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성배기사 (1)
성물.
기적이 사람의 몸에 서린다면 성체라고 불리듯, 기적이 서린 물건은 성물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성물 중에서도 급이 있다.
아이작이 한때 가졌던 광휘석 목걸이도 일종의 낮은 등급의 성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눈앞에 있는 이 검은 급이 달랐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화재나 국보 같은 것으로 보관해야 할 물건이었다.
[분열 예식(EX)] [무희가 제왕과 결별하기로 했을 때, 그 심장을 꺼낸 칼. 이 잔혹한 의식을 통해 하나의 존재가 두 명의 신으로 분열했으니, 이를 분열 예식이라 한다. 붉은 성배 클럽과 엘릴 교단의 고급 의식에 사용 가능.]이것은 아홉 신앙인 붉은 성배와 엘릴을 탄생시킨 단검이었다.
천사가 기적을 내린 물건도 가치를 따지기 힘든데, 신과 직접 관련된 성물이라면 교단이 직접 관리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심지어 그런 성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성배기사 같은 클래스도 있지…….’
성배기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검을 발견한다면 눈이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 단검은 무기로서는 가치가 없었다. 단순히 의식용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의식에서 이 단검의 진가가 발휘된다. 강대한 기적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제물이나 기나긴 기도, 약품, 시간, 상황 등등.
하지만 이 칼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많은 조건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
‘이게 지금 대체 왜 여기에?’
아이작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헤인켈은 단순히 불사교단을 데려다주기만 한 게 아니라 의식을 수행하는 것을 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서둘러 단검을 숨겼다.
이걸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온갖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특히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눈이 돌아가서 행방을 쫓을 것이 분명했다.
어마어마한 말썽이 일어날 가능성을 품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무섭다고 대박의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담겼다.
‘헤인켈, 너…… 정말 아낌없이 주는 녀석이었구나.’
아이작은 헤인켈 굴마르가 내세에서 붉은 성배의 천국에서 잘 지내길 기원했다. 피를 몽땅 빼앗기고도 천국에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계곡 너머에서 해가 뜨는 것이 보였다. 스며들어 오는 아침 햇살이 손등에 닿았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햇살이었다.
***
“게벨 님,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더…….”
게벨은 신음을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헤인켈의 공격에는 깊은 저주가 서려 있었는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표정은 창백했고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지만 이솔데는 그를 멈추지 않고 끌고 갔다.
자길 일단 버리고 먼저 나가서 성기사단에게 구조 요청을 먼저 하라고 말했다가 뒤통수를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간 것이 새벽의 일이다. 게벨도 이제는 더 이상 이솔데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때 이솔데가 문득 멈춰 섰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계곡을 울리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이내 계곡 모퉁이를 돌며 백색의 갑옷을 입은 성기사단의 말들이 자갈을 밟아 부수며 달려왔다.
선두에는 이솔데가 익히 아는 성기사가 머리통만큼이나 큰 망치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로튼해머 단장님!”
“로튼해머?”
게벨은 놀라서 중얼거리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만나선 곤란한 사람이었다.
로튼해머는 이솔데와 게벨을 발견하고 황급히 성기사단을 멈춰 세웠다. 당장은 선발대만 온 건지 성기사는 다섯 명뿐이었지만, 전원 중무장 상태에 온갖 기적과 가호로 무장하고 있었다. 로튼해머가 투구를 벗어 올리자 회색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중노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이단심문관님, 부관! 부상자를 치료해라.”
게벨의 상태를 보고 상황의 위급함을 안 듯 로튼해머는 인사와 온갖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교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갈까마귀를 보내주시면 즉시 추적하겠습니다.”
“왈라이카의 사냥꾼들이 매복하고 있었어요. 그중에는 굴마르의 공작도 있었습니다.”
왈라이카 사냥꾼이라는 말에 성기사들 사이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로튼해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갈까마귀의 연락을 받았을 때에는 불사 교단이라고 보고를 들어 그에 맞춰 전투준비를 해왔습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뼈뿐인 언데드를 상대하는 것과 무한정 재생하는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솔데도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서둘러 성기사단을 부르지 않았다면 지원이 늦었을 것이다.
“문제가 될까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로튼해머는 투구를 다시 내려쓰며 말했다.
“해가 뜨고 있으니 도망은 빨리 못 치겠군요. 이 지역 일대를 싹 정화한 후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인원은 이게 전부입니까? 낙오된 인원은 없습니까?”
이솔데는 로튼해머의 말에 괴로운 표정을 했다.
“동료 한 명이 뒤에 남아 시간을 벌어주었어요.”
로튼해머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막 해가 뜬 아침. 밤 동안 시간을 벌어 주었다면 동료는 어떻게 되었을지 뻔하다.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미라가 되거나, 붉은 성배의 피에 중독되어 구울이 되었거나.
후자라면 끝을 내는 것은 로튼해머의 손이 될 것이다.
로튼해머는 담담히 말했다.
“영웅적인 청년이었군요.”
“저보다도 어린 청년이었는데…… 차마 말릴 수가 없었어요.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한 실력과 기적까지 발휘할 수 있어서 분명 훌륭한 성기사가 되었을 텐데…….”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작은 한 번도 이솔데 앞에서 기적, 특히 빛의 법전에 관한 기적을 발휘한 적 없었다. 하지만 이솔데의 기억 속에서 아이작은 천사 같은 외모와 검술 실력을 가진 성인으로 미화되고 있었다.
“이런 변방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검술 실력에 역병을 치료한 지혜…… 그리고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정신, 무엇보다 빛의 법전께서 직접 손으로 빚으신 듯한 얼굴을 한밤중에 마주쳤을 때에는 정말 천사가 만든…….”
로튼해머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이솔데는 자신이 헛소리로 성기사단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이작을 추모할 시간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로튼해머는 이솔데의 손짓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곡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단심문관님.”
“예?”
“혹시 그 천사 같다던 영웅이 지금 저기 걸어오는 피투성이 청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왈라이카 사냥꾼들과 헤인켈을 처리하느라 밤까지 샌 덕분에 피곤할 법도 했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멀쩡했다. 흡혈 덕분에 체력 회복의 효율이 훨씬 더 올라간 것 같았다. 덕분에 아이작은 바로 계곡 밖으로 향할 수 있었다.
계곡에서 걸어 나오던 아이작을 맞이한 것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성기사들이었다.
백색의 갑옷에 아침 햇살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성기사들은 빛의 법전의 수호자라 하기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이작은 그런 감상적인 생각에 빠졌지만, 그들이 자신을 지나치고 포위하듯 둘러싸자 감상은 달라졌다.
밤새도록 애써 싸운 보람이 사라지게 하는 호로자식들 같으니.
하지만 아이작은 칼을 뽑아 들거나 덤벼들지 않았다. 그들이 왜 이러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작?”
성기사들이 포위한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늙은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로튼해머 루만이라고하네. 혹시 다쳤나? 상처를 입었다면 치료부터 하면서 이야기하지.”
“제 피가 아닙니다.”
아이작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주었다. 하지만 로튼해머의 표정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럼 미안하지만 몇 가지 확인을 해야 할 것 같군. 이단심문관님을 구하기 위해 밤새도록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유인했다고 들었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혹시 피를 마셨나?”
한밤중 계곡 한가운데서 왈라이카 사냥꾼들, 그것도 공작이 낀 무리에게 쫓긴다? 그것은 현직 성기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로튼해머조차도 기적 없이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아이작이 계곡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왈라이카 사냥꾼들과 한패가 되는 것뿐이다.
‘아니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니오.”
아이작은 이미 쥐를 먹을 때부터 촉수와 자신을 분리할 정도로 뻔뻔했다. 피를 빤 것은 사실이지만 촉수가 한 일이지 그가 한 일은 아니다.
“제가 흡혈귀가 되었다면 이렇게 태양볕 아래 뻔뻔하게 돌아다니겠습니까?”
계곡은 그늘진 곳이 많긴 했지만 햇볕이 드리운 곳이 많았다. 물론 뱀파이어가 아니라 그 피에 중독된 노예, 구울이 된다면 햇볕 속에서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래서 성기사들은 쉽사리 아이작의 말을 믿기 힘든 듯했다.
하지만 로튼해머는 뚫어져라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최대한 초롱초롱 맑은 눈빛을 띠길 바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이내 로튼해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구울이라면 저런 정의에 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아이작은 효과가 조금 과했나 싶었지만 로튼해머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한밤중에 추적을 당하고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다니, 정말 대단하군! 과연 이솔데 아가씨 말대로야. 어린 영웅이 탄생했어.”
‘이솔데 아가씨’라.
브란트 가문과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는 건가? 아이작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튼해머는 다른 성기사들에게 지시했다.
“너희 둘은 이 어린 영웅을 데리고 복귀하게. 밤새 계곡을 헤맸으니 피곤할 거야.”
“예!”
“나는 이제 풀이 죽어있을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추적해 모조리 박살 내고 올 예정이네. 놈들이 밤새 우리 편을 괴롭혔으니 이제 우리가 낮 동안 놈들을 괴롭혀줄 차례다!”
아이작은 이미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아이작이 밤새도록 놈들을 유인하고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업적이다. 거기서 사냥꾼들은 물론 헤인켈 굴마르까지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해 버리면 터무니없는 것을 넘어 기괴한 존재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우리 어린 영웅이 밤새도록 이룬 업적에 대해 듣는 것은 잠시 미뤄야겠군. 이단심문관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서둘러 가서 만나보도록 하게.”
***
“무사할 줄 알았다. 아이작.”
아이작이 제일 먼저 만난 것은 게벨이었다.
게벨은 브리엔트 성기사단 본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략 성기사 10명 정도와 50여 명의 수련생, 그리고 지원병을 끌고 온 것 같았다. 그들 대부분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보다는 수색과 포위망 구성에 나설 것이다.
“몸은 괜찮구요?”
“실력 좋은 사제님이 계셨다.”
저주를 걷어 내자 게벨의 안색은 한층 더 나아 보였다. 하지만 찔린 부위 자체가 워낙에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게벨은 한동안 꼼짝 못 하고 요양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아이작은 붕대로 감싼 게벨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빌어먹을 촉수 같으니.’
누굴 죽이고 찢어발기는 건 기막히게 잘하지만 고치거나 치유하는 것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작이 가진 치유 능력은 그가 가진 특전인 ‘죽은 신의 내장’에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단심문관 계집애는 어디 갔어요? 간호라도 하고 있을 것이지.”
아이작은 이솔데가 자신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감사를 받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지만 괘씸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간단한 회복 기적만 받고 수색대에 포함되어서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인상착의를 알려주러 떠났다. 전투 인원이 한 명이라도 많을수록 좋다고. 나랑 밤새 걸어온 건 마찬가진데 대단하지.”
괘씸한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잘 아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이단심문관이 간호나 하고 있는 것도 재능 낭비였다.
아궁이 짐승을 부르고 어제 아침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걸었으니 지칠 법도 한데, 다시 전투에 나서려 하다니.
물론 그 ‘전투 대상’은 전부 촉수가 맛있게 먹고 없으니 헛고생이었다.
“게벨 씨가 죽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죠.”
“그건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밤새 쫓기고도 살아남은 사람한테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음.”
게벨은 잠시 기침을 토해내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잠시 막사 천장을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작. 확인 삼아 한번 물어보마.”
게벨은 아이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다 죽인 거냐?”
아이작은 잡아떼려고 했다.
하지만 게벨의 말투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냥 떠본다는 투였다. 그래서 아이작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게벨은 다시 말을 이었다.
“굴마르 공작도?”
“…….”
“놀랍군. 대체 어떻게…… 아니지, 아니다. 묻지 않겠다.”
게벨은 입을 꾹 다문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핏줄이 바짝 섰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마라. 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살아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로튼해머 단장과 이단심문관은 지금 텅 빈 계곡을 뒤지고 있겠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널 처음 수도원으로 데려온 날부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칼센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았던 그날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