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24)
324화. 너의 가격은 (9)
[붉은 성배 클럽에 ‘분열예식’ 성물을 반납하였습니다.] [무희가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합니다.] [재생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신체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아이작은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에 고개를 돌렸다.
‘분열예식 반납이라. 헤사벨이 플랜B를 선택한 모양이군.’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플랜A는 당연히 헤사벨이 하스텔을 잡아먹는 것이었으나, 여의치 않다면 분열예식으로 꼬드기라고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분열예식은 어차피 반납할 예정이었으니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분열예식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성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헤사벨 또한 합당한 것을 얻어냈다. 당장 공작의 자리를 노려도 이상하지 않은 양의 ‘붉은 성배의 피’를.
그리고 아이작도 적지 않은 이득을 얻었다.
[무희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붉은 탄원’이 강화됩니다.] [이제 ‘붉은 탄원’을 이용해 상대를 포식할 수 있습니다.]아이작은 과거 헤인켈 굴마르가 거느리고 있던 인간사냥꾼을 피안개로 녹여 버린 다음 피를 빨아들이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점점 인간 같지 않은 능력만 생기는군.’
하지만 아이작은 붉은 성배가 자신에게 기적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줬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금까지는 성물을 반납하면 신체적, 정신적, 신앙적 강화효과만 부여되었다. 가끔은 성물에 축복을 베풀기도 했고.
하지만 기적을 허락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기적은 오직 신도들에게만 내리는 것이었으니까.
‘나를 협력자로 인정하고 고난과 보상을 함께 내리겠다고 했었지? 이것도 그 일환인가?’
아이작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붉은 탄원은 그 자체로도 좋은 기적이고, 붉은 탄원을 이용한 포식이 얼마나 강력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인은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했으니까.
아이작과 레오노라는 파도치는 부둣가 앞에 서 있었다.
이제 곧 일출. 벌써 바다 저 편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곧 죽음유예가 끝날 겁니다. 수확자를 오래 붙잡아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수확자가 풀려나면 레오노라가 세금을 지불할 것이다. 아이작은 아직도 레오노라가 어떻게 자신의 세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은 할 수 없고, 레오노라만이 할 수 있다니.
하지만 여전히 레오노라는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저주는 강력하지만 만능은 아니지요. 그렇게 만능이라면 다른 교단의 상층부는 모조리 머리가 날아갔을 테니.”
“그렇겠지.”
아이작도 저주의 한계는 잘 안다. 불사 교단에 명백한 해를 끼쳤을 것, 오직 대상을 죽인다는 판단 외에는 못한다는 것, 죽음을 대체할 세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한계도 있다.
“그리고 수확자가 ‘수확’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대상은 애초에 저주로 성립하지 못하지. 그래서 강력한 천사나 신으로부터 비호 받는 존재는 저주가 발동하지도 않고.”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도 뭐한, 단순히 힘 대 힘의 문제다. 수확자가 아무리 강력하다한들 이름 높은 명천사들보다 강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아이작도 강력한 신의 비호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 힘이 세상에 드러나는 한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레오노라는 거기에 새로운 단점을 설명했다.
“세금은 대상이 지불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어야 해요. 동시에 대상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을 지정할 수는 없지요. 죽음은 공정한 것이라야 하니까.”
이것 역시 새로운 단점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한 이야기였다. 세금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은 세상 만물에 공정하게 대가가 찾아간다는 믿음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 근본 교리를 어긋나게 만들 수는 없다.
아이작은 자신이 지불할 수 있으면서 자신보다는 가치가 낮은 것이 뭔지 생각했다. 동시에 샬록은 그것은 사람이라고 했고, 레오노라는 아이작이 지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불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조건과 레오노라의 말이 맞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아이작이 세금의 정체를 알더라도 지불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세금의 정체가 뭐지?”
바닷바람이 거칠게 나부끼면서 레오노라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때 해가 떠오르면서 햇빛이 그녀를 뒤덮었다. 강렬한 역광에 아이작은 레오노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제 슬슬 거래 이야기를 해볼까요, 성배기사님?”
***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수확자의 저주를 걷어내는 대가가 공짜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목숨이 저당 잡혔다고 일방적으로 휘둘려 줄 생각도 없었다.
“대가가 뭐지? 참고로 말하지만, 안젤라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
“……저는 성배기사님이 제게 손을 벌리고, 의지하며, 목숨을 건 부탁을 해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레오노라는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 거래가 끝나고 나면 이제 우리들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겠지요? 성배기사님은 저에 대한 존재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해 버릴지도 모르지요.”
“……대가가 뭔지나 말해.”
레오노라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
아이작은 짧은 침묵 끝에 간신히 어색한 단어 몇 마디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나 유부남인데.”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그따위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제가 그런 것을 바랄 천박한 여자처럼 보이나요? 사랑과 애정을 갈구하면서 남자 발아래 엎드리는 여자?”
레오노라는 몸을 돌리더니 성큼 다가왔다. 레오노라의 모습이 빠르게 커지면서 그녀의 눈동자가 보일만큼 가까워졌다.
빠득, 빠드득. 그때 허공에서 뭔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작은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부서지는 공간과 그 틈새로 비집고 나오는 창백한 대낫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레오노라는 그딴 것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아이작을 향해 쏘아붙였다.
“연인? 부부? 그런 착각과 혼란, 오해로 이루어진 얄팍한 관계로 우리를 규정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끈끈하고 강력한 관계가 되어야 하니까.”
기어코 수확자의 대낫이 보이지 않는 구속을 꿰뚫고 드러나기 시작하자 아이작이 윽박질렀다.
“대체 뭘 원하는 건데?!”
“동업자!”
동시에 레오노라도 마주 외쳤다. 그녀의 눈이 강렬한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상을 건 사업의 동업자! 저는 그걸 원해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움켜쥐세요. 저는 그걸 도울 테니. 대신 저는 동업자의 지위를 원해요.”
아이작은 레오노라의 말에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느꼈다.
동업자라니?
하지만 아이작은 그제야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이작 개인이 아닌, 아이작의 가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오노라는 사실 아이작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가 뭘 먹고 뭘 좋아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아이작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이뤄 낼 수 있는가. 그리고 자신은 그런 아이작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파악하고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어떻게 승리를 쟁취할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레오노라의 관심사였다.
오직 아이작만이 그녀의 야망을 이뤄줄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아이작이 약해지고 가치를 상실한다면 그녀는 아이작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가치가 있는 한, 배신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레오노라의 말마따나, 그런 관계를 연인관계 따위로 규정할 수 없다.
그녀는 불타는 눈으로 아이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그 손을 마주잡았다.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레오노라는 하얗게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완전히 구속에서 벗어난 수확자의 대낫이 아침 햇살 속에 섬뜩하게 빛나며 아이작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동선에는 레오노라가 정확히 끼어 있었다.
레오노라는 힐긋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금의 정체가 뭔지 물으셨지요. 성배기사님?”
레오노라는 날아드는 대낫을 향해 성큼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정답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이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음의 저주를 피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해야 한다는, 지극히 전통적이면서 악의적인 세금이었다.
살아남는다 치더라도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테니.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혼란이 일었다.
‘그러면 그걸 레오노라가 어떻게 지불한다는 거지?’
아이작은 설마 하는 생각을 한 순간,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수확자의 대낫이 레오노라를 휩쓸고 있었다. 강렬한 돌풍이 부둣가를 뒤집어 놓았다. 돛대가 거칠게 펄럭이는 와중에 아이작은 뛰지도 걷지도 않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멈춰 서 있었다.
레오노라의 코앞에서 멈춘 수확자의 대낫처럼.
레오노라는 건물이건 인간이건 가리지 않고 숭덩숭덩 썰어대던 수확자의 대낫 앞에서 전혀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수확자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불사황제 베셰크와 맺은 보험 계약 특별구약 4조 6항 확인 부탁드립니다.”
수확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멈춘 대낫이 다시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았다. 레오노라는 팔짱을 낀 채 수확자의 응답을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음산한 대답이 들려왔다.
[보험가입자 레오노라 베시아. 특별규약 4조 6항에 따라 영혼에 관한 면세특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확자의 청구권은 즉시 효력 정지됩니다.]“감사합니다.”
둘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등을 돌렸다. 수확자는 그대로 햇볕 속에서 먼지가 되어 흩날렸고, 레오노라는 태연하게 등을 돌려 아이작을 향해 다가왔다.
아이작은 기가 막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망보험 계약자였나?”
“그거 가입 안하면 불사 교단이랑 거래 못해요. 그리고 불사 황제와 맺은 특별계약 때문에 제가 자연사하기 전까지는 불사 교단은 저를 죽일 수 없죠. 일종의 면세특권이랄까?”
아이작은 새삼스레 세상의 질서 하나를 새롭게 또 깨달았다.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단, 부자는 제외하고.
***
아이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금’이라고 했음에도 어떻게 레오노라가 자신의 세금이 될 수 있나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레오노라를 바라보는 감정은 혐오 10%, 혼란 20%, 공포 40%정도의 비율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30%는 일단은 고마움이었다.
정답은 간단했다.
“아, 그야 ‘아이작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작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레오노라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지요.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다르듯이. 하지만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겠지요.”
레오노라가 지나치게 우쭐대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가 그걸 해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에게는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돈이 많으면 목숨도 살 수 있군.’
굴마르 공작도 꼬시고 불사 황제도 꼬시다니.
황금우상 상단이 백제국 쪽에 더 돈을 많이 뿌리는 것을 생각하면 빛의 법전 교단의 보호도 받고 있을 것이다. 그걸 따지면 사실 레오노라야 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긴, 황금우상 상단의 장점이 그거지. 성기사도 사제도 없는 대신 다른 신앙을 용병처럼 부려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정점에 속한 레오노라가 ‘돈의 권능’을 과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 베시아 가문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 그런 보호를 받고 있을 것이다.
만약 부자인데도 세금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건 그렇고, 차 좀 드시죠? 바다 건너 온 비싼 찻잎인데.”
“음.”
아이작은 입에도 대지 못한 찻잔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베시아 저택. 바로 그가 일으킨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첫 번째 목적지였다.
원래 벨만 베시아를 압박해서 레오노라를 누르려고 했는데 모양이 이상하게 되었다.
아이작이 겨우 차 한 모금을 마셨을 때, 접객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인상의 회백색 수염을 가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 우상 상단의 상단주, 대륙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가진 자.
벨만 베시아였다.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지만, 벨만은 냉혹한 시선으로 들어오자마자 아이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렇게 날카로운 분위기였나?’
아이작이 게임 속에서 보고 이야기 나눴던 벨만은 좀 더 친근하고 상냥한 캐릭터였다. 최소한 겉모습만이라도 그러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게 거래 상대를 방심시키기 좋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당장이라도 아이작을 칼로 찌를 것 같은 살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작이 예의바르게 인사하려던 순간, 벨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딸을 꼬신 그 유부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