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23)
화. 너의 가격은 (8)
‘진홍의 무덤’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하스텔은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붉은 성배라는 존재의 시작이자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였다.
붉은 성배, 즉 엘릴의 심장에서 흘러나왔던 피가 언젠가 다시 회수되고, 그 심장을 삼킨 자가 마침내 새로운 신이 된다는.
불경스럽게 짝이 없는 이야기였으나, 정작 이 예언을 남긴 이가 바로 무희였다.
붉은 성배에서 흘러나온 피란 곧 왈라이카 귀족들을 불사의 흡혈귀로 만들어 낸 그 피를 말한다. 그 피가 회수된다는 뜻은 모든 왈라이카 귀족들이 다 죽는다는 의미다. 넓은 의미에서 천사 또한 예외가 없다.
그것을 이뤄내려면 무수한 시체와 피가 흐를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 예언에 붙은 불길한 호칭이 ‘진홍의 무덤’이다.
일종의 붉은 성배 클럽의 종말론적 예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거냐?”
헤사벨은 미소 지었다.
“늙은이들은 겁이 너무 많아요. 저는 그 예언이 너무 과장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는 단순히 ‘세 공작가의 통합’정도가 아닐까요.”
“……공작가의 통합?”
“로어노크, 에레, 굴마르. 이 세 공작가가 왈라이카 왕국을 통치하고 왕위를 결정하죠. 하지만 제일 강한 로어노크 혈통이 거의 항상 왕위를 차지하고, 에레는 풍족한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굴마르 공작가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물론 강한 피를 가지고 있지만, 두 공작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 사실에 대한 열등감이 하스텔을 성채 안으로 몰아넣었을 거라고, 헤사벨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 우리가 그 두 가문을 이길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같은 신앙의 신도들끼리 승패가 뭐가 중요하냐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무희의 입에서 진홍의 무덤이 예언된 이상, 누군가가 모든 혈통을 잡아먹고 통합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 가문 중 어떤 가문도 잡아먹는 입장이 될지언정 잡아먹히는 입장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예언이 알려진 그 순간부터 공작들은 암암리에 서로를 견제하고 암살하고 음모에 빠뜨리고 있었다.
초창기 비등했던 세 가문에 점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 결과였다.
“어머니도 이 구도를 역전시켜 보려고 애쓰고 계셨잖아요? 분열예식을 이용해서 불사 교단과 협력하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죠?”
하스텔의 형제, 헤인켈 굴마르가 분열예식을 들고 나간 것도 불사 교단과의 협력을 통해 어떻게든 역전의 기회를 노려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등장으로 오히려 분열예식을 잃어버린다는 끔찍한 결과로 돌아왔지만.
“그래서 네가 꾸미고 있는 게 뭐냐? 성배기사를 왈라이카로 불러들여 다른 공작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스텔의 말에 헤사벨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하스텔에게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물어뜯을 수 있는 거리였으나 헤사벨은 거리낌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세요. 어머니?”
하스텔은 헤사벨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보랏빛 파도를 보았다.
그것은 흡혈귀들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진득한 피비린내를 품고 있었다.
“가장 음험한 기만자께서 행하실 위대한 암살에 대해 알려드리죠.”
***
아이작은 오래된 등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계승이든 뭐든 아이작이 알 바는 아니다. 애초에 계승이 외부인이 개입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스텔 굴마르를 죽인 다음 헤사벨이 그 피를 다 먹어 치우면 그걸로 계승은 끝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인간사냥꾼들이 있다. 그것도 친위대급의. 아이작이 개입하는 순간 그들도 계승 의식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헤사벨과 하스텔끼리 싸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니까.
그렇게 되면 인질로 잡힌 레오노라가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물론 헤사벨이 도움을 요청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도 아이작이 개입하지 않는 것에 한몫했다. 헤사벨은 자신감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일로 또 한 번 헤사벨이 성장할 수 있다면…… 나도 기회를 줘야겠지.’
헤사벨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붉은 성배의 승리 조건에 언급된 존재가 정말 헤사벨이라면.
“음?”
그때 등대 안쪽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등대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레오노라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 납치당할 때 목이 긁힌 상처 외에는 다른 부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등대의 침묵과 인질의 해방.
승부가 결정난 듯한 모습에 인간사냥꾼들이 동요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헤사벨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느끼고,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휴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작 역시도.
“저를 구하러 와주셨군요, 성배기사님?”
“……딱히 내가 구하러 오지 않았어도 풀려났을 것 같은 모습이군.”
“왈라이카 사람들만큼 욕망이 선명한 이도 없지요. 욕망이 뚜렷하다면 어떻게 움직일지 알기도 쉬운 법이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붉은 성배 신도들이 음험하고 속 모를 존재는 아니랍니다.”
‘그야 너에 비하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나 다름없겠지.’
아이작은 순진함이 상대적인 가치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돌고 돌아 결국 이렇게 다시 그녀와 마주했다.
아이작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원래 아이작은 안젤라를 보호하고 황금 우상 상단에서 레오노라를 배제하기 위해 이곳까지 쳐들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레오노라의 도움을 얻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고, 설상가상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아이작은 대체 레오노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 행동 원리로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욕망이 선명하다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있다고?’
그렇다면 레오노라의 욕망은 무엇일까. 아이작은 그것을 알아보고자 했다.
해야 할 질문이 많았지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제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왜 나를 수확자로부터 구해줬지?”
먼저 죽음유예로 수확자를 아이작으로부터 분리한 것. 이 점이 가장 이해 안 되는 부분이었다. 레오노라는 아이작을 제거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자신을 도와준단 말인가?
“그따위 것에게 성배기사님이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단지……”
레오노라는 비스듬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방해받는 게 싫어서?”
“방해받는 게 싫었다고?”
“성배기사님이 저를 찾아 이 먼 길을 와주셨는데 저주 따위가 방해하면 신경 쓰이니까요. 그 뿐입니다. 하지만 성배기사님이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니 기분 좋군요.”
레오노라는 싱긋 웃으며 아이작을 손가락으로 툭 짚었다.
“뭐, 그건 아이작님의 부하가 저를 구해준 걸로 갚은 셈 치지요. 인간사냥꾼들을 끌어들인 건 애초에 저희 쪽이니까.”
“……그래. 애초에 안젤라 때문에 나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나? 수확자를 내버려 두었으면 더 쉬웠을 텐데. 네가 고용한 어쭙잖은 용병들이나 암살자들보다 수확자 하나가 더 위협적이었다.”
“성배기사님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레오노라는 수줍은 듯 말했다.
“단지 성배기사님이 제 도움을 필요로 했으면 했죠.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제게 손 벌리고 도움을 요청하게 만들려고 했지요.”
아이작은 더더욱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즉, 레오노라의 말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깡패를 고용해서 여자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다음, 자신이 멋지게 나타나 구해주기’의 재벌가 버전이었다. 그녀가 고용한 귀족, 기사, 산적, 용병, 오크들, 암살자들의 수를 생각하면, 아이작이 아니었다면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레오노라의 욕망을 이해했다. 그녀는 아이작을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오롯이 홀로 걸어갈 수 있는 존재는 아쉬울 게 없으니까.
즉, 레오노라는 아이작에게 욕망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 그 욕망의 해결사가 자신이 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그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래서,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찾아오셨을까?”
“……부탁할 게 있다.”
아이작은 한심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입을 열었다. 돌고 돌아서 레오노라의 의도대로 된 셈이지만 수확자의 세금을 지불하려면 레오노라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작이 레오노라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 ‘자본이 낳은 괴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지 도무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란다면,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레오노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이작이 레오노라를 본 이래 이렇게 환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아이작이 천금이라도 지불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입 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탁이라~ 성배기사님께서 제게 무엇을 부탁하려고 오셨을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주도권이다.
주도권을 주는 척하지만, 사실 그녀가 쥐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허상으로 레오노라가 만족한다면 얼마든지 행세해 줄 수 있다.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양보해 줄 생각 없으니까.
누가 뭐라고 떠들든 주도권은 항상 칼자루를 쥔 쪽이 가지게 된다.
아이작은 위기에 처한 가녀린 성배기사를 연기했다.
“불사 교단이 건 저주를 해제하려면 내게 걸린 세금이 뭔지 알아야 한다. 뭔지 알겠나? 샬록은 사람이라고 하던데.”
아이작의 말에 레오노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샬록이 사람이라는 힌트를 주었으니, 레오노라는 좀 더 강화된 힌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
이내 레오노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 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제가 지불할 수 있는 세금이군요.”
“……네가 지불할 수 있다고? 뭐길래?”
“그건 당장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다만 아이작님께 합당한 가치라는 것만 말씀드리죠. 불사 교단이 영악한 수를 쓰긴 했지만 아이작님이 걸린 저주,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하니까요.”
레오노라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 해도 성배기사님은 지불하실 수 없습니다. 저만이 지불 할 수 있지요.”
아이작은 눈살을 찡그렸다.
그렇게 주도권을 쥐고 싶은 건가?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것만이 그녀의 욕망인가? 그게 대체 무슨 이득이 되기에?
아이작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보랏빛 눈으로 레오노라를 응시했다.
혼돈의 눈이 레오노라의 내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오노라는 아이작이 바라는 대답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세금의 정체 대신, 오로지 아이작에 대한 생각만을 골몰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세상을 움켜쥘 수 있는 자다.’
레오노라는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씁쓸함을 품은 채 생각했다.
‘결국 내 손을 벗어나겠지. 하지만 이 성배기사의 마음에 더 깊은 흔적을 남겨야 내가 더 오래 머물 수 있어.’
***
아이작이 레오노라와의 협상을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사이, 헤사벨과 하스텔의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둘 중 아무도 이렇게 마무리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헤사벨과 하스텔, 모두 납득할 수 있는 합의에 도달했다.
“모두 복귀하라.”
헤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인간사냥꾼들은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판단하고 등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것은 가주와 후계자가 사이좋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계승’이 시작된 이후 가주와 후계자가 함께 걸어 나온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인간사냥꾼들은 경악하여 얼어붙었다. 하지만 계승으로 인한 트러블을 이유로 친위대가 처벌받는 일은 없었다.
“……헤사벨의 오랜 방랑으로 인한 ‘훈계’는 이걸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훈계’라니? 인간사냥꾼들은 하스텔이 이 사태를 적당히 덮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헤사벨이 그걸 납득했단 말인가?
이미 이빨을 드러낸 이상 나중에 하스텔은 언제든 그녀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왈라이카에서 화해란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헤사벨은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하스텔은 전보다 초췌하고 피곤한 얼굴로 손에 든 단검을 들어올렸다.
분열예식이었다.
“……분열예식은 회수했다. 이걸로 세 성물 중 하나가 온전히 왈라이카로 돌아왔으니, 나도 돌아가 무희께 용서를 구하겠다.”
둘은 거래를 한 것이다.
헤사벨은 하스텔에게 분열예식을 돌려주는 대신, 하스텔이 가진 ‘성배의 피’를 상당량을 양보 받았다. 덕분에 하스텔은 상당히 쇠약해졌으나, 분열예식도 회수 못 하고 복귀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품은 염원을 이뤄내려면 헤사벨에게 협력해야만 했다.
“헤사벨은 주어진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도록.”
“알겠습니다.”
헤사벨은 쇠약해진 하스텔을 보면서 지금이라면 그녀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하스텔을 포섭한 지금, 그녀가 살아있는 쪽이 헤사벨에게 더 이득이다.
헤사벨은 당장 왈라이카 왕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하스텔은 분열예식을 들고 돌아가 반역을 위한 밑바탕을 준비할 것이다.
그때까지 헤사벨은 아이작과 함께였다.
“복귀한다.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군.”
하스텔은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