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15)
315화.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5)
바테나 크란은 말문이 막힌 듯 한참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물었다.
“내가 이제 불사 교단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나?”
“흠, 그 책상이 사실 폐하의 몸통이 아니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아이작은 가늘고 긴 네 다리가 일품이라고 칭찬하려다가 조롱처럼 들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바테나 크란은 아이작의 말에 한참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절하지.”
아이작은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여명군 본대가 오고 있다. 내 영혼은 불사 교단과의 계약에 따라 불사 황제 베셰크에게 충성하고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나는 크란 요새의 주민들을 동원해 여명군 본대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지. 무의미할뿐더러 어리석은 짓이다.”
“주민들은 대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 내 자식들은 객지를 떠도는 망명자 생활을 하겠군. 내가 이대로 불태워지고 크란 요새는 내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맞다. 어리석은 말을 계속할 생각인가, 성배기사?”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제안이 멍청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바테나 크란에게 이 요새를 돌려주어야 ‘성실납부’가 성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 제안이었다.
바테나 크란은 눈알을 굴리다가 아이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게 요새를 돌려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리치가 저주라도 걸었나?”
“그런 셈이죠.”
바테나 크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을 들어준다면 생각해 보지.”
“제안이라면?”
“내 자식들의 후견인이 되어라.”
후견인이라면 가장을 잃은 가족이나 뒷배경이 필요한 유망주를 후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뜻한다.
크란 가의 마지막 일족이라면 부족함이 없지만, 후견인의 부담도 생각해 봐야만 했다. 특히 외국인 데다, 거대 세력 중간에 낀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바테나는 그런 부담을 생각한 듯 부연했다.
“돈이나 가르침, 무력 제공, 보호,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단지 성배기사의 배경만 빌려주면 된다. 이 땅이, 이 일족이 성배기사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를 빛의 법전 교단과 불사 교단에 남겨주면 충분하다.”
여명군이 크란 요새를 약탈하고 공격할 만한 명분을 남겨두지 말라는 뜻이다.
이미 크란 요새는 바테나 크란에 의해 더럽혀진 땅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으므로.
아이작은 고민하다가 그 정도라면 부담은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해 조건 하나를 덧붙였다.
“시에로 사제도 후견인으로 세우도록 하죠.”
“…….”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자가 배신자에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보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확실하게 잡아놓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그 작자가 실질적으로 이 땅을 보호해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작은 진지했다.
이미 천사들도 자신의 정체를 아는 상황에서 온전히 자신의 후광에만 기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새롭게 각성한 시에로라면,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자신보다 이 땅에 더 신경 써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좋다. 그게 너의 뜻이라면. 네 제안을 수락하겠다.”
“크란 요새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받겠다. 그리고 성주의 명령으로, 크란 요새는 레헤나 크란에게 상속한다. 신께 자비를.”
넘겨주자마자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계승 의식. 그러나 요건은 맞췄다.
아이작은 불사 교단에 크란 요새를 넘겨주었고, 예측대로라면 아이작은 성실 납부에 성공한 셈이다. 즉, 그를 향한 피할 수 없는 죽음은 효력이 정지되어야 한다.
“……안 되는군.”
임무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납부할 세금이 크란 요새가 아니었거나, 이런 눈가림 요식 행위는 어림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잘 안 되나 보군.”
“예, 뭐. 그러면 두 번째 계획으로 가야겠군요.”
아이작은 시선을 남부로 돌렸다.
잠깐의 방랑은 끝났다. 그는 이제 수확자가 다시 눈뜨기 전에 서둘러 남부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곳엔 아이작에게 부과된 세금이 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샬록과 레오노라, 그 작자들이라면 내 머리에 걸린 세금이 뭔지 확인할 수 있겠지.’
***
“아니, 성배기사가 벌써 떠났다고?”
“예. 급한 일정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는 것을 양해해달라 하셨습니다.”
아이작은 세금 납부가 거절당하자마자 넬을 타고 허둥지둥 떠났다. 대신 헤사벨을 통해 뒷정리를 지시했다.
우선 에델레드에게 양해를 구했다. 엘릴의 왕에게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불러놓고 인사도 제대로 없이 떠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에델레드는 아이작에게 불편한 감정을 갖지 않겠지만, 주변에서 말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아이작 님은 불사교단과 싸우던 도중 심각한 저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저주를 해지할 방법을 찾아내려면 오드리프로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니, 그런…….”
“저주라면 어쩔 수 없지.”
속으로 불편해하던 기사들도 저주라는 말에 납득했다.
오랜 세월 마녀 헤카틀리에게 시달려 왔던 엘릴의 기사들에게 저주는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대단한 기사도 저주에 시달리다가 자멸하는 것을 자주 봐왔으니까.
“그리고 에델레드 폐하께는 크란 요새의 수습을 부탁드린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신분이 높으신 분이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세워주시리라 믿는다 하셨습니다.”
“흠, 수습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우선 크란 왕의 후계자들이 살아있으니, 공식적으로 그들이 계승권자가 되었음을 보증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이사크레아의 이름으로 그들의 신분을 보증하겠다 하셨습니다.”
대가 단절된 영지에 어디서 누군지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를 데려다가 후계자라고 주장할 수 있으므로, 보증인의 신분과 도덕성은 제법 중요했다. 아이작이라면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에델레드는 거기에 실행력을 부과할 뿐이기에,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그렇군. 나도 그 아이들을 보았소. 나이가 어려 보좌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나도 그보다 몇 살 차이 나지 않을 때 왕이 되었지. 믿을 수 있는 기사를 붙여두겠소.”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 시에로 사제에 대한 것입니다.”
“저, 저요?”
갑자기 언급된 이름에 시에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름이 아무리 유명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민과 하층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것뿐이다. 엘릴의 왕이나 성배기사, 굴마르 공작가의 딸 같은 ‘진짜’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감은 매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헤사벨은 웃으며 시에로에게 말했다.
“아이작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에로 여명군은 끝났다. 시에로 사제도 지하에서 죽었다. 끓는 물 속에서 다시 태어난 시에로 사제는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이 아니라, 산 자들의 삶을 돌보기 위해 돌아갈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델레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시에로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여명군을 중단하고 돌아가라는 뜻이다.
어차피 조직 운영과 전쟁에 재능이 없는 시에로가 불사 교단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죽음만 부추길 뿐이다.
아이작은 오히려 그의 재능을 종교적 광기를 잠재우는 데 쓰길 바라고 있었다.
‘아니, 그게 더 죽을 확률이 높아 보이는데?’
그 말은 여명군을 부추기는 교단과 정 반대 노선으로, 정치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단심문관이 문 앞에서 어슬렁거릴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네필림인 시에로에게는 약점마저도 있었다.
그러다 시에로는 문득 아이작이 말한 ‘끓는 물 속에서 다시 태어난 시에로’라는 대목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일렁이는 불빛으로 가득한 손.
지하수로에서 천상의 열기에 담갔다가 빼낸 그 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흔이자 성체의 증명이었다.
‘성체라면 교단이라도 함부로 하진 못하겠지.’
무수한 여명군을 끌고 갔다가 죽음으로 내몬, 그리고 여명군이 끼친 어마어마한 민폐를 생각하면 죽어라 욕먹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에로에게 부과된 세금이었다.
“……받아들이겠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시에로가 겨우 대답했다. 에델레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로 여명군을 규합하고 무사히 후퇴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소. 하지만 지시가 무사히 이루어질지는 모르겠군. 여명군 본대가 접근 중이라던데, 시에로 여명군의 잔존 병력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가진 않을 것이오.”
“그 역시 제가 감당할 방법을 찾아봐야지요…….”
두 번째 안건이 마무리되자 헤사벨은 웃으며 세 번째 전언을 꺼냈다.
“그리고 세 번째 전언은…… 바테나 크란에 대한 처분입니다. 바테나 크란은 빛의 법전식 화장(火葬)을 부탁했습니다. 영혼은 불사 교단의 영토로 돌아가겠지만, 육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로 장례를 부탁드립니다.”
헤사벨은 거기서 눈을 돌려 시에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상주는 레헤나 크란, 장례 진행은 시에로 사제에게 부탁한다 하셨습니다.”
시에로는 한층 더 마음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에로가 이뻐서 장례를 치러 달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례식 때 우는 유족들을 보면서 시에로가 더 죄책감을 느끼기를, 그가 마음의 빚을 더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근처에 빛의 법전 사제가 시에로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럼 아이작 님의 전언은 여기까지입니다. 협조, 협력 감사드리며, 특히 이곳까지 군사를 몰고 와주신 에델레드 폐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오드리프 항에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
용기란 남들이 하지 않으려 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용기는 가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의 등 뒤에 무수한 동료와 부하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나의 잘못과 실책을 반성하고자 한다. 나는 빛의 법전께서 주신 능력 이상의 욕심을 부렸고, 주어진 소명 이상의 시련에 감히 도전했다. 이 끔찍한 실패로 많은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나 또한 교황 성하께 죽음으로 죄를 청하고자 한다.”
시에로 여명군의 신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물론 시에로가 벌인 어리석은 실책들,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은 모두 그들 눈과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시에로가 나름대로 반성하고 여명군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모습도 보였고, 전부터 분위기를 흐리던 패거리도 어느 센지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시에로가 그 유명한 성배기사와 말을 트고 친근하게 대화하며, 신비로운 성체로 거듭나고, 엘릴의 왕조차 존경을 표한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안 됩니다, 사제님!”
한 젊은 신도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시에로 사제님께서 저지르신 실수는 사제님의 눈과 귀를 막던 사악한 자들에 의한 것입니다. 사제님의 명성을 깎으려는 악귀들의 농간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
“맞습니다. 사제님!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저희는 아직 여명군을 멈출 수 없습니다!”
여명군 병사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번져가기 시작했다.
사실 시에로에게 질린 자들은 이미 도망쳤고, 이 자리에 남은 자 대다수는 시에로의 극성팬이거나 오갈 곳 없는 자들뿐이다. 열렬하게 번지는 시에로 옹호 분위기는 금방 끓어올랐다.
시에로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계획대로군.’
당연히 시에로는 여전히 자기 목숨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전처럼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지만, 자발적으로 교황청에 목을 바칠 생각도 없었다.
시에로는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배려와 사랑을 갚을 길이 없어 민망할 뿐이다. 하지만 내 능력에 비해 주어진 과업이 과중하다는 것이 드러난 만큼, 이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여명군을 중단하겠단 말씀이십니까?”
신도가 경악하며 외쳤다. 시에로는 다급히 손을 들어 술렁이려는 인파를 제지했다.
“내 말은…….”
지금부터 게르토니아 신성제국으로 돌아가 평화와 화친의 메시지를…… 이라고 설명하려던 순간, 여명군 인파 저편에서 누군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시에로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연설을 중단했다.
창백한 안색의 여명군 신도는 숨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시에로에게 첫 마디를 꺼냈다.
“이단심문관! 이단심문관이 시에로 사제님을 찾습니다!”
순간 시에로는 반전 운동이고 뭐고 전부 때려치우고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