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09)
309화. 시에로 여명군 (5)
아이작은 약탈한 재물을 돌려주고 범죄자들을 엄벌함으로써 크란 성의 민심을 잡아두었지만, 사실 이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도 있다.
바로 그 지역의 정통성 있는 사회지도층을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심리적 관성이 있어서, 기존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약 포섭할 만한 크란의 지도자가 있었다면 아이작이 열심히 민심을 다스리지 않았어도 반란의 조짐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크란의 왕이 언데드가 되어 성 밖에 있는 상황이니, 도덕적 명분이라도 가져와야 했다.
물론 아이작도 대안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다.
“크란 왕의 혈족?”
“그래. 바테나 크란에게도 아들이나 딸이 있었을 거 아냐. 설마 그 애들까지 잡아다 죽였나?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탈출했다거나.”
아이작의 질문에 시에로는 의아한 듯한 표정을 했다.
“글쎄, 그런 보고는 못 들었는데. 하지만 남매가 있었던 것 같긴 하군.”
크란 요새는 게임상으로도 지나쳐 가는 거점에 불과하다. 특수한 가호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 요충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왕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식들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정도로 아이작의 기억력이 섬세하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애들까지 죽은 게 아니라면 크란 왕이 데려가지 않았을 거야. 살아있는 자식을 불사 교단까지 데려갈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절대 없다고 말하려다가 안젤라가 생각난 아이작은 재빨리 단어를 바꿨다. 애초에 오드리프까지 열심히 뛰어가게 된 이유도 안젤라 때문 아닌가.
아이작은 새삼 황금 우상 상단이 열심히 보내던 용병과 산적들마저도 그리워졌다. 그놈들이 있으면 불사 교단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아마 주민 중 누군가 보호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궁전에서 일하던 하녀나 하인, 병사들 위주로 조사해 봐.”
“이, 인질로 삼으려는 건가?”
시에로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이작은 괴리감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의도는 없지만…… 그렇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요새의 비밀통로를 통해 언데드가 우글우글 몰려오는 걸 피하려면 일단 잡아서 ‘네 자식들은 무사하다’라고 보여 줘야 한다. 크란 왕이 선을 넘지 않게끔.”
“비밀통로라고?”
아이작은 대충 지시하고 넘어가려다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시에로의 표정에 살짝 머리가 아파 왔다.
“설마 비밀통로도 조사해 보지 않았나?”
“그런 게…… 있나?”
“그럼 당연히 있지. 크란 왕이 살해당한 후 요새를 탈출했다며? 그러면 그 크란 왕이 여명군으로 득시글거리는 성문과 거리를 지나서 도망쳤을까? 이런 요새에 비밀통로가 한두 개겠어? 아니, 빌어먹을. 그러면 통로를 폐쇄했을 리도 없겠군. 뛰어!”
시에로는 채찍 맞은 말처럼 헐레벌떡 달려가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애부터 찾아야 하나 비밀통로부터 찾아야 하나?”
“……후계자들부터 찾아! 이번에야말로 그 네필림의 매력을 잘 살려서 설득해 보라고. 비밀통로는 내가 따로 짐작 가는 곳이 있으니.”
시에로는 다시 달려갔다. 그 뒤를 복잡한 표정의 데반이 따랐다. 아이작은 그 등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일부러 비밀통로를 언급한 보람이 있군.’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았다.
***
“형님, 이거 상황이 재미없게 됐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조용해라. 빌어먹을, 성배기사면 성배기사답게 조용히 괴물이나 무찌를 것이지 왜 우리 같은 소시민들까지…….”
데반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방 안을 배회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시에로를 발견했을 때에는 꽤 흥미로웠다. 별 볼 일 없는 광신도 사제라고 비웃는 형제들도 있었지만, 데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에로는 좀 모자란 인물이었지만, 대신 꽤 그럴듯한 선동의 재능이 있었다.
시류를 읽는 재능이 있는(또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데반은 앞으로 광기와 선동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신앙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지만, 무리 짓지 못하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는다.
데반은 시에로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자진해서 그를 따랐다.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그 뒤는 데반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데반 자신마저도 시에로에게 감화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을 속이려다 자기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버린 격이랄까.
데반은 시에로의 열정에 찬 연설을 들으면서 저게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고, 여명군의 광기가 제국 전역에 들끓으면서 시에로 여명군이 무적이라는 착각까지 했다.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그때부터였던 것 같군.’
당연히 현실은 시에로의 멋들어진 연설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시에로에게는 멋진 선동 능력과는 별개로 조직을 운영할 능력이나 지성이 없었다. 그에게 여명군을 맡겼다간 순간적으로 사람이 모였다가 부서지길 반복하는, 모래성 같은 조직이 됐을 것이다.
그나마 조직 운영 경험이 있는 데반이 이를 악물고 무리수를 둬 가며 움직였다.
처음에는 협박, 그다음은 강탈, 그다음은 약탈…… 목격자나 보복을 방지하기 위한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 이미 시에로 여명군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책임질 수도, 책임질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과분한 조직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
데반은 물론이고 시에로마저도 겁에 질렸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면 여명군 본대가 쫓아와 ‘너희 안 가고 뭐 하니?’ 하고 철퇴를 흔들게 분명했다.
천사가 나타나 황제까지 한 방에 날려 버렸다는 소문을 들은 뒤에는 그런 강박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전투는 연전연패.
올칸 규율의 오크들,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것과 안전한 제국 안에서 초라한 민가나 귀족을 상대로 삥을 뜯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데반조차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여명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비극이 발생했다.
크란의 왕을 죽여버린 것이다.
“역시 크란 왕을 죽이지 말았어야…….”
누군가 원망하듯 중얼거리자 데반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닥쳐!”
“…….”
상대는 순순히 닥쳤지만 원망하는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크란 왕 살해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소국이라도 왕족, 그것도 빛의 법전 신도를 건드린다는 것에는 데반과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형제들조차 꺼림칙함을 보였다. 그래도 그들은 명색이 여명군이었으니까.
하지만 데반은 필사적이었다.
그동안 데반은 어떻게든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애써 왔다. 근거지가 있으면 일시적으로 군대가 와해하더라도 근거지에서 다시 규합할 수 있다. 근거지가 있는 조직과 없는 조직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 해도 게르토니아 신성제국을 건드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곳은 이제 빛의 법전 교단이 소유한 영토나 다름없다.
그 와중에 나타난 크란 요새는 데반에게 완벽해 보였다. 외국이고, 여명군 경로의 요충지에 있으며, 강력한 기적으로 보호받는 성벽까지. 이곳에 터를 잡고 시에로가 여명군을 인도한다면 훨씬 더 안전하게 조직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의미로는 안전하게 탈출 가능한 든든한 은퇴자금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왕이 사망보험계약을 맺었을 것이라 생각한단 말인가.
그 뒤로 불사 교단의 데스나이트와 리치가 습격해 왔다. 도시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새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명군 태반이 좀비가 되거나 달아났고, 왕좌를 차지해 한숨을 놓았던 데반과 그 일당은 성벽 안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시에로 사제가 그의 추종자들 몇 명과 함께 도망쳤을 때 데반에게 걸려 있던 매료의 마력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특히 시에로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더욱.
‘그래도 도망쳤던 시에로 사제가 성배기사와 함께 다시 돌아왔을 때 제대로 다시 시작할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데반은 입술을 깨물며 벽을 쳤다.
아이작은 이미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일당이었던 놈 중 과격했던 놈들 몇 명을 미끼로 던져 주기도 했다. 마지막 사형수였던 놈이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기 전에 입을 뭉개 놓긴 했지만 그래도 의심의 눈길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애새끼들은?”
“시에로 사제와 찾으러 간 애들이 있습니다. 금방 찾을 겁니다.”
데반은 사실 일찌감치 비밀통로를 찾아 둔 상태였다. 크란 왕이 숨길 수 없는 핏자국을 남기고 간 덕분에 찾아낼 수 있었다. 시에로가 또 도망갈까 봐 말해주진 않았지만.
데반은 핏발 선 눈으로 중얼거렸다.
“찾는 대로 바로 데리고 와. 성 밖의 크란 왕과 협상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
“그래. 네가 레헤나 크란, 너는 헬가 크란이구나.”
시에로는 눈앞에 있는 작은 두 남매를 보면서 속삭였다. 여자아이는 겁먹은 듯 남자아이의 뒤에 숨어있었지만, 남자아이는 시에로를 맹렬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하녀 뒤에 숨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대략 12살, 9살 정도. 알건 다 아는 나이였다. 하녀는 완강하게 두 남매의 은닉 사실을 부정했지만, 시에로의 차분한 설득 끝에 결국 넘어갔다.
“정말 왕자님 공주님이 무사하시다는 걸 알면 바테나 크란 폐하께서 물러나실까요?”
“무리해서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왕손이 다칠까 봐 그런 겁니다. 아무리 불사 교단에 영혼을 헌납하셨다 하더라도, 언데드의 손에 크란이 넘어가는 것은 원치 않으실 겁니다. 주민들도 원치 않으니까요.”
왕까지 죽여버린 시에로 측에서 주민을 설득할 만한 수단은 ‘그래도 언데드보다는 인간이 낫지 않냐’ 뿐이었다. 언데드의 매력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소수의 페티쉬일 뿐이다. 대부분은 언데드라고 하면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시에로는 남자아이, 레헤나 크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레헤나는 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살인자.”
시에로는 좀비라면 모를까 단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산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 그럴 배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원색적인 힐난을 들은 순간, 시에로는 한마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기 때문이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에로 여명군의 손에 묻은 피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이기도 하다는 것을.
자신은 이미 제국에서 손꼽힐 만한 살인자, 강도, 강간마, 방화범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걸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 아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만회할 수조차 없어진다. 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내게 내려진 기적 아닌가…….’
시에로는 경건한 모습으로 자세를 낮췄다.
“제 죄를 돌이킬 수는 없겠지요. 왕자 전하.”
레헤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심하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두 분은 제가 목숨 걸고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시에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남매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때의 변덕, 한때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선의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 자신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레헤나는 여전히 공포와 증오, 둘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네필림이 진심을 담아 하는 호소를 견디기에는 어린아이의 감정 수준이 너무 얕았다. 결국 레헤나는 머뭇거리다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하녀와 수행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시에로는 크란 남매를 데리고 곧장 성으로 향했다.
후계자들을 확보했으니 크란의 왕과도 협상의 여지가 생길지도 모른다. 시에로는 벌써 후계자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여명군이 빠져나갈 길을 여는 것까지 생각 중이었다. 아이작 말마따나 포로로 보이겠지만, 애들이 전쟁통에 휩쓸리게 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좀비들이 왕족이라고 살살 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시에로는 성으로 가는 길이 오던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에로는 수행원으로 붙어있던 남자 둘에게 물었다.
“이 길이 맞나? 점점 좁고 어두워지는데.”
“아, 이쪽이 더 빠른 길입니다.”
아직 크란의 지리에 밝지 않은 시에로는 그런가 생각했지만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데려가기에는 좋은 길이 아니었다.
“좀 더 큰길로 가는 게 좋겠군. 길이 지저분하잖나.”
“아, 정 그러시다면 아이들은 저희가 데려갈 테니 시에로 사제님은 큰길로…….”
시에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그는 아이들을 자신의 뒤쪽으로 슬쩍 밀면서 말했다.
“항상 내 뒤에 붙어 다니던 놈들이 뭐? 나더러 따로 가라고? 지금 무슨 꿍꿍이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데반에게…….”
그러자 호위 둘은 난감한 시선을 교차하더니, 대뜸 앞으로 나서면서 시에로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겨우 복구시켜 놓았던 코뼈가 다시 주저앉았고 시에로도 주저앉았다. 남자는 날렵하게 단검을 꺼내 시에로의 목에 가져다 대면서 속삭였다.
“함부로 기적 쓸 생각 마쇼. 애들도 같이 타죽을 테니…….”
이미 도망치려던 두 아이는 남자들 손에 붙잡힌 뒤였다. 시에로의 몸이 굳은 채 아무 것도 못 하자 남자는 코웃음 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그대로 시에로를 두고 떠나려 했다. 그 순간 시에로가 발작적으로 일어나 그들의 다리를 붙잡았다.
“뭐, 뭐야!”
“나도, 나도 데려가!”
기적이라도 쓰는 줄 알고 기겁한 남자는 엉겁결에 시에로를 걷어찼다. 하지만 시에로는 얻어맞고 진흙탕을 구르면서도 그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거지! 네놈들, 비밀통로 알고 있지? 거기서 애들을 인질로 삼아 도망치려는 거지! 나도 데려가라, 이놈들아! 나도 같이 데려가라고!”
남자들은 황당하다는 시선을 교환했다. 일부는 실망한 표정도 지었다. 곧 다리를 잡힌 사내가 시에로를 향해 침을 퉤 뱉었다. 시에로는 침을 맞으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 뭐. 사제도 그렇고, 얼굴마담이 계속 있으면 나쁠 것 없지. 그렇게 합시다.”
“고맙네, 고마워!”
시에로는 감사 인사를 하면서 겨우 일어나 남자들 뒤를 따랐다. 이제 시에로의 위치는 그들 사이에서 이전과 같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물투성이가 된 시에로는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형형한 눈을 두 남매에게 떼지 못한 채로, 자신의 귀를 신경질적으로 긁을 뿐이었다.
아이작이 제발 무슨 뜻인지 깨닫길 바라면서.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