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20)
320화. 너의 가격은 (5)
“무슨 상황인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아이작은 이미 헤사벨에게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사냥꾼들, 나아가, 하스텔 굴마르를 저지하거나 죽여라.’
잘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못 할 짓을 시킨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같은 신앙, 같은 국민, 같은 혈족이었던 사람을 상대로 싸우라고 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헤사벨이 대답하기도 전에 받아들일 것이란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헤사벨은 빙긋 웃었다.
“어머니는 꼭 제 손으로 죽이고 싶었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작 님.”
스르륵. 그녀의 양손에서 마술처럼 스틸레토 두 자루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날개를 펄럭여 천장에 난 구멍으로 뛰쳐나왔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든 인간사냥꾼들은, 갑자기 나타난 붉은 날개의 미녀를 보고 놀랐다.
헤사벨은 그들이 전열을 정비할 틈도 주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스틸레토를 양옆에 있는 인간사냥꾼의 가슴과 목에 박아넣었다.
상처를 내기 위함이 아니다.
두 스틸레토는 일종의 ‘빨대’이자 ‘주둥이’였다.
헤사벨의 강화된 신체 변이 능력으로 기묘하게 만들어진 이 스틸레토에는 수많은 미세한 구멍과 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사냥꾼의 몸에 박히자마자 빠르게 피를 빨아들여 헤사벨의 몸으로 들여보냈다.
“헤사벨! 헤사벨 굴마르다!”
뒤늦게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인간사냥꾼이 다급히 소리쳤다. 헤사벨은 피를 충분히 빨아들였다고 생각하자마자 스틸레토를 바로 뽑아 다른 인간사냥꾼들을 향해 휘둘렀다.
이 자리에 모인 인간사냥꾼들은 굴마르 공작의 직속 호위이다. 헤사벨을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고, 심지어 그녀를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헤사벨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녀가 유달리 잔인하거나 공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결코 밝혀지지 않을 비공식적인 통계지만, 원래 붉은 성배 클럽에서 인간사냥꾼을 가장 많이 죽이는 자들이 바로 인간사냥꾼들이다. 그리고 살인 역시 친족간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작위 계승 또한 어느 날 갑작스러운 가주의 실종으로 후계자가 물려받는 것이 당연하고, 후계자가 실종되는 일 역시 흔하게 일어난다.
끔찍하다는 말은 그들의 사회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흡혈귀들은 살해당하기 전까지 불멸불사하며 계속 강해지기만 한다. 이런 식의 순환이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왈라이카 사회는 순식간에 고여버린다.
암묵적으로 암살과 음모를 조장하고 부추기는 것은 이런 정체를 막기 위해서다.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살해당할 때 느껴야 할 감정은 배신감이 아닌 뿌듯함이다.
헤사벨 역시 평범한 붉은 성배 신도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작과 함께 여행하는 동안, 단검과 피만이 세상을 굴리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아냈다. 그녀는 인간사냥꾼들을 완전히 끝장내는 대신 무력화할 정도로만 피를 빨아들인 뒤 쓰러뜨렸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움직일 채비를 했다. 헤사벨에게 뒤를 맡기고 자신은 바로 베시아 저택으로 향하면 될 것이다.
쇄애애애액!
“이런 빌어먹을…….”
아이작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어느새 찾아온 수확자의 대낫이 건물의 벽과 지붕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며 아이작을 후려갈겼다.
아이작은 몸이 붕 떠서 순식간에 건물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 빈틈을 노리고 인간사냥꾼들이 공격을 재개하려 했다.
그때 헤사벨이 날카롭게 외쳤다.
“멈춰라!”
***
현재 헤사벨은 인간사냥꾼들에게 어떠한 명령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찌 됐든 굴마르 가의 후계자로 지명받았으며 무희의 피가 일부나마 흐르는 자다. 인간사냥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사이 아이작은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졌다.
헤사벨은 아직 자신의 명령이 통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그쳤다.
“너희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감히 내게 칼을 들이대는 거냐?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인간사냥꾼들은 자신의 몸이 하스텔이 할 수 있는 것처럼 ‘통제’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단 한 인간사냥꾼이 침착하게 헤사벨에게 말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많이 노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돌아가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인제 와서 왜?”
“정녕 붉은 성배를 배신하실 생각이십니까? 가주님이 돌아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애타게 호소하는 척하지만 이미 그들은 헤사벨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말은 헤사벨을 꼬드긴 다음 빈틈을 만들어 죽이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헤사벨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그들의 뱃속에 담겨서 귀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헤사벨은 오히려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붉은 성배를 배신했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지껄이는군.”
헤사벨은 등허리로 손을 뻗었다. 인간사냥꾼들은 그녀가 새로운 무기를 뽑아내는 줄 알고 긴장했으나, 헤사벨이 꺼내 든 것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멍청한 놈. 태양을 보고서야 눈이 지져지는 것을 알겠구나.”
헤사벨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분열예식이었다.
무희가 엘릴의 심장을 꺼낸 단검. 붉은 성배 클럽에서도 최상위 성물로 다뤄지는 성물이 눈앞에 드러나자 인간사냥꾼들은 혼란을 느꼈다.
헤사벨은 분열예식을 회수하라고 파견되었다. 하지만 회수에 실패하고, 오히려 성배기사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녀를 제거하고 더럽혀진 ‘피’를 회수하는 것이 인간사냥꾼들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헤사벨은 분열예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복귀하지 않으시고…….”
“정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헤사벨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오만한 시선으로 인간사냥꾼을 노려보았다. 순간 인간사냥꾼들은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헤사벨은 명백히 왈라이카 왕국을 떠날 때보다 월등하게 강해졌고, 성물을 회수하는 데도 성공했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천사들의 질책조차 받지 않고 있다.
인간사냥꾼들은 어쩌면 세간에서 떠도는 소리와 진실이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성배기사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신 겁니까?”
“내가 네놈들에게 뭔가를 더 증명해야 하는 건가?”
헤사벨은 분열예식을 다시 허리춤에 찼다.
명확히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긴 했으나, 원래 왈라이카 귀족의 화법이 그렇다. 인간사냥꾼들은 이 놀라운 반전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노예가 된 것은 헤사벨이 아닌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일지도 모른다.
왈라이카의 공녀가 빛의 법전의 성자, 성배기사, 명천사로 점지받은 이를 유혹해 거느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상상일 뿐이다. 이런 추정에 기반해 흔들릴 정도로 인간사냥꾼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은 현재 가주인 하스텔 굴마르니까. 하지만 의심하기에는 헤사벨이 손에 쥐고 있는 분열 예식이라는 증거가 너무 컸다.
즉, 가주가 헤사벨이 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헤사벨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현 가주는 늙고 노쇠했다. 망상증 때문에 집 안에 틀어박힌 지 이미 몇백 년이지. 후계자들을 험지로 내몰고 잡아먹으면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지금의 굴마르 가가 처참한 꼴이 된 것 또한 바로 그 때문 아닌가?”
인간사냥꾼들은 솔직히 굴마르 가의 몰락은 헤인켈 굴마르가 분열 예식을 빼돌리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부러 침묵했다. 그 침묵으로 헤사벨은 그들이 어느 정도 찬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 후계자의 ‘승계’는 어느 정도 내부자들의 합의와 작당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작들이 막강한 친위대의 경호를 받으면서도 살해당하는 것도, 외부자보다 친족간의 살해가 많이 일어나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진실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헤사벨이 과연 굴마르 가의 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인가라는 점이다.
인간사냥꾼은 공손하게 헤사벨에게 물었다.
“가족 간의 문제는 가족끼리 푸는 게 맞겠지요, 아가씨?”
헤사벨은 쾌감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아이작은 기만과 음모의 제왕이다.
단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 이렇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가?
***
헤사벨의 상황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것과 별개로, 아이작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빠져 있었다.
까그가가가각! 텅! 수확자의 대낫이 지형지물에 상관없이 주변 벽과 나무, 장애물들을 마구잡이로 긁고 파괴하며 달려들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수확자의 대낫은 이전에 비해 훨씬 작아진 형태였다. 덕분에 파괴 범위도 상대적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대신 더 빠르고 날카로웠다. 힘이 응축되면서 전략을 바꾼 것 같았다.
‘이건 좀 난감하군.’
차라리 수확자라는 천사가 눈에 보였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낫 든 놈을 공격할 수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무기 혼자 휘적휘적 움직이니 동작을 예측할 수도, 견제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크란 요새에서 그랬던 것처럼 감춰진 제례를 발동해 촉수를 불러들여 파괴할 수는 없다.
변방의 요새와는 달리, 번성한 대도시에서 능력을 쓰는 것은 너무 눈에 띈다.
또한 감춰진 제례가 발동한 동안 아이작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다.
장막 안에서 하는 행동이나 모습을 외부에서 관측하거나 개입하지 못할 뿐이다. 즉, 그 안에 휘말려 든 건물, 사람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다.
터텅! 카훌린이 또 한 번 대낫과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전처럼 부딪칠 때마다 나풀나풀 튕겨 나가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카훌린이 변질된 덕분인가?’
죽은 자에게는 영체 타격 효과. 이게 수확자의 공격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확자의 대낫과 같은 속성을 품게 되어서 그런 걸지도.
쿵, 촤아아악. 아이작이 또 한 번 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밀려났을 때, 낯선 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파도 소리였다. 어느새 남쪽 항구에 도착한 것이다.
이대로 해안을 마주하고 있는 베시아 저택까지 달려가면 레오노라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등 뒤에 춤추는 대낫을 달고 레오노라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아이작의 의문을 해결해주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누구냐! 이게 무슨 소란이야!”
화려한 갑옷을 입은 한 무리의 병사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중심엔 다름 아닌 레오노라가 있었다.
오드리프 곳곳에서 일어난 소란은 당연하게도 베시아 저택까지 빠르게 전달되었다. 가장 민첩하게 움직인 것은 이미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레오노라였다. 그녀는 곧바로 저택의 병력을 움직여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도착했다.
“아이작?”
레오노라는 한밤중, 그것도 제법 거리가 있었음에도 바로 아이작을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아이작을 휘감은 황금의 기세는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이전과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당신 대체 뭘 달고 온…….”
아이작은 레오노라에게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수확자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끼아아아악! 수확자의 대낫이 밤하늘을 찢어놓을 듯한 귀곡성을 내지르며 아이작을 향해 대낫을 휘둘렀다. 그 끔찍한 소음에 병사들조차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오직 한 명, 레오노라만이 불경한 저주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염소가 새겨진 하얀 동전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금속이 아니었다. 백골을 가공해 만든 동전이었으며, 빛의 법전 영토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될 섭리에 어긋나는 힘을 담은 성물이기도 했다.
수확자가 다시 아이작을 향해 대낫을 휘두르려던 순간, 레오노라는 손에 쥐고 있던 백골 동전을 허공으로 튕겼다.
“오늘은 아니야.”
그 순간 마치 허공에서 누가 채가기라도 한 것처럼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과 수확자가 동시에 사라졌다. 다시 한번 회피할 채비를 하고 있던 아이작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경악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
‘죽음 유예? 그 귀한 걸 나한테 썼다고?’
죽음의 원인이 되는 존재를 짧게는 반나절에서 길게는 하루 동안 제거할 수 있는 ‘죽음 유예’ 성물. 다른 신앙이 아닌 오직 불사 교단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성물이었다.
육신은 부정한 것이니 빨리 죽어서 백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불사 교단에게 이율배반적인 기적이기도 한 탓에 발행량도 많지 않았다.
불사 교단과의 거래도 서슴지 않는 황금 우상 상단이 이 성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귀한 성물을 얻으려면 황금 우상 상단도 상당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레오노라는 자신의 목숨을 위기에서 구해줄 최후의 비상 수단을 망설임 없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레오노라는 조금도 아깝다거나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이 말은 레오노라도, 아이작이 한 말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 떨어지듯 하스텔이 레오노라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