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황금을 쫓는 눈동자 (2)
“시에로 여명군의 전공이 영 시원찮더군요.”
“…….”
교황, 호르마 크무엘은 언짢은 표정으로 로헨 오터 추기경을 노려보았다.
그 옆에는 새롭게 임명된 아밀라 엔데 추기경이 한 패임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 바싹 붙어 있었다.
후안은 벌써 수 주째 병가를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빛의 법전 교단은 모두 파수자 회의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므로 네 편 내 편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교황조차도 그 부속품에 불과할 정도니까.
다만 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존중했다면, 지금은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시에로 사제의 기세가 좋아서 ‘거짓 선지자’의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만 이래서야 작명고지조차도 부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붕괴하기 전에 차라리 여명군 본대에 편입시키는 게 낫겠군요.”
“……시에로를 이용하자고 한 건 네놈 제안이잖나.”
교황은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내뱉었다. 그 말에 로헨은 빙긋 웃었다.
“저는 빛의 법전을 위해 무엇이든 이용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조카까지도 사지로 내몰았나?”
로헨 오터의 조카가 올칸 규율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파다했다. 그리고 소문은 ‘이런 고위직도 기꺼이 친인척을 여명군에 내놓는다’는 귀감이 되었다.
“제 조카 걱정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파수자 회의에 발을 들이려면 이 정도 시련은 이겨내야 하니까요. 시에로에게도 그 정도 시련은 극복할 재주가 있다고 믿었지요.”
시에로에게는 남다른 선동과 날조의 능력이 있었다. 불가사의한 매력으로 대중을 휘어잡은 사제는 교단에게 필요했던 광기를 부추기는데 딱 적당한 인재였다.
하지만 선동 능력과 전술 능력은 별개였다.
여명군이 시작되자마자 그 사실이 드러났고, 시에로의 인기는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되기 전에 적당히 ‘갈아 치우려’ 했습니다.”
로헨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시에로, 그자도 만만찮은 작자더군요. 얼마나 이리저리 잘 피해 다니던지. 그 덕분에 시에로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려던 자가 먼저 움직여 버렸습니다.”
로헨은 성좌의 테이블 위에 놓인 말 하나를 움직였다. 보라색 배경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말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남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교황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성배기사? 여명군을 그자에게 이끌게 시킬 생각이었나?”
“수십만 명의 어중이떠중이들을 이끄는 일은 보통의 매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배기사에게는 그게 가능한 재능이 있지요. 그리고 좀…… 인명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더군요. 곁에서 수만 명이 죽어 나가면 좀 나아질 것 같았습니다.”
아이작의 도덕 수준은 현대 기준으로 잘 쳐봐야 보통 수준이다.
즉, 좀 마모되긴 했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는 성자 중의 성자로 모자람이 없다.
성기사에게 그 정도 수준의 도덕은 필요 없다, 라는 것에는 교황과 추기경들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교황은 수십만 명에 이르는 시에로 여명군을 아이작에게 넘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자는 소문이 좋지 않던데. 올빼미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았나?”
“교황 성하께서도 배운 적 있지 않으십니까?”
“철없는 젊었을 때의 일이지. 그리고 그때는 힘도 권력도 없었고. 하지만 성배기사 정도의 힘과 권력, 명성까지 있는 자가 군대까지 거느린 채로 그 가르침에 따르면 교단이 위험하지 않겠나?”
그 말에 로헨은 웃었다.
“천사께서 그걸 허락하실 리가 없겠지요.”
모든 논리를 반박해 버리는 만능의 문구에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성배기사를 여명군으로 묶어 버리면 재밌는 효과도 있습니다. 저 북쪽의 브란트 공작가도 함께 묶을 수 있는 것이지요.”
로헨은 이미 발트제메르가 브란트 공작가로 넘어갔다고 반쯤 추측하고 있었다. 브란트 공작가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꽁꽁 숨길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브란트 공작가가 납작 엎드리고 있지만 언제 또 발톱을 드러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상황에 아이작이 수십만 여명군 한복판에 있다면?
여명군을 이끄는 사령관이더라도, 천사가 나타나서 ‘너 파문’ 한마디만 하면 황제에게 일어났던 일이 고스란히 아이작에게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인명을 중시하는 성배기사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할 것이다. 브란트 가문은 사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프리야 브란트 공작부인. 이 엘릴 왕국 출신의 여걸 때문에 기껏 찢어 놓으려 했던 북부 연합이 다시 묶여 버렸지요. 그렇다면 계속 거기서 족장 노릇이나 하게 강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성배기사는 이미 독자적인 여명군을 꾸렸으니 이제 어려워진 건가?”
이사크레아 군의 파격적인 행군은 이미 제국 전역에 파다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엘릴 왕국과 세상의 화로가 빛의 법전 깃발 아래 뭉쳐 진군하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1차 여명군 때의 전설과 영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에로 여명군이 보여 준 졸렬한 싸움 및 행패와 비교된 탓도 있을 것이다.
엘릴의 기사들은 파죽지세로 올칸 규율의 오크들을 찢어발겼고, 고립되어 도움도 청하지 못하던 산속의 마을과 도시들이 드워프들의 손에 해방되었다. 그 뒤로 새로운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임을 선포한 군대가 사람들을 위험 속에서 구조하거나 지원하면서 병력을 불려 갔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성배기사 스스로가 독자적인 세력을 갖췄으니 말입니다.”
현재 여명군의 세력은 총 셋으로 나뉜다.
첫째로 가장 먼저 출발하고, 수도 많은 시에로 여명군. 하지만 여기에는 성기사나 사제의 비중이 작아 전력이 약하다.
두 번째는 교황이 주도하는 여명군 본대. 여기에는 빛의 법전이 쏟아부을 수 있는 전력이 담길 예정이다. 교황은 이 전력만으로도 올칸 규율의 본대를 산산조각 낼 자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롭게 추가된 세 번째 전력, 이사크레아 여명군. 가장 수가 적고 다국적, 다신앙 연합이라는 불안정성까지 갖춘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종교적 광기에서 불안을 느낀 귀족들이 대안으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황제 파문 이후 황제가 거느리던 적지 않은 세력이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그늘 아래 들어갔지.’
하지만 이걸로 아이작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는 표면적으로 어쨌든 교단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으니까.
황제와 교황의 내분만으로도 제국은 큰 상처를 입었다. 여기서 교단 내부에서 또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말씀드렸다시피 시에로 여명군은 본대로 편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로헨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진군 경로를 보며 생각에 빠졌다.
“성배기사를 어떻게 분리할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열려 있는 창문에서 북풍이 스며들어 와 장기 말들을 흔들었다. 축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그들은 겨울바람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만은 영문 모를 스산함을 느꼈다.
***
직장에서 만나기 불편한 사람 1위는?
성질 나쁜 상사? 일도 못 하면서 대드는 하급자?
아니다. 적어도 후보에는 올릴 수 있겠지만 이솔데에게는 색다른 정답이 있었다.
답은 ‘전에는 제국을 호령하던 황제였으나 천사에게 파문당하고 아버지를 사지로 몰아넣은 주제에 식객으로 기어들어 온 전 황제’다.
“다 처리했습니다. 아가씨.”
발트제메르, 아니, 이제는 제메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 황제, 브란트 가의 식솔이 된 남자가 이솔데 앞에서 고개 숙이며 말했다.
이솔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어요. 제메르 경.”
제메르는 수염도 깎고 머리도 짧게 다듬어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발광체였던 뿔이 사라진 탓에 얼굴의 음영도 완전히 달라져서 이솔데도 처음 봤을 때는 못 알아봤을 정도였다.
물론 그럼에도 주의해야 했기에 외부 활동을 나갈 때에는 데라 헤만이라는 훌륭한 예를 따라 꼬박꼬박 투구를 쓰고 있었다.
충성심 따위는 발트제메르가 어떻게 권력을 잃었는지 들은 순간 바닥을 쳤다.
고스란히 천사에게 권력을 헌납하고 도박을 걸었다가 쫄딱 망했다고.
중요한 사실 몇 가지가 빠지긴 했지만, 핵심은 그게 전부였다. 남은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도망자일 뿐이었다.
“전보다 검댕의 수가 는 것 같군요.”
루주베르크 앞마당에는 제메르와 기사들이 사냥해 온 시커먼 괴수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인간과 짐승 사이의 어설픈 형태를 가진 이 괴수들은 ‘검댕’이라 불리는 현상에 의해 변질한 짐승들이었다. 원래 드문 일이었으나 최근 부쩍 늘어나 민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솔데는 이 현상이 부쩍 신경 쓰였다.
이단심문관답게 그녀는 검댕의 정체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검댕은 빛의 법전 우르반수스에 등장하는 저급한 신수 중 하나다. 말이 신수지, 빛의 법전의 강렬한 빛을 견디지 못한 악령들이 다른 인격을 포기하고 영혼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였다.
악령답게 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빛의 법전 기적 앞에 꼼짝도 못 한다. 때문에 소모성으로 막 부려 먹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민폐일 뿐이었다.
보통은 우르반수스에 서식하고, 지상에는 리히트하임 같은 곳이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제국 전체적으로 검댕의 수가 늘고 있다는 기색이 확연히 보였다. 리히트하임으로부터 거리도 먼 루주베르크임에도 불구하고.
“검댕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신수를 봤다는 목격담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명군으로 인한 종교적 광기 때문인지, 아니면 신열을 앓는 사람들의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란 말처럼 들리는데요.”
“등대지기의 등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길 바라야지요.”
제메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등대지기의 출현이 그의 탓인데도.
하지만 이솔데는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이미 가문 전체가 그 계획에 가담한 바 있으므로 그를 탓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이런 일들이, 정말 일시적인 현상이길 바랍니다.”
단지 검댕의 출현만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 이 구도. 모든 것이 일시적이길 바랐다. 종교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꿈꿨던 황제와 아버지는 몰락한 지금, 브란트 가문은 그저 납작 엎드려서 광기의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교단의 창끝이 오로지 성지 루아를 향해 있지 않았다면 브란트 가문도 멀쩡하지 못했다.
죄책감과 복수심만 없었더라면 프리야도 발트제메르를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검댕의 출현은 우르반수스의 빛이 강해지면서 드리워지는 그림자 같은 것이니, 여명군이 진행되는 동안은 더 심각해질지도 모르지요. 여명군이 아예 성공해 버린다면 아예 눌러앉을 수도 있고.”
제메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말에 이솔데는 짜증을 느꼈다.
‘그걸 내가 모를 것 같나? 내가 이단심문관 출신이란 걸 까먹었나?’
하지만 투구 너머 제메르의 눈빛을 본 이솔데는 그가 해맑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 여명군의 흐름을 끊던가, 저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솔데는 최근 제국 동부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진격과 ‘성지를 정복할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 얼굴이 생각났다.
이사크레아 영지 앞에서 헤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래 보지 못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는 실시간으로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이 단단한 요새 안쪽에 바싹 엎드려 숨어 있을 뿐이다.
이솔데는 그 사실에 자괴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솔데 아가씨.”
그때 정문을 지키던 경비대원 중 한 명이 이솔데에게 다가왔다.
“사제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사제? 또? 이놈들이 이번에는 또 무슨 행패를 부리려고…….”
이솔데는 또 한 번 짜증을 내려 했지만, 경비병의 이어진 말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방문했습니다. 클레르라는 이름의 사제입니다.”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무슨 용건이라고 했지?”
이솔데의 질문에 경비대원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사실 비슷한 말을 하는 놈이 있었다면 진작에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성배기사이자 이솔데의 부군 되는 사람이 다스리는 영지에서 방문한 사제다.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저 좋은 말씀 전하러 왔다고…….”
이솔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바람이 밀려가는 동남쪽으로 향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흔들었다.
***
아이작은 눈을 떴다.
문득 불어온 바람이 그가 깜빡 잠든 사이 머리 위에 쌓인 눈을 떨어뜨렸다. 아이작이 머리를 툭툭 털어내고 일어서자 경호를 서고 있던 헤사벨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사방은 여전히 오크 시체들로 즐비했다. 잠들기 전보다 약간 는 것 같기도 했다.
헤사벨은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벌써 깨셨어요? 오랜만에 주무셨는데.”
아이작은 지난 며칠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이런 숲속에 숨어서나마 잠든 것도 드물게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어쩐지 후련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이솔데가 온 줄 알아서.”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