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14)
314화.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4)
부우우우우…….
비밀통로에서 들렸던 것보다 훨씬 낮고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팔 소리 같기도 하고, 물거품이 터져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동시에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더운 체온을 가진 생물 위에 올라탄 듯한 불쾌한 감각.
심연의 손아귀는 아이작이 마음대로 크기를 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너머의 색채보다 큰 규모를 불러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온 사방을 색채로 둘러싼 지금은 얼마나 큰 저 심연 너머에 웅크린 짐승을 불러낼 수 있는가?
쿠구구구…… 아이작은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한 진동을 느꼈다. 대기가 떨리는 소리였다.
수확자 역시 이변을 느낀 듯 아이작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온 사방이 다 색채였기 때문에 심연의 손아귀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지? 벽? 바닥?’
둘 다 아니었다.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순간적으로 감춰진 제례의 장막이 깨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눈동자가 단지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마치 달처럼 은은한 붉은 빛이 담긴 샛노란 눈동자는 눈을 뜬 것만으로도 대기를 진동시켰다.
‘대체…….’
아이작은 저 눈동자가 ‘심연의 손아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소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어 오고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최소한 천사, 혹은 천사에 비견되는 무언가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이름 없는 혼돈이 아이작의 심리적 압박 상태를 강제로 해제시켰다. 덕분에 아이작은 침착하게 판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심연의 손아귀가 천사의 힘을 빌리는 거였다고?’
그것도 이름 없는 혼돈 신앙에 속한 천사를?
그 무지막지한 힘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물론 천사 전체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팔 한 짝, 손가락 한 개 정도를 빌리는 것이겠지만, 충분히 터무니없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어깨 내지는 머리통까지는 불러낸 것 같았다.
이내, 하늘에서 엄청난 크기의 촉수들이 미끄러지듯 쏟아져 내려왔다.
콰르르르르! 하나하나가 탑 같은 굵기에, 벼락 같은 길이를 가진 촉수들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고 형태를 분명히 알아보기도 힘든 촉수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입술들, 손가락들, 눈동자들, 이빨들, 발톱들을 가진 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할퀴고 찢어발기며 쏟아졌다.
무시무시한 촉수의 폭풍이었다.
맨손으로 모기를 잡아보려 한 적이 있는가?
수확자가 당하는 꼴이 정확히 그런 모습이었다. 다만 모기의 입장에서였다.
맨손으로 모기를 잡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모기는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으스러져 뭉개지고 만다. 발작적으로 휘둘러대는 수확자의 대낫이 촉수 몇 가닥을 상처입히고 베어 냈지만, 전체 크기에 비하면 피해 역시 모기에 물린 정도 수준에 불과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손아귀가 모기를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심연이 마침내 수확자의 대낫을 사로잡은 순간, 그 투명한 영체 또한 촉수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확자는 다시 발악하듯 대낫을 휘둘러댔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카훌린을 들고, 지상까지 내려온 촉수를 타고 달려갔다. 카훌린의 가속 능력이 발동되면서 아이작의 순식간에 수확자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아이작은 허점투성이인 수확자의 대낫을 향해 최대한 힘을 쥐어짜 검기를 뿜어냈다.
파슷, 파스슥! 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카훌린이 순간적으로 검게 물들었다. 카훌린의 검기가 모든 색채를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의 공간이 흑백의 무채색에 잠식되었다. 불길하게 타오르는 검기가 세상을 갈라놓았다.
이삭 검술: 사상지평선.
콰드드드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처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작은 눈앞에서 수확자의 대낫이 깨져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전신에서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뒤늦게 피드백되며, 아이작은 간신히 추락하듯 착지했다.
대낫을 잃은 수확자는 더 이상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이내 촉수에 휘감긴 수확자로부터 처참한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심연의 손아귀는 수확자가 있던 자리에서 한참 흐느적대다가 물러났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말미잘을 떠올렸다.
말미잘은 아무 생각 없이 해류를 따라 흐느적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촉수로 플랑크톤과 동물성 단백질을 먹어 치우고 있다. 마치 그것을 연상시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수확자를 먹어 치운 건가?’
온몸의 힘이 다 빠진 아이작은 회복을 기다리며, 먹을 수 있는 거면 좀 나눠 달라고 하고 싶었다.
사상지평선은 강력한 검술이지만, 사용할 때마다 후유증으로 온몸의 근육이며 신경이 절단 날 지경이었다.
평범한 사람에겐 한번 쓰고 죽어 나가는 자폭기나 다름없다. 아이작이 재생 능력을 믿고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 배 좀 채워야겠군.’
전투를 마치자 감춰진 제례의 장막이 서서히 거둬지면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겨우 몸을 가눌 정도로 회복한 뒤, 간신히 카훌린에 기대 일어섰다. 아직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수확자가 정말로 죽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죽일 수 있는 존재인지가 의문이다.
‘응? 카훌린이?’
그때 아이작은 카훌린의 형태가 기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확자의 대낫을 부러뜨린 순간 그 파편이 박힌 것인지 붙은 것인지, 여기저기 그 파편이 튀어나와 있었다. 덕분에 제법 명검 같아 보이던 카훌린이 무슨 사악한 용병이 쓰는 톱날검마냥 흉악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이작은 서둘러 카훌린의 상태를 확인했다,
[변질된 성검 카훌린(EX+)] [엘릴이 직접 전장에서 휘두른 실전용 검. 세상에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그 어떤 일에도 부러지거나 날이 상하지 않는다. 하루 세 번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가속시킬 수 있다. 엘릴의 대전사가 아닌 사람이 손에 쥐면 스스로의 목을 찌른다.]여기까지는 이름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설명이 추가되고 있었다.
[성배기사 아이작이 수확자의 대낫을 파괴하면서 그 파편을 일부 흡수했다. 검기가 더욱 강력해지며, 산 자에게는 생명력 갈취 효과가, 죽은 자에게는 영체 타격 효과가 추가로 적용된다.]아이작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아이템을 처음 보았다. 그것도 엘릴이 쓰던 성검을 ‘변질’시켜 가면서 붙을 줄은 몰랐다. 아이작의 행보가 카훌린의 역사에 이름 한 획을 새긴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희열보다 더럭 겁부터 났다.
‘아니, 그 정신 나간 근친 엘프가 자기 칼에 무슨 짓을 한 거냐며 화를 내면 어쩌라고?’
일단 당분간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꺼내지도 말고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졸지에 의도치 않게 카훌린을 업그레이드한 셈이 되었지만, 일단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앞으로 불사 교단의 적들과 여러 번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이작은 카훌린을 일단 검집에 수납하고…… 수납하려고 했으나 톱날처럼 튀어나온 부분들 때문에 더 이상 검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작은 신경질적으로 아무 천 쪼가리나 집어 카훌린을 감쌌다.
그가 곧바로 향한 곳은 수확자의 대낫이 부러진 자리였다. 아직도 수확자가 죽었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임무 완료 메시지가 안 떴어.’
수확자를 죽였다면 이름 없는 혼돈이 부여한 ‘수확자로부터 살아남기’ 임무가 완료됐어야 했다. 역시나 대낫이 부서진 장소에 다가가자 여기저기 흩어진 대낫의 파편들이 꿈틀거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미치겠네.”
빠르면 한나절, 늦어도 하루면 복구가 완료될 것이다.
이전에 비해 그 형태나 크기가 온전하지 못할 것이란 것은 복구된 일부만 확인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부만 복구되어도 아이작은 평생 누워서 잠을 못 자게 될 것이다.
커다란 파편을 떼어서 훔쳐 가면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파편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자신의 등을 찌르는 꼴도 원치 않았다.
결국 언제고 다시 복구되어 아이작을 쫓아올 게 분명했다.
그때마다 아이작이 온갖 쇼를 해가며 박살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세금을 내야 한다.
***
아이작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걷던 사이, 어느새 성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때마침 걸어 들어오던 에델레드와 눈이 마주쳤다.
“엥?”
“어?”
둘 모두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랐지만 에델레드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몰아 다가왔다.
“선생님, 역시 벌써 끝내신 모양이군요! 그 불길한 검은 기둥이 사라져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어떤 사악한 존재가 그런 것을 불러낸 건지!”
“아, 그 검은 기둥이라면 제가 불러낸 겁니다.”
“아, 그런가요? 그런 사악한 힘조차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니, 역시 선생님은 대단하십니다. 강력한 선에게 악이란 그저 식칼 정도의 유용함을 품고 있을 뿐이지요.”
에델레드는 한 치의 의심도 한 적 없는 듯 납득했다.
그제야 아이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게 생각하느라 주변을 살피질 못 했는데, 에델레드가 벌써 성까지 온 걸 보니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았다.
“주민들은 모두 잘 대피했습니까?”
“예! 선생님께서 지시한 대로 시에로 여명군과 주민들은 무사히 성 밖으로 대피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시에로 여명군에 대한 소문은 모두 별 볼 일 없는 거지 떼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 소문보다 열정적이고, 특히 시에로 사제가 괜찮은 사람 같더군요. 소문과 너무 달라 놀랐습니다.”
“…….”
아이작은 일단 시에로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시에로에 대한 시험은 이렇게 끝난 것 같았다. 시에로는 마침내 아이작이라는 행운을 기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 그리고 포로…… 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적의 수괴 하나를 잡았습니다.”
“수괴요?”
“예. 바테나 크란. 레헤 평원의 주인, 크란의 왕이라더군요. 목을 쳤는데 살아 있는? 아니, 움직이는……? 어쨌든 그런 포로는 생소해서 일단 남겨 두고 있습니다. 언데드는 태우는 게 답이지만 시에로 사제가 잠깐 남겨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이작은 눈을 크게 뜨고 재빨리 말했다.
“제가 한번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
엘릴 왕국군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더 이상 통제받지 않는 좀비들을 수수깡 베어 넘기듯 쓰러뜨리고 있었다. 다른 곳에 흘러 들어가 피해를 입히거나 전염병을 퍼뜨리기 전에 불태워야 했다. 남겨두면 다른 언데드가 나타나 병사로 쓸 가능성도 있었다.
아이작은 바테나 크란의 목이 보관된 막사로 찾아갔다. 왕의 시체이기 때문에 아무 데나 팽개쳐 둘 수도 없어서 임시 막사를 펼쳐 보관해 둔 상태였다.
막사 한쪽에는 목이 없는 바테나 크란의 시체가, 그리고 책상에는 몸통이 잃어버린 머리가 놓여 있었다. 아이작이 게임 속에서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늙은 모습이었다. 부패 때문인지, 배신의 충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썩어들어가고 있어서 냄새가 지독했지만 아이작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다가가 먼저 겸손하게 예의를 표했다. 그제야 가만히 있던 바테나 크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성배기사로군. 명성은 익히 들었지.”
폐가 없어도 대화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애초에 언데들은 육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 비슷한 권능을 통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때문에 타의적으로 언데드가 된 자들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크란의 왕을 뵙습니다.”
“크란의 왕? 비웃는 건가? 내 요새는 불한당들에게 빼앗겼고, 그 불한당들은 내쫓겨 달아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외국인들과 이교도들이 승냥이 다툼을 벌이는군. 이제 크란 요새는 빈집이나 다름없는데, 영토 없는 왕이 어떻게 어떻게 왕이냐?”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아이작은 담담히 말했다.
“크란의 왕은 아직 여기 당당히 계시는군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그래도 정통성을 가진 왕이지요. 크란 요새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이작은 성실한 납세를 위해 필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