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08)
308화. 시에로 여명군 (4)
데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작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그 명령을 수행하다가 정작 시에로 여명군이 붕괴할 수도 있다. 그가 어렵게 뭐라 반박하려던 순간, 시에로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예? 시에로 님,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아무것도 안 하면 주민들 손에 도적 떼로 죽는 거고, 성배기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최소한 성배기사가 인도한 여명군의 선봉으로서 죽는 거다.”
데반의 표정은 떨떠름할 뿐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다고 저희가 저지른 죄가 씻겨지겠습니까?”
“누가 죄를 씻겠다고 이 염병을 떨겠냐?”
시에로는 기가 차다는 듯 데반을 향해 쏘아붙였다.
“다 같이 살아남자고 하는 거 아냐! 네놈들이 살아야 나도 산다고!”
시에로의 일갈에 데반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아이작은 놓치지 않았다.
데반은 결국 아이작과 시에로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놈들을 일단 전부 잡아들이겠습니다.”
데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놈들’은 지금 크란 요새를 지키고 있는 자들이니까. 자기편을 잡아들이는 꼴을 보면 사기가 또 한 번 바닥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럼 반란은 주민보다 여명군 쪽에서 먼저 일어날지도 모르고.
시에로 역시 그걸 아는 듯 힘없이 일어났다.
“아니, 자네가 말하면 문제가 생길 거야. 누군지만 알려주게. 내가 설득하겠네.”
데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들 시에로를 보고 따라온 사람들이다. 언데드 군세 한가운데 고립된 시에로를 구하기 위해 뛰쳐나온 자들인 만큼, 반발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시에로가 나서는 게 맞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시에로의 옆을 따라나섰다.
아이작은 시에로에게 속삭였다.
“잘하는군.”
“……진짜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병사들이 싸우는 와중에 뒤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느낄지도 몰라. 데반도 그걸 걱정하는 걸 테고.”
“정예군일수록 군기가 엄정하다. ‘군’을 자칭하려면 군법이 지엄하다는 것도 알아야지. 그리고 네 생각보다 그렇게 큰 반발은 없을 거다. 사람은 죄책감이라는 게 있어서 규율이 바로잡히면 벌을 받아도 안심하게 되거든.”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깊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만 네필림의 마력이 아무 때나 통하는 만능은 아냐. ‘설득’하려면 그 전에 ‘빌미’가 있어야지. 개연성 없이 다짜고짜 결과를 때려 박으면 반발이 튀어나온다고.”
아이작은 그 얘기가 어쩐지 우르반수스 조작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확실히 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전투가 한참인 와중에 빌미도 없이 병사를 처벌하면 다른 병사들은 ‘전우가 부당한 취급을 당한다’고 느낀다.
“빌미는 만들면 그만이야.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놈이 사고를 한 번만 쳤을 리가 있나.”
그러면서 아이작은 손바닥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가 노리는 건 자잘한 도둑놈 따위가 아니거든.”
***
사방이 좀비 떼에 둘러싸인 고립된 요새 안에서 약탈한 재물이나 범죄자가 숨을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다.
데반이 약탈범들을 지목하고, 시에로가 설득하거나 협박하면서 숨겨두었던 자산을 털어놓게 만들었다. 당연히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다 죽게 생긴 와중에 재물이 무슨 소용이냐는 시에로의 일갈에 결국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가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좀비들 외에는 딱히 공성 병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재물을 돌려주는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도 좀비 투하가 해가 뜨자 뜸해졌기에 좀 더 여유롭게 진행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보상이 어려운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가해자에게 확실한 엄벌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다음.”
성문 앞 광장 앞은 여명군이 약탈한 재물을 돌려주고, 저지른 범죄를 단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주민들로 가득했다. 호명된 병사는 묶인 채 데반의 손에 질질 끌려 나왔다. 끌려 나온 남자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헨드릭. 민간인 살해, 강간, 방화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는 여명군 전체의 명예에 크나큰 해악을 끼치고, 보호해야 할 빛의 법전 형제들을 향해 저지른 범죄인 바, 율법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아이작은 귀족이며 동시에 성기사다. 제국법으로도, 계율로도 처벌이 가능하다.
특히 지금 이곳에 ‘진짜’ 사제나 성기사가 없는 이상, 아이작의 권위에 항의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유일하게 이견을 드러낼 수 있는 시에로조차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법전께서는 어둠 속에 길 잃은 이 가엾은 자를 부디 빛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시에로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상황을 깨달은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시에로는 필사적으로 그를 외면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만 보고 따라온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셈이니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로가 계속 자신을 외면하자 남자는 다른 병사들에게도 소리쳤다.
“네놈들, 네놈들도 마찬가지잖아! 이 중에 그깟 죄 안 저지른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다들 한몫 잡자는 생각으로 온 거잖…… 억!”
데반이 질질 끌고 가던 남자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한 번, 두 번, 얼굴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자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작은 데반이 남자를 죽이기 전에 제지했다. 처형은 감정을 배제하고 진행해야 한다. 남자는 아이작을 보고 입을 열어 뭐라고 웅얼거렸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귀 기울이지 않고 칼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선 시에로에게 속삭였다.
“시에로, 똑바로 봐라.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똑바로 봐야 해.”
“……굳이 이래야 하나? 하다못해 싸우다 죽게 해 주면…….”
“적들의 숫자 하나를 더 늘리라고? 군법으로 처형당하는 사람과, 전쟁터에서 영광스럽게 죽는 사람은 확실하게 구분해 줘야 한다. 처형 부대니 죄수 부대니 하는 것들은 쓰레기야. 그런 제도는 숭고한 의무를 형벌처럼 여기게 만들어버려.”
아이작은 전쟁 예찬론자도, 군인 숭배자도 아니다.
아이작의 말은 통치 철학에 가까웠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은 대접받아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죗값으로 병사가 되면, 그 곁에 있는 병사들도 자신들이 빽과 힘이 없어 병사가 되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건 군 사기 면에서도 좋지 않다.
시에로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아이작은 칼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날려 버렸다. 허망하게 쓰러진 시체를 다른 병사들이 수습해 한쪽에 쌓아두었다. 언데드로 부활시키기 전에 태울 장작들이 준비된 장소였다.
사형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하루만 해도 스물이 넘는 병사들이 처형당했다. 병사들은 말없이 시체를 옮기고, 시에로가 거기에 직접 불을 붙였다.
화아아악.
아낌없이 뿌려둔 기름이 시에로가 발휘한 기적과 맞물려 거세게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꽃과 열기가 병사들과 주민들 눈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봉화였다.
이제 시에로 여명군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불꽃이었다.
***
물론 아이작은 사람 좀 죽이고 불로 태운다고 이 오합지졸들이 정예 병사가 될 것이라는 망상은 꿈에도 꾸지 않았다. 시에로는 좀 상상하고 있을지 몰라도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들이 도적 떼가 아니라는 사실은 깨달았겠지.’
아이작은 그들이 처음 여명군에 참전했을 때 마음, 숭고한 이상과 영광을 꿈꾸며 길을 나섰을 때의 마음만이라도 되살리길 바랐다. 그것만 해도 아이작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다.
아이작은 병사들을 혼돈의 눈으로 몰래 관측했다. 성안에는 대략 5,700명 정도의 병사가 있다. 이들을 전부 다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 6명 중 1명 정도는 아이작의 무자비한 처형에 불만을 품은 것 같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굴러들어 온 돌이 ‘좋았던’ 여정에 훼방을 놓은 셈이니까.
그리고 다른 2명은 아이작이 기대한 대로 이전과 다른 ‘진짜 여명군’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여명군이 도적 떼나 다름없던 와중에도 최소한의 선을 지키거나 휩쓸리지 않으려 했던 무리들이다. ‘죄 안 저지른 사람이 어디 있냐’, ‘다들 하는 짓이다’ 하면서 평균을 깎아내리려 하는 자들에게 가려지지만, 어느 집단이든 양심을 지키려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원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겁먹었거나, 그냥 피곤할 뿐인 상황 따라 행동하는 무리였다.
제일 한심해 보이지만, 가장 일반적인 사람이다.
아이작은 바로 저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이 쇼 아닌 쇼를 하고 있었다. 주변 환경이 선해진다면 저들 역시 선하게 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인가?’
아이작은 여명군 안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무리, 어쩌면 가장 소수파지만 가장 극단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을 일삼으면서 분위기를 흐렸던 집단을 주시했다.
아이작이 노리는 진짜 목표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작은 외부 상황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불사 교단은 시체 폭격 외에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즉, 그들이 뭔가를 꽁꽁 숨겨 놓고 일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
“아직 결정하지 못했소?”
“…….”
리치, 알 레트마는 불사 교단의 새로운 신도─크란의 왕, 바테나 크란을 다그쳤다.
바테나 크란은 그가 맺은 사후 영혼을 헌납한다는 계약에 따라 불사 교단의 신자가 되었다. 이미 부패해 온몸의 살점이 떨어지기 시작한 그에게 인간적인 부분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테나는 완전히 불사 교단에 마음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애당초 그가 전향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살해당해 계약을 파기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대의 복수와 영토 보전을 위해서 먼 곳에서 찾아왔소. 불사황제 폐하와 그대가 맺은 계약 때문이지. 한데 그대는 아직도 우리를 침입자처럼 대하는군.”
리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대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영토를 침범한 자들은 저 빛의 법전의 거지 떼들이오. 세상 정의로운 척은 다 하면서 자기 쪽 사람이 아니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지. 아니, 이번에 저지른 짓들을 보면 자기 쪽 신도에게도 가차 없군. 그런데도 그들을 보호할 생각이오?”
“저 쓰레기들이 얼마나 죽어 자빠지든 상관없소.”
바테나 크란은 기분 나쁘다는 듯 쏘아붙였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비밀통로를 알려줌으로써 크란이 영원히 불사 교단의 영토가 되는 것이오. 불사 교단은 언제든지 그 비밀통로로 요새를 점령할 수 있을 테니까.”
크란 요새는 막강한 가호 기적으로 보호받고 있지만, 모든 요새에 그러하듯 몰래 드나들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이 비밀통로 또한 ‘허락받은 길’로 지정되어 있었다. 바테나 크란이 살해당한 뒤 사망보험에 의해 부활하여 빠져나온 길도 그 비밀통로였다.
그의 말에 리치는 정신적인 웃음의 의지를 내비쳤다.
“크란의 왕이 불사 교단원이 되었으니 당연히 불사 교단의 영토 아니오?”
“내 자식은 아직 살아있소. 크란의 계승자는 이제 그 아이니, 아직 크란의 영토는 불사 교단의 것이 아니오.”
리치는 턱뼈를 손가락으로 딱딱 두들겼다. 불사 교단의 사제로서, 그는 이미 영혼을 불사의 영토에 바친 이 교만한 왕을 강제로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치 역시도 한때 빛의 법전 신도였던 몸이다. 그는 독실한 크란의 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강압적인 수단은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오래된 경구 하나를 떠올렸다.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신도가 하나니.
리치는 손안에 기적으로 만들어 낸 책 한 권을 펼쳤다.
파라라락, 찬 기운을 뿜어내는 푸르스름한 페이지의 책이 펼쳐지자 바테나 크란의 시선이 움직였다. ‘죽을 자의 명부’를 확인한 리치는 책 한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레헤나 크란. 사망 예정.”
바테나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얼굴 근육이 없어서 표정을 들킬 일이 없는 리치는 여유 있게 그에게 말했다.
“기한은 내일이군요. 사인은…… 화상.”
사실상 선택의 여지를 빼앗는 말이었었다.
사제가 아닌 바테나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때문에 리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밀통로를 밝히지 않으면 리치는 저 예언을 ‘실현’시킬 수도 있었다. 누가 죽이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테나 크란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