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12)
312화.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2)
“모두 탈출하시오! 지금이 크란 요새를 탈출할 기회요!”
시에로가 큰 소리로 외치며 달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데반을 비롯해 여명군의 수족이라 할 수 있던 패거리들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다들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에로 사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탈출이라뇨? 밖에 아직 좀비들이…….”
“사악한 언데드 도당들은 비밀통로를 통해 잠입하려다가 모두 섬멸당했다! 하지만 그 대지로부터 거부당한 자들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터, 지금이야말로 크란 요새를 탈출할 기회다!”
얻어맞으면서 생긴 상처 때문에, 시에로의 말에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데반을 처치하면서 얻은 양손의 성흔(聖痕)은 그를 더더욱 기이하고 신비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좀비들이 바글거리는 성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 하지만 좀비들이 아직…….”
시에로가 상대방의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견디던 순간, 더 이상 설득할 필요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크란 요새의 첨탑 하나가 잘려 무너진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전쟁에도 무너진 적 없는 크란 요새의 첨탑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비명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에로는 그걸 기회 삼아 서둘러 외쳤다.
“천국으로부터 외면받은 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도망쳐라!”
시에로가 다그칠 것도 없이 그와 대화하던 여명군 병사는 이미 벌써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시에로는 그의 말마따나 좀비들에 대한 대책을 아예 안 세울 수는 없었다.
“여명군! 여명군이 앞장서 길을 열어라! 좀비들은 통제를 잃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모두 탈출하시오!”
좀비들이 무서운 것은 그 숫자와 집단행동 때문이다. 하지만 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좀비들은 그저 극도로 감각이 둔화된 걸어 다니는 수수깡에 불과하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시에로 여명군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시에로의 현실감각도 천천히 돌아왔다.
‘수만에 이르는 좀비들의 방벽을 뚫으라고? 아무리 통제가 안 된다고 해도 그건…….’
아이작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무조건 믿고 사람들을 좀비떼 앞으로 내몰란 말인가?
막상 나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에로는 이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내모는 꼴이다.
‘그래도 믿는 수밖에 없나…….’
지금 아이작은 좀비보다 훨씬 더 끔찍한 존재와 싸우고 있었다.
시에로는 자신의 양손을, 그리고 자신의 곁에 붙어 겁에 질려있는 두 아이를 보았다.
“가자.”
이제 그의 양손에는 두 아이뿐만 아니라 크란 요새의 수많은 목숨이 걸려있었다.
만약 아이작이 도와줄 수 없다면, 자신의 손으로 해내야만 했다.
***
쉬이이이익, 쾅!
수확자의 낫이 공기를 날카롭게 가른 순간, 성벽이 가차 없이 깨져 나갔다.
수백 년 역사 속에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버텨 왔던 크란 요새의 성벽이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파괴를 겪는 것은 처음이었다.
캐터필러나 공성 망치, 심지어 기적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성벽은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왔다. 그러나 내부에서 가해지는 가차 없는 충격엔 버틸 수 없었다. 아이작은 짚단마냥 잘려 나가는 성벽을 보면서 거기에 자신의 목을 대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돌겠군.’
수확자는 ‘피할 수 없는 죽음’답게 꿋꿋하게 아이작만을 보고 다가왔다.
아이작이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조금 느린 속도였기 때문에 뒤로 제쳐 두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수확자는 아이작과 달리 목표와 자신 사이의 ‘최단 거리’만을 좁히며 움직였다.
그 중간에 있는 것들은 성이든, 나무든, 사람 모가지든 가리지 않고 박살 내며 다가온다는 뜻이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성벽 위를 따라 달렸다. 유서 깊은 유적지가 파괴되는 것은 유감이지만, 어차피 불사 교단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었다.
‘탈출은 아직인가?’
아이작은 한참 도시를 빠져나가는 무수한 인파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일단 사람들이 다 나가야 성을 넘겨주든가 말든가 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넘겨주고 싶어도 넘겨줄 수가 없다. 아이작에게 이 성의 소유권이 없기 때문이다.
시에로에게 억지 써서 도망치라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여명군과 번듯한 주민들이 다 빠져나가면 아이작이 이 성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누구한테 넘기지? 수확자에게 넘겨준다고 하면 효력이 발생하려나?’
쉬이이익, 쾅! 아이작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날카롭게 날아든 대낫이 아이작의 발치를 베어냈다. 동선을 예측해 도주 경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수확자가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목표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엄청난 수준의 검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보일 수도 있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발 디딜 자리를 잃고 추락했다. 수확자는 허공에 뜬 아이작을 향해 대낫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 허공에서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발동했다.
땅이라는 지지대 없이 허공에서 검술을 사용해 봤자 허우적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작의 검은 기적적으로 세 갈래의 검기를 뿜어내 대낫을 후려쳤다.
콰가가각! 쇠를 긁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기와 대낫이 부딪쳤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대낫은 검기를 떨쳐 내고 아이작의 머리를 단숨에 내리찍었다. 파육음과 피보라가 튀어 올랐다.
쿠르르르…… 이내 추락한 아이작 위로 무수한 토사와 성벽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누구라도 죽음을 예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수확자는 아직 죽음을 수거하지 못한 것에 의아해하며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차가운 냉기가 먼지를 밀어냈다. 먼지가 흩날려 사라진 자리 한복판에, 부서지고 잘려 나간 무수한 돌 파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이작이 여전히 서 있었다.
다만 그 흙먼지 속에 보이는 실루엣은 이전과 약간 달랐다.
“하…… 어지간하면 도망만 치면서 버텨보려고 했는데.”
수확자의 대낫이 할퀴고 지나간 아이작의 왼쪽 얼굴은 반쯤 쪼개지려다 만 형상이었다. 그 틈새로 무수한 촉수들이 스멀스멀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치 엄청난 양의 괴물들이 몸 안에 웅크리고 있다가 찢어진 상처를 기회 삼아 기어 나온 것처럼.
두 눈은 보라색을 넘어서 진홍색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번져 나온 피눈물과 섞인 탓이다.
분노, 고통, 공포, 호승심, 온갖 감정이 뒤섞인 아이작의 감정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과잉 상태였다.
누구라도 공포를 느낄만한 모습이었으나, 수확자에게는 기계적으로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피할 수 없어? 피할 수 없다고…… 그래, 그러면.”
그 순간, 아이작을 중심으로 시커먼 색채들이 폭주하듯 흘러나왔다. 색채들은 순식간에 수확자와 아이작을 세상 모든 것의 시선으로부터 감추려는 듯 하늘부터 지상까지 둘러싸 새까만 기둥을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이 은닉되고 관측되지 않으며, 기록되지 않는 세계.
이 안에서는 죽음조차 확률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수확자는 갑자기 드리워진 강력한 아이작의 기세에 멈칫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다는 듯 마음껏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실루엣이 거칠게 뒤틀리며 기이한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세무담당관님, 우리 사장님이랑 상담 좀 해보시겠어요?”
***
“저, 저게 뭡니까!”
사람들은 갑자기 크란 요새 한쪽에 나타난 물결치는 검은 기둥을 보며 경악했다. 시에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보다는 탈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뭣보다 저쪽은 방금 전까지 성벽이 무너지던 자리였다. 아이작이 뭔가 한 게 분명했다.
“신경 쓸 거 없다! 성배기사께서 부정한 적을 처단하기 위한 숭고한 의식을 치르시는 중이시다!”
“서, 성배기사님께서 저런 불길한 어둠을 사용하신다구요?”
“이놈! 자고로 어둠은 빛의 부재, 그림자는 광원의 종, 재는 불꽃이 떨어뜨린 낙화일 뿐이라고 경전에서 언급하였다! 숭고한 빛의 법전 성배기사께서 어둠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핑계와 거짓말, 선동을 할 때만큼은 말이 술술 나오는 시에로였다.
다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시에로의 말이었기에 그런가 하며 넘어갔다. 무엇보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 들어온 성배기사 아닌가. 눈앞에서 촉수가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믿을 수밖에 없다.
“시, 시에로 사제님!”
그때 여명군 앞쪽에서 당황한 표정의 병사가 달려왔다. 열린 성문 밖에서 좀비들을 처치하기 위해 먼저 나간 병사들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냐? 검은 기둥이라면 성배기사가…….”
“아, 그, 검은 기둥은 상관없습니다! 조, 좀비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셉니다! 탈출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라고?”
분명 지하에서 데스나이트들과 좀비들을 물리쳤으니 좀비를 더 이상 통제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아이작이 말했다.
‘설마 살아남은 리치나 데스나이트가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그게 그럴듯했다. 설마 제일 중요한 전력을 전부 다 지하통로에 쑤셔 넣을 리는 없잖은가. 당연히 혹시 모를 한두 명쯤은 남겨두는 것이 맞다.
시에로가 망했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성문 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시에로!!”
인간의 음성이라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음량이었다. 목소리는 크란 요새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시에로는 놀라면서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 것은 불사 교단도 이제 안다. 그런데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때 옆에 있던 레헤나 크란이 앞으로 움직이려 했다. 시에로는 반사적으로 붙잡았지만 레헤나는 뭔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그제야 시에로는 좀비를 통제할 만한 사람, 그러면서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을 떠올렸다.
크란의 왕, 바테나 크란.
“시에로, 나와라! 손님으로 들였으나 칼을 들이댄 죄를 이제 묻겠다!”
또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좀비들의 성문이 열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성문을 닫을까 했지만 그러면 아이작의 지시대로 탈출할 수 없게 된다.
시에로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이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지금까지 쌓아 올리고 외면한 채무가 이제 이자까지 쳐서 몰아닥치고 있었다. 아이작에게 벌어진 일이 그러하듯, 어쨌든 세금은 죽음만큼이나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시에로는 좀비들을 막아서는 여명군들을 옆으로 제치고 가장 앞장서 나갔다.
“물러나라!”
시에로는 좀비들의 물결 앞에 서자마자 곧바로 천상의 열기를 끌어다 흩뿌렸다. 여명군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시에로의 모습에 당황하다가 강렬한 열기에 뒷걸음질 쳤다.
시에로는 단 한 번도 최전방에 선 적 없었다. 뒤에서 열심히 연설하고 기적이랍시고 불꽃 몇 개 보여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여명군의 사제였다.
콰르르르르! 물결치는 불꽃의 파도가 좀비들을 휩쓸었다. 백이 넘는 좀비들이 그 자리에서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그 이상의 좀비들이 몰려와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시에로 사제님!”
“내가, 내가 해결하겠다!”
시에로는 겁에 질려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좀비 대군을 향해 외쳤다.
“크란! 바테나 크란 폐하, 광대 시에로가 왔습니다! 저를 찾으시지 않았습니까?”
광대 시에로. 시에로는 안목 있고 격 높은 자들이 자신을 얕잡아보며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반한 얼굴과 언변. 마술로 대중을 사로잡을 뿐이라고.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시에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광대의 잔치는 끝났다. 이제 지저분해진 잔칫상을 치워야 할 시간이다.
쿵. 전신 갑옷을 걸친 바테나 크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신당한 왕.
불사 교단은 언제, 어떻게 불사 교단에 입단했는지에 따라 언데드가 되었을 때의 격이 결정되지만,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높게 친다.
성기사였던 자가 데스나이트가 되고, 사제였던 자가 리치가 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왕은?
크란 요새를 향해 몰려오는 무수한 좀비의 군세가 바테나 크란의 격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배신당하고, 더럽혀졌고, 모욕당했다.”
바테나 크란은 썩어들어가는 숨결을 내뱉으며 분노로 속삭였다.
“너도 나와 같은 꼴로 만들어 주마. 내가 내 손으로 내 왕국을 더럽힐 수밖에 없게 만든 너를, 반드시 네 부하들과 같이 똑같은 꼴로 만들겠다!”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