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성배기사 (2)
아이작은 조금 긴장했다. 게벨은 이 세계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기도 하고, 그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에 대해 어렴풋이라도 눈치채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네가 성체건 악마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너를 데려온 날부터 그렇게 결심했다. 특히 네게…… 검술을 가르치기로 한 날부터.”
“복수를 위해서요?”
“복수를 위해서.”
이미 게벨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가 소속됐던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전멸과 관련된 사연이라고.
게벨은 이제 완전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전멸했다고 말했었지. 사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시체는 전부 불사 교단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스나이트가 되었지. 영혼이 동의하지 않는 한 데스나이트가 될 수 없으니까, 놈들은 결국 배교를 저지른 셈이야. 덕분에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이미 변방에서는 사실상 배교자로 낙인찍힌 상태다.”
“아니…….”
“아발란체 검술을 알아볼 사람은 이제 없다. 같은 검술을 쓰는 성기사가 아닌 이상. 그러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이작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사실 걱정한 적 없다고 말할까 생각했다. 어차피 아발란체 검술은 그의 몸에 큰 부하를 준다. 직접 만든 이삭 검술이 훨씬 더 효율이 좋았다.
그때 게벨이 폭탄 선언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발란체 성기사단 전멸의 배후에 등하맹인 중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작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등하맹인. 빛의 법전 교단의 핵심에 대한 멸칭이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배교자로 찍힌 것은 억울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발언은 교단 전체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게벨은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칼센을 기억하느냐?”
칼센 밀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이작의 첫 포식 대상이자, 검술에 대한 재능은 그의 능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까.
“칼센은 이번에 천사가 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명천사가 될 것으로도 기대받던 자였다. 그런데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변방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전멸당하고 배교자로 찍힌 지 몇 년 안 돼서 칼센도 배교자가 되었다. 이게 우연일까?”
“칼센이 배교자가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 아니다. 칼센은 배교자가 분명하다. 제 부하들을 팔아먹고 같은 신앙의 동포들까지 가차 없이 살해했지.”
게벨은 손가락을 탁탁 부딪치며 말했다.
“하지만 칼센이 배교자가 되게끔 꼬드긴 자가 있고, 자기 부하들을 희생시켜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든 등을 떠민 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그렇게 된 것처럼.”
“불사 교단이…….”
“개입은 했겠지. 하지만 놈들만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못 한다. 교단 내부에 진짜 배신자가 있다.”
게벨의 눈에는 살의와 갈등이 번갈아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게벨이 아이작과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벨은 이제 아이작을 만나는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언제 다시 들려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배교자로 낙인찍힌 신분이어서 대놓고 조사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게…… 부담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내 원한을 대신 맡기기로 했지.”
게벨은 미안한 마음을 품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숨기는 게 좋겠다. 네 성정은 믿는다만 정체가 불분명한 힘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올바른 곳에 쓴다 해도 두려움을 살 수 있으니…… 특히 지금 교단 수뇌부는 의심이 많은 자들이다.”
“예.”
“성기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지, 아이작.”
게벨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너는 분명히 훌륭한 성기사가 될 수 있을 거다. 아니, 언젠가는…….”
교단의 핵심에 접근할 수도 있겠지.
게벨은 그때 아이작이 칼센이나 아발란체 성기사단처럼 희생당하는 대신, 차라리 교단의 핵심이 되어 부패한 부분을 도려내길 바랐다. 그러려면 우선 아이작을 이곳에서 보내주어야 했다.
“좋아. 때가 된 것 같다.”
“예?”
“수도원으로 돌아갈 필요 없다. 란셀 수도원으로 갈 필요도 없어.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훨씬 더 규모도 크고 실력도 좋다. 로튼해머 단장은 이교도에겐 가차 없지만 아군에게라면 인품도 실력도 훌륭한 사람이지.”
아이작은 게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벙찐 표정을 했다.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가라구요?”
“로튼해머 단장에게는 내가 이야기하겠다. 내게 빚이 있으니 들어줄 거야. 이단심문관님도 잘 이야기해 줄 테니 입단은 어렵지 않을 거다.”
아이작은 게벨의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원래 가려고 했던 란셀 수도원의 성기사단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거기서 일반 수련생 과정을 거치면서 성기사가 된다면 한참 걸릴 것이다. 공을 세우는 것도 늦을 테고. 하지만 브리엔트 성기사단이라면 그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브리엔트 성기사단으로 가야 했다. 이쪽이 훨씬 더 실전적이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을 테니까.
***
로튼해머는 해 질 무렵쯤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사제가 소환한 듯한 빛의 법전의 신수들이 광휘를 뿜어 내며 돌아다닌 덕분에 주변은 대낮 같았다. 성기사단의 위용을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로튼해머의 표정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역시 왈라이카 사냥꾼은 한 명도 잡지 못한 모양이군,’
아이작은 합류하기 전에 풀어놓았던 혼돈의 자손들로 계곡 전체를 뒤져보았다. 아이작에게 포식당한 헤인켈 굴마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벌써 다 도망친 모양이군요.”
“으음, 그런 거 같군. 놈들이 머물렀던 소굴을 발견해서 소지품도 뒤져봤는데 정말 왈라이카 사냥꾼이 맞더구만. 말들도 사라진 걸 보니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글렀다고 생각하고 도망친 모양이야.”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타고 온 말들은 지힐렛이 전부 잡아먹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증거를 남겨 두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힐렛은 몇 주는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부른 상태였다.
“그래도 낮이라 좀 굼뜰 줄 알았는데 공작가 직속 사냥꾼들은 뭔가 다른 모양이다. 혹시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신수들을 풀어 수색 중이지만 솔직히 기대는 안 되는군.”
그때 그의 뒤에서 이솔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솔데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앞으로 나왔다.
“……목숨을 세 번이나 빚졌습니다.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세 번? 그만큼이나 구해줬나?’
생각해 보니 늑대를 만났을 때 한 번, 수도원에서 한 번, 계곡에서 한 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재수 없는 팔자인 모양이다.
“저한테 감사하기보단, 이 지방이 이단심문관님께 재수 없는 곳인 것 같으니까 빨리 여기부터 뜨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사실 원래 이 지방이 그녀가 죽을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아이작이 억지로 살려낸 거고.
이솔데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고, 로튼해머는 이게 걱정인지 배배 꼬인 못된 말인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아이작도 이솔데를 그렇게 타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솔데는 그녀의 일을 잘 해냈다. 이 수도원에 역병신을 부활시키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조사하러 왔고, 계곡에 숨어있는 자들도 찾아냈다. 심지어 자신의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성기사단을 빠르게 불러들였다.
아이작이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전부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이단심문관으로서는 유능하게 행동한 셈이다.
죽은 이단심문관이 될 뻔했지만.
‘이단심문관들이 제명에 죽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딱히 이솔데가 불운한 것은 아닐지도…….’
“뭐, 그 얘기는 됐습니다. 덕분에 게벨 씨도 치료받고 빠르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뇨. 제가 세 번 빚졌으니 저도 세 번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빛의 법전의 이단심문관으로서, 브란트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저 개인으로서요.”
빚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지우게 되다니. 아이작은 이솔데의 결연한 눈을 보면서 그녀가 어디서 객사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뽑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로튼해머는 이솔데의 말에 제법 놀란 듯해 보였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는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지요. 어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변 영주들에게 공문을 보내고 수색 범위도 넓히고 있으니 이제 아가씨가 하실 일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이솔데는 사과와 감사 인사를 마치자 긴장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막사로 돌아갔다.
이제 그녀는 곯아떨어질 시간이었다.
“그럼 우리는 저 안에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할까? 자네가 계곡에서 한 일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아.”
***
아이작과 로튼해머가 대화하기 위해 들어간 곳은 게벨이 휴식 중인 막사였다. 원래 기사단장용 막사로 부르려 했지만 아이작은 게벨을 함께 끼워서 대화하고 싶어서 그를 불렀다. 로튼해머와 아이작이 들어가자 게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 수도사 양반. 몸은 좀 쉬셨소? 상처는?”
로튼해머는 게벨을 단순한 수도사로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게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전히 정정해 보이시는군요. 로튼해머 단장님.”
로튼해머는 자신을 안다는 말투 속에 고개를 기울였다. 게벨은 그가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자 수염이 부숭부숭한 턱을 손으로 가렸다.
그제야 로튼해머의 눈이 커졌다.
“게벨? 그 미친개 망나니? 아니, 세상에. 그새 폭삭 늙었군.”
미친개 망나니…… 아이작은 게벨이 젊었던 시절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졌다.
게벨은 오랜만에 듣는 별명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알아봐야지! 지난 여명군 때 자네와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그래, 그렇구만. 이솔데가 자네 실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더라니 그럴 만했어. 그런데 자네가 이런 수도원에 있다니, 세상일 정말 모를 일이군.”
로튼해머의 감탄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힐긋 아이작에게로 향했는데, 대충 아이작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게벨 덕분이라고 한다면 절반만 사실이겠지만.
“그런데 린데 단장은? 자네가 단장은 못 해먹을 인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수석기사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수도원에 있는 건가?”
“린데 단장은 죽었습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전멸했습니다.”
막사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로튼해머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여명군이 끝났을 당시에만 해도 성기사단도, 린데도 살아있었으니 전쟁 때문은 아니군. 솔직히 린데만 죽었다고 한다면 결국 자네가 성질 못 이기고 죽인 다음 수도원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거야.”
“솔직히 그 꼬장꼬장한 할망구를 죽이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했죠. 그리고 저만 했던 생각도 아닐 겁니다.”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다고는 못하겠군.”
아이작은 두 늙은이들이 자기들만 아는 추억을 가지고 킬킬거리며 수다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전장에서 칼밥 먹고 자란 남자들이 누군가를 추모하는 방법인 듯했다. 한참 대화가 이어지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듯 멈췄다.
로튼해머는 긴 한숨을 뿜어내고 입을 열었다.
“누가 죽였지?”
“모릅니다.”
“모른다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망쳐서 보고 들은 것이 없고요. 그 뒤로 이 수도원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비겁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지요.”
아이작은 게벨이 알아볼 수 있는 최대한 알아보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못한다면 대신할 사람을 찾아내서라도. 하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로튼해머도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에 비겁자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군.”
하지만 로튼해머는 게벨을 비겁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이미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그러니 저 대신 이 아이를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로튼해머의 시선이 게벨에게서 아이작으로 옮겨갔다.
“제가 어쭙잖게 가르쳐서 기초를 망쳤습니다만 그래도 단장님이 키워주시면 실력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솔데 아가씨도 이 청년에 대한 칭찬을 질릴 정도로 하셨지.”
로튼해머는 아이작의 손을 살펴보고 팔을 주물러 보았다. 로튼해머의 쇠뭉치 같은 손과 두터운 팔다리에 비하면 아이작의 몸은 가녀리다 못해 빈약했지만, 그는 퇴짜를 놓지 않았다.
“성기사가 되고 싶으냐?”
“예.”
로튼해머는 그걸로 대답이 충분하다는 듯 게벨을 돌아보았다.
“내가 신경 써줄 수는 있겠지만 내 독단으로 성기사로 만들 수는 없네. 일단 내 객이자 수련생 정도로 데리고 다니면서 실력을 보도록 하지. 하지만 자네 밑에서 배웠다면…… 이미 내 수련생들 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좋다. 그러면 이름이 아이작? 너는 내가 책임지고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넣어주마.”
로튼해머의 단언에 아이작은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음, 그거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로튼해머 단장님.”
“응?”
“저는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