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27)
327화. 갈까마귀가 우는 소리 (3)
이단심문관이 처형인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는 사료 조사와 교리해석, 종교 재판의 검사 역할 정도가 이단심문관 역할이었다. 말 그대로 교리 왜곡을 하는 사이비나 이단 신도, 혹은 다른 신앙에 감화된 이교도를 가려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리히트 조약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빛의 법전 교단은 고고한 시선을 낮추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많은 권력과 권위를 일반인에게 내어 준 그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역시 신앙뿐이었다.
그리고 이단심문관은 효과적인 칼이 되었다.
교단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 이단심문관은 그 결정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자는 이단이 된다.
먼저 문제를 만들고, 그걸 증명하는 게 이단심문관의 역할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조직이 으레 그러하듯, 이단심문관은 교단 내부에 관한 일이라면 즉결처분조차 가능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었다.
솔트나 컬베인은 서른 살에 이단심문청의 청장이 될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 그가 유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원한 사기 쉬운 이단심문관의 짧은 수명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님, 이렇게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솔트나를 만난 곳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막사 근처였다. 문제가 터지더라도 즉시 달려와 줄 아군이 있는 곳이지만, 이단심문관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전투가 생기기 전에 우는 까마귀 같은 존재다. 문제는 그들이 왔다 간 다음에 생긴다.
아이작은 애써 미소 지으며 솔트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번쩍거리는 맑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솔트나 컬베인…… 이 발암 캐릭터를 결국 만나게 되는군.’
아이작은 당연히 솔트나 컬베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빛의 법전에서 플레이할 때 번번이 아군의 발목을 잡는 의심병자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적대적 신앙인 흑제국 팩션에서 플레이할 때보다 더 많이 마주치게 될까.
아이작이 이단심문관에 대해 가진 부정적 이미지 90%는 이놈에게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솔데를 처음 봤을 때에도 죽일까 말까 고민했으니.
“이단을 심판하는 망치를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협조할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협조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아이작은 별로 긴장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차피 아이작을 문제 삼으려면 천사 단위에서 문제 삼아야 한다.
‘나는 오월의 검하고도 협동 작전을 했다. 그런데 네가 뭘 어쩔 건데?’
천사가 아이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면 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문제로 삼는다면? 아이작은 온갖 인맥을 다 끌어들여서 저항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아직 빛의 법전 교단에 쓸모 있는 존재였다.
아이작 없이는 여명군 원정부터가 성공하기 어려울 테니까.
솔트나는 아이작의 당당한 태도에 빙긋 미소 지었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대단한 용맹에 대해서 익히 들었습니다. 이사크레아 경의 위용은 듣던 것만큼 훌륭하군요.”
“아, 예, 뭐,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나 의심했다. 그러나 솔트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제 방문이 껄끄러우신 것 압니다. 저희를 반기는 자들은 어디에도 없지요. 그러니 빠르게 용건만 마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솔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준비해 온 상자를 아이작 앞에 내밀었다. 단단히 봉인된 밀랍을 뜯어내자, 그 안에서 황금빛 종이를 둘둘 만 서한이 나타났다. 아이작은 교황의 인장이 박힌 칙서라는 것을 알고 무릎 꿇은 채 받아 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솔트나는 서한을 읽는 대신 꺼내든 채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유서 깊은 수도원이 있지요.”
“……?”
아이작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솔트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 건너 동쪽을 응시했다. 이곳에서도 작은 바위섬처럼 보이는 작은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작은 저기가 어딘가 하다가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다.
“성 밀리샤르 수도원. 칼센 밀터가 자란 수도원이 저곳이라고 하더군요.”
아이작이 밀리샤르 수도원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저곳이 폐허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칼센은 기사단원들을 전부 불사 교단에 헌납했고, 자신은 배교했다. 여기서는 아이작에게 잡아먹혔지만, 게임상으로는 불사 교단의 데스나이트가 되었다.
기사단이 떠나고, 빛의 법전도, 불사 교단도 취급하기 난감해진 수도원은 그냥 해상에 버려졌다. 그리고 파도와 해풍을 맞으며 빠르게 삭아갔다.
‘여기서 밀리샤르 수도원이 왜?’
아이작은 미심쩍게 바라보면서도 물었다.
“배교자 칼센 밀터의 수도원이라니, 그렇게 불경한 장소가 있는 줄 몰랐군요. 가까이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바람과 유령만 울부짖는 폐허라고 들었으니까요.”
솔트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크레아 경도 칼센 밀터와 행보가 비슷한 것 같군요. 용맹하고 훌륭한 성기사, 젊은 나이에 업적을 세워 성자가 되었고, 작명을 고지받았으며, 강력한 무장 세력을 거느린 청년.”
“……과찬이십니다.”
아이작은 슬슬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 무릎 꿇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서한을 먼저 꺼낸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저 수도원에서 황금사자 성기사단의 단장, 데라 헤만과 칼센 밀터가 맞붙은 적 있다고 하지요. 과연 누가 이겼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사실 잘 알고 있었지만 아이작은 잘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결과가 공식적으로는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라 헤만과 칼센 밀터, 둘 다 빛의 법전에서 최강의 순위를 놓고 다투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관심을 끌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승부 결과는 극비로 지정되었다.
“그렇습니까? 흠,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이사크레아 경은 칼센 밀터와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만약 이사크레아 경이 데라 헤만과 맞서게 된다면 결과가 어떨 것 같습니까?”
‘데라 헤만은 몰라도 네 놈 뺨을 후려갈기는 거라면 땡기는데.’
솔직히 지금의 아이작이라면 뒷감당도 충분히 할 자신이 있었다. 한순간의 화풀이로 교단에 정치적 빚을 지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지.
“저는 아직 부족한 일개 신자일 뿐입니다. 교단 제일의 성기사와 맞붙으라니요.”
아이작은 가증스럽게 겸손을 떨었다. 겸손에는 비용이 들지 않으니까.
솔트나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는 몰라도 얼추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았다. 그는 미소 지으면서 서한을 뜯어 펼쳤다.
아이작은 다시 예의를 갖춰 귀를 기울였다.
지루한 서두에 아이작은 잠시 멍때렸다. 대충 아이작의 업적을 치하하는 말, 겸손하고 겸양하라는 말, 여명군의 앞날을 걱정하라는 말, 시에로 여명군을 이끌라는 책임을 내릴 테니 교단의 칼이 되라는 말. 대충 그 정도였다.
‘아니, 뭐라고?’
아이작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솔트나가 한 말을 되새겼다. 덕분에 솔트나가 다시 지루한 뒷부분, 아마도 앞으로 기대한다는 말, 빛의 법전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말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시에로 여명군을 이끌라고 하셨습니까?”
솔트나는 서한 낭독이 끊어진 것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탓하지는 않았다.
“그렇습니다. 시에로 사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막중한 직책을 내려놓았습니다. 아이작님께서 여명군의 목소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하여 교황 성하께서는 교단의 칼을 대신할 자로 부활의 성자를 지목하셨습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아이작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교단이 원하는 것이 아이작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들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그 성격이 독특합니다. 제가 이끌지 않으면 세력별로 와해 되거나 제 역량을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대신해서 이끌어 줄 훌륭한 성기사께서 오고 계십니다. 빛의 법전 교단의 축복과 기적으로,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더 강한 칼과 방패를 거느리게 될 것입니다.”
아이작은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교황이 원하는 바는 뻔하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여명군 본대와 너무 성격이 다르다. 아이작의 사병과 이교도들의 연합군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작이라는 머리를 떼어놓고, 이사크레아 여명군에는 이런저런 사병과 사제들, 성기사들을 섞어서 정체성을 흐릴 생각인 것이다.
문제는 아이작이 거부할 명분이 마땅찮다는 점이다. 거부한다면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아이작의 사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고, 승낙한다면 아이작은 오합지졸 잡병인 시에로 여명군을 대신 이끌게 된다.
‘그러고도 성지를 수복할 수 있을 것 같…… 할 수 있겠지. 할 수는. 빌어먹을.’
솔직히 아이작은 그 잡병들을 이끌고도 성지를 수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무수한 경험과 공략법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준비해 온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엄청난 희생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이작은 사제를 보내도 괜찮았을 서한에 굳이 이단심문관을 보낸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아이작을 이미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아마도 지금도 밖에서는 이단심문관들이 병사나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조사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등대지기가 나를 없애기로 한 건 아니다. 그건 분명해. 그럼 이건 쓸데없는 짓을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 정도는 되겠지만…… 어쩐다.’
아이작이 순수하게 빛의 법전의 승리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교황에게 싹싹 빌어서 지금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핵심 전력만 쏙 빼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동맹을 설득하는 것도 일이고, 아마도 남은 이사크레아 여명군 대다수는 사지로 내몰리거나 고기방패 정도로 쓰일 것이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솔트나가 대답을 채근하듯 물었다.
“대답?”
아이작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아이작은 자기 사람들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이걸 이제 어떻게 거절해야 상대가 순순히 받아들일지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에게 자꾸 대답을 채근하는 저 유리알 눈동자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거절할 거라면 이 자식한테 겸손할 필요가 없겠군.’
빡! 다음 순간 아이작은 솔트나의 뺨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
우당탕! 솔트나는 별다른 무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행동에 반응을 못한 건지 몰라도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이솔데가 제법 잘 싸우던 것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아이작은 멈추지 않고 그가 일어서기 전에 발로 한 번 더 걷어찼다. 이럴 때는 상대가 고위 성직자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잘못 때렸다가 죽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 아니, 잠깐, 컥, 자, 잠깐……!”
퍽, 빡, 퍽. 칼이나 촉수를 꺼내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작은 이미 상대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단심문관은 몇 번이나 반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이작은 그가 기도문을 외울 틈도, 손짓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패던 도중, 소란을 듣고 이단심문관들과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중에는 경계하고 있던 투할린과 리안나까지 있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이 일방적인 폭행을 중단했다. 그리고 가만히 솔트나 앞에 자세를 낮췄다.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단심문관님?”
솔트나는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멍투성이 얼굴과 피로 시뻘게진 이빨이 드러났다. 그 와중에도 저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깨지진 않는 걸 보니 진짜 유리는 아닌 듯했다.
아이작은 빙긋 웃으며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후려갈겼다. 그 모습에 이단심문관들이 다급히 달려들었지만, 투할린과 리안나가 각자 무기를 꺼내 들자 바로 멈춰 섰다.
아이작은 동맹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냐고, 이 새끼야.”
“……죽겠지.”
솔트나가 부러진 이빨을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데라 헤만이 온다. 퉤, 황금사자 성기사단이 이미 네 자리를 대신하러 오고 있단 말이다.”
아이작은 눈살을 찡그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솔트나가 왜 엉뚱하게 데라 헤만과 칼센 밀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거절하면 이 사실을 드러내면서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데라 헤만…… 그 괴물을 또 마주해야 하나?’
데라 헤만은 강력한 힘을 가진 대신 선천적인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교단의 극비지만 아이작은 알고 있었다. 그는 신성이 충만한 성지나 사제의 도움, 혹은 특별한 성물 없이는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적이다.
그가 지휘하러 온다는 것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묶어 둔다는 목적 달성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죽인다는 말을 참 쉽게 하는군.”
아이작은 솔트나를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 이 자식을 죽이든 살리든, 데라 헤만을 마주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아이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살려두기로 했다.
이미 보는 눈이 많다. 지금 죽이는 것은 돌아갈 길을 막아 버리는 감정적인 대응일 뿐이다.
죽음의 무게를 알려 주는 것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아이작은 자리에서 비켜 주었다. 그제야 이단심문관들이 다가와 솔트나를 치료하고 부축해 주었다.
솔트나는 아이작을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아이작이 마주 쏘아보자 급히 눈을 돌렸다. 어차피 때린 거, 가기 전에 한 대 더 때려도 아이작으로선 아쉬울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단심문관들이 도망치듯이 사라지자 투할린이 멍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이작 역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과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투할린은 아이작의 피투성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자네는 진정한 남자일세. 빛의 법전에도 이런 강단 있는 사나이가 있는 줄 몰랐구먼.”
아이작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맹들을 불러주십시오. 전달해 드릴 이야기가 생겼습니다.”
아이작의 눈에는 보랏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사지라 해도 내 발로 걸어 들어간다. 결코 끌려가서 매달리진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