지할 장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교주님.”
성배기사가 보여준 이 끔찍한 성역의 풍경은 사실 아이작의 약점이자 신성한 면모이기도 했다.
클레르는 그가 보여준 신뢰에 보답할 길을 찾기 위해 무릎을 꿇어 경배했다.
“당신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
영지의 방위마저 네리아와 클레르에게 맡긴 뒤, 아이작은 비로소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이사크레아 영지에는 게벨에게 속성 과외를 받은 경비대장 자클렛과 병사들, 그리고 울스텐도 있었다.
표면상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이작이 부려먹는 권속들도 계속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 다만 아이작이 급할 때는 언제든지 소환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언제 누가 얼마나 자리를 비울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네리아와 클레르에게 가르친 ‘최후의 수단’은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안심시켜 주었다.
“아까 그 친구들, 아이작을 님을 위해서 심장이라도 꺼낼 기색이더군요.”
헤사벨은 지하에서 본 클레르와 네리아를 떠올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불경한 의식이 생각나 얼굴을 찡그렸다.
“징그러운 말 하지 마라.”
“예? 심장을 꺼내는 건 붉은 성배의 의식 중에 가장 경건한 의식인데요.”
아이작은 뭐라 하려다가 무희가 엘릴의 심장을 꺼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신들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은, 그것도 신이 탄생하던 순간을 따라 하는 것은 극상의 찬양이자 경배였다.
헤사벨은 나름대로 네리아와 클레르가 굉장한 신앙심을 보였다고 찬사한 것이었다.
“역시 아이작 님의 착한 내면을 알아본 것이겠죠?”
“네필림의 매력이 작동한 결과겠지.”
아이작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그는 실제로 네리아와 클레르가 영지에 남아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하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헤사벨은 미약하게 미소 지었다.
붉은 성배의 신도였던 시절, 수많은 신도와 기사들을 유혹하고 파탄에 빠뜨린 경력이 있었다. 배교시키고, 배신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때문에 상대를 보면 얼마나 유혹하기 어려울지 금방 감이 왔다.
클레르와 네리아는 절대 유혹당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심장을 꺼내 가더라도.
그때 헤사벨의 말이 신경 쓰인 듯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야. 착한 사람이었다면 자기만족이나 하자고 안젤라를 이렇게 납치하듯 데려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 덕분에 황금 우상 상단이 적이 되고, 방해나 받게 생겼어. 흑제국도 골칫덩어리인데.”
“어린 여자애를 구하는 것만큼 선한 행동이 있나요?”
“그냥 그런 계시가 내려와 따른 것뿐이야.”
아이작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름 없는 혼돈에게 판단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다.
“안젤라는 그냥 미다스의 손을 찾기 위한 도구다. 그뿐이야. 용건을 마치면 다시 셀몬 일족의 친척을 찾아 돌려보낼 거다.”
“그렇군요.”
헤사벨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이작은 그녀가 왜 웃는 건지 몰라서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왜 짜증이 나는지도 이해하지 못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이작은 알지 못했지만, 헤사벨은 아이작을 한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보았다.
‘결국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안젤라를 구출하고, 그 애한테 얽힌 기적을 해제해 주겠다는 뜻 아닌가? 미다스의 손을 찾아내는 것도 굳이 할 필요 없는데, 황금 우상 상단이 안젤라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고 미리 찾아내려는 거고.’
헤사벨 기준에선 충분히 선행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붉은 성배 클럽에서 선행의 기준은 기준선이 턱없이 낮긴 하지만, 이 시대 평균으로도 아이작은 성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로 성자 중의 성자였다.
‘자신에게 끌리는 사람들은 오로지 네필림의 매력 때문에 그런 거고, 자신이 베푸는 선행은 모두 계시나 이득을 보기 위한 계산에 불과하다는 거지? 그래서 예상치 못하게 찬사받거나 사랑받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거고.’
이렇게 자존감 낮은 영웅이 있을까? 얼마나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이 다 기적에 의한 끌림이나 기만, 위선도 구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람들을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모욕을 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헤사벨은 아이작을 지켜보는 것이 더없이 즐거웠다.
‘역시 사상 최고의 기만자는 다르구나.’
그녀는 웃음이 새어나오지 않게 억누르면서 생각을 이어갔다.
‘세상과 신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속일 정도의 능력이라니. 역시 나의 주인은 어중간한 위선자와 기만자들과는 격이 다르시다.’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