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04)
304화. 황금을 쫓는 눈동자 (5)
“그게 무슨…… 상단주 자리가 당신 마음대로 될 것 같습니까?”
“받아들이고 말고는 네 마음이야. 하지만 내가 벨만 베시아의 면전까지 가서 레오노라의 위상을 떨어뜨리면 그다음 상단주는 누가 될 것 같나? 당연히 내 발언권도 생기겠지.”
아이작의 말은 ‘다음 빛의 법전 교단 교황 자리를 누구에게 줄지 네게 선택권을 주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터무니없지만, 터무니없어 보이는 딜을 걸어야 상대의 굳은 심지를 흔들 수 있다.
그리고 돈 없고 가난한 성배기사인 아이작이 샬록을 매수하려면 이 정도 미끼는 흔들어야 했다.
‘샬록을 죽여버리면 용병들의 원한은 물론이고 황금 우상 상단도 불만을 품겠지. 레오노라가 더 극단적인 수를 꺼내 들 수도 있고…… 샬록 정도는 매수하는 게 딱 좋아.’
레오노라에게 성공할 듯 말 듯 속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만, 그건 샬록이 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샬록은 ‘차기 상단주 지명권’을 얼마에 팔아넘길 수 있을지 이미 계산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얼추 평생 안 팔리는 극이나 쓰면서 살아도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은 액수가 나오자 샬록은 어렵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과 맺은 부당한 계약은 더 큰 선의와 명예를 갖춘 성기사 앞에서 깨졌도다. 뭐, 하던 대로 해도 되는 정도라면…….”
용병으로서의 신용? 그딴 건 애초부터 샬록에게 없었다.
게다가 예상하는 금액을 받아낸다면 평생 하기 싫은 용병 일 따위는 안 해도 된다. 극단원들에게 나눠주면 그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위험부담을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아예 아이작 편을 들라는 요구였다면 샬록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선 넘지 않으면서 하던 대로만 해도 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황금 우상 앞에 맹세해도 되겠지요?”
계약을 어기면 자다가도 코가 깨지고 물 마시다가도 사레가 들려 익사할 것이라는 경고다.
아이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맹세해도 좋아. 내가 오드리프까지 도착한 다음 계약이 성사된다는 것만 잊지 말라고.”
아이작이 오드리프까지 들르지 않고 내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황금 우상 상단은 계속 아이작을 방해할 뿐이다. 원정군이 보급을 책임지는 상인의 비위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것은 적군밖에 없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럴싸한 연극 한판 벌여 봅시다.”
“그러면 계약은 체결된 걸로 하고…… 이제 한 가지만 더 해결하면 되겠군.”
“한 가지요?”
샬록이 의아하게 돌아보자, 촌장의 집 앞마당에 우치우라 백호장이 으르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도 우락부락한 덩치와 백호장 특유의 위압감은 여전했다.
샬록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 친구와의 갈등은 자네 손으로 풀어야지.”
“아니, 무슨…….”
샬록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우치우라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샬록의 등을 툭 떠밀어 앞으로 내보냈다.
샬록도, 우치우라도 맨손이었지만 오크에게는 맨손으로도 성인 남성을 패 죽일 수 있는 완력이 있었다. 그 오크가 백호장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이작이 떠민 순간 샬록은 발을 헛디딘 것처럼 마당을 데굴데굴 굴렀다. 우치우라의 손이 허공을 스쳤다. 샬록은 미끄러지듯 등으로 그의 다리를 툭 밀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우치우라가 넘어지자마자 샬록은 번개같이 일어나 단숨에 상대의 목덜미에 손을 꽂아 넣었다.
맨손이었던 그의 손에는 큼직한 단검이 들려있었다. 우치우라는 목 뒤쪽으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마침내 육신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엑, 분명 무기를 압수했었는데……?”
그를 끌고 오기 전에 분명 무기들을 압수했던 헤사벨은 놀란 얼굴을 했다. 암살자인 그녀에게서 무기를 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충 예상했던 아이작은 놀라지 않았다. 무기도 저것 말고 서너 가지쯤 더 있을 것이다.
샬록은 피곤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리곤 헤사벨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남자는 늘 단단한 무기 한 자루를 숨기고 다니지요.”
“흐음, 참고할 만하군요.”
“헤사벨, 저거 성희롱 발언이다. 비슷한 말을 하면 잘라 버리도록.”
어디를 자르라는 말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대사 센스가 저러니까 극이 안 팔리지…… 라는 속마음을 숨겼다.
샬록은 뜨끔한 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참, 이제 한 패가 됐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오드리프로 가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이지?”
“리히트하임이 여명군을 공식 선포하고 동진을 시작했습니다. 교황의 어가(御駕)와 주교, 사제들의 행렬이 장관이라더군요. 벌써 흑제국과 충돌도 생기고 있다고 하고. 이러다 공 다 뺏기는 거 아닙니까?”
“흠, 서둘러야겠군.”
오드리프는 원래부터 아이작이 지나쳐 갈 경유지다.
리히트하임이 움직인다고 해서 계획과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여명군 본대가 가진 힘과 보급력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훨씬 초월한다. 아이작은 그들만큼 꾸준한 진군 속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아, 그런데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듣자 하니 성배기사님께서 산속에 계신 동안 이 근방에서 시에로가 이끌던 여명군이 무리한 작전을 짜다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더군요.”
“뭐?”
”시에로 사제와 성배기사를 비교하던 사람들이 많던데, 상대가 먼저 자빠져 줬으니 좋은 일이지요?”
“……진짜로 서둘러야겠군.”
아이작은 경쟁자(?)의 자발적인 파멸에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등골에 식은땀이 솟았다.
시에로 여명군이 상대하는 적들은 언데드다. 아군의 무능은 단지 전술의 실패로 끝나는 게 아니다. 즉시 적들의 전력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아이작이 상대해야 할 언데드가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
협상이 마무리된 후.
샬록은 마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양손 손가락이 무사하다는 뜻의 수신호를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무것도 없던 숲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 명도 같은 복장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용병은커녕 신분조차 의심스러운 무리였으나, 다들 맨손으로 성인 남성의 목 정도는 꺾을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단장님, 그 수신호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니까 왜 자꾸 보내세요?”
“무대 위에 서려면 수신호 정도는 암기해야지! 아직도 외우질 못했나?”
“그 수신호 단장님도 못 외워서 맨날 새로 만드는데 뭐하러 외운단 말입니까? 그보다 그 소문의 성배기사는 어땠어요? 전에 멀리서 처음 보자마자 ‘저거 못 이긴다. 일단 도망가자.’라고 말씀하셔 놓고 이번에는 직접 간다길래 자포자기한 줄 알았다니까요.”
“계속 도망만 다니길래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지.”
“살아 돌아온 걸 보니 잘못 본 게 맞았나 보죠?”
샬록은 잠시 먼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아니, 제대로 본 게 맞아.”
샬록의 ‘값을 매기는 재능’은 아이작이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정교하게 돌아간다.
그는 단순히 현상금뿐만이 아니라 노예로 팔았을 때의 가격, 혹은 장기만 따로 떼서 팔았을 때, 인질로 잡아서 몸값을 받아낼 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값을 매긴다.
그리고 이 재능은 가까이서, 자세히 볼수록 더 정교해진다. 마음만 먹는다면 손가락 한 개당 값을 매길 수도 있을 정도다.
아이작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샬록은 그의 가격을 좀 더 자세히 매길 수 있었다.
결과는 측정 불가.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살 수 있는 사람, 사고 싶은 사람이 없다.
이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정말 아무 가치도 없는 쓰레기 인생인 경우. 하지만 제국의 유명 인사인 성배기사가 그럴 리는 없다.
두 번째는 정말 터무니없는, 어마어마한 신적 존재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경우.
이 경우 지상의 존재가 뒷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므로 값을 매길 수 없다. 샬록이 이렇게 측정 불가를 매긴 존재는 데라 헤만이나 먼발치에서 본 불사황제 베셰크 정도가 전부였다.
레오노라가 매긴 현상금?
샬록이 생각하기에는 레오노라도 정말 아이작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지 아이작을 괴롭히기 위한 미끼로 자신을 써먹었을 뿐이지.
‘이 아가씨가…… 내가 호구인 줄 아나?’
샬록에게 값을 매기는 재능이 없었다면 별생각 없이 낚여서 아이작을 괴롭히던 불한당 1쯤으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납작 엎드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샬록에게도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자신의 재능을 한눈에 꿰뚫어 본 걸 보고 생각을 싹 접었다. 아이작이라면 그의 비장의 수단조차도 단숨에 파훼하고 머리를 똑 떼어낼 것 같았다.
“그럼 어쩌죠?”
극단원들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들 역시 칸의 군대를 물리친 용사, 엘릴의 대전사, 빛의 법전의 선택을 받은 부활의 성자를 잡으러 간다고 했을 때 샬록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었다. 그리고 그 위명들이 허명이 아님을 알게 된 지금, 그들은 적자를 우려하고 있었다.
목숨보다 귀한 재산은 없으므로.
샬록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10만 닢 정도로는 수지타산이 안 맞지.”
“그럼……?”
“레오노라 아가씨한테 추가 요금을 달라고 해야겠다.”
샬록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이작은 선만 지키면 분명 하던 대로 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레오노라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돈도 받고, 마지막에는 아이작의 대가까지 결산하면 된다.
양쪽 모두에게 돈을 뜯을 수 있는 장사라니, 이보다 멋질 수가 없다.
“지난번에 엘릴에서 칼솜씨 좋은 소드마스터 한 명 넘어왔다고 했지? 그놈 꼬시는 데 돈이 좀 필요하다고 말해야겠다.”
***
아이작은 오드리프로 향하던 방향에서 약간 틀어, 동쪽으로 향했다.
약간 돌아서 가지만 경유해서 가기에는 나쁠 것 없는 거리였다. 특히 엘릴 군이 이맘때쯤 도착하겠다 싶은 곳이었기에 한 번쯤 들를 필요가 있었다.
무수히 이어지던 눈 쌓인 산맥을 지나, 갑자기 시커먼 황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날고 있음에도 타는 냄새가 훅 밀려왔다. 곡식, 나무, 그리고 시체가 타는 냄새.
아이작은 넬을 시켜 고도를 낮췄다.
찬바람이 귓가를 날카롭게 스쳤다. 겔리퍼드 산맥이 남부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고 있어서 이 땅의 공기는 건조했다. 눈도 내리지 않은 덕분에 참상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넬이 거센 먼지를 일으키며 땅 가까이 내려섰다. 아이작은 주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온 사방이 전쟁터였다. 이곳에서 어마어마한 전투가 일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시체는 일정한 간격으로 띄엄띄엄 놓여 있을 뿐,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이작이 내려서기 무섭게 예상대로 주변의 시체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좀비들이었다.
좀비들은 일어나자마자 달려드는 대신 비명 섞인 고함을 내질러댔다.
한두 명에서 시작된 고함은 이내 수십, 수백 명의 고함으로 바뀌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이작은 짜증을 느끼며 주변의 좀비 하나의 목을 쳤다.
‘사이렌 좀비.’
불사 교단에서 포획한 시체를 지뢰 비슷한 용도로 깔아놓는 좀비들이었다. 역할도 비슷하다. 주변에 산 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즉시 일어나 주변에 알리고 공격하는 것. 그것이 이 황야 주변에 수백 구 가까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주변에 산 사람이 있다는 건데.’
경보장치가 있다는 것은 침입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오오오오오!”
좀비들은 고함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좀비들을 향해 루앗딘 열쇠를 꺼냈다. 언데드를 상대하기에는 카훌린보다 루앗딘 열쇠가 더 효과적이다.
명멸하는 불꽃의 검기가 좀비들을 수수깡처럼 베어냈다.
루앗딘 열쇠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아이작의 검기의 영향을 받아 살아 있는 생명처럼 좀비를 물어뜯고, 불태우면서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때 좀비 무리 너머 어딘가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황야 한가운데 외딴 창고 하나가 좀비 무리에 공격당하고 있었다. 사이렌 좀비를 피해 숨어있다가 아이작이 놈들을 깨우는 바람에 덩달아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폐가의 모습에 아이작은 넬에게 손짓했다.
“쿠루루루루!”
넬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단숨에 벼락의 브레스를 토해 냈다. 단숨에 절반으로 쪼개진 좀비 무리는 벼락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픽픽 쓰러졌다. 아이작은 이 새롭게 생겨난 길을 따라 빠르게 달려갔다.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또 한 번 비명이 들려왔다. 안에는 거적때기만 걸친 패잔병 몰골의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발작적으로 뻗은 삼지창이 아이작을 찔렀지만, 갑옷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서, 성기사?”
누군가 간신히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아이작이 그들에게 ‘여기서 좀비들을 다 죽일 때까지 버틸 수는 없으니 빠져나가자’라고 제안하려 한 순간, 그들 가장 뒤쪽에 숨어있는 한 사제복장의 남자를 발견했다.
아이작은 단숨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시에로?”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