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32)
332화. 눈과 칼 (5)
빛의 법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대, 최강의 신앙이다.
등대지기가 화형대에서 여명의 석판을 들고나온 이래, 빛의 법전은 그들의 적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잡아먹으며 성장해 왔다.
물론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엘릴의 반역, 이름 없는 혼돈의 자살, 불사 교단의 성지 탈취…… 모두 빛의 법전이 무너질 뻔했던 위기다.
그러나 이 위기들의 공통점은 전부 빛의 법전 내부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빛의 법전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은 빛의 법전밖에 없다.
다른 신앙들?
올칸 규율은 잠시 약탈하고 지나가는 병충해에 지나지 않고, 대적자였던 소금 의회는 매장당했으며, 세상의 화로는 섬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붉은 성배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빛의 법전은 결코 평화로운 신앙도, 선한 신앙도 아니다.
이것이 빛의 법전이 세상을, 다른 신앙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사실이다. 실제로 불사 교단은 수없이 공격당하면서도 간헐적인 테러 외에는 감히 빛의 법전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즉, 빛의 법전 교단에서 최강자라면 감히 세계 최강자를 논할 자격이 된다.
물론 천사의 권위 앞에 인간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정도 서열에 올라설 정도라면 이미 천사의 사랑과 후원을 받고 있을 확률이 크다.
그리고 아이작은 지금, 빛의 법전 최강자라고 단언할 수 있는 데라 헤만이 보여 주는 나약한 태도에 당황했다.
“제가 왜 약한 척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말의 진의를 추궁했다.
데라 헤만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천사를 쓰러뜨린 네가 약하다는 거냐?]“……저는 실력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데라 헤만 경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빛의 법전 최강의 성기사입니다. 경의 말은 마치 제가 봐줬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아이작은 진심이었다. 촉수를 빼 들고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가 데라 헤만이다. 하지만 데라는 오히려 ‘왜 약한 척하냐’면서 몰아붙이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왜 제가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칼센과 행보가 닮아서?”
아이작의 질문에 데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이작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듯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듯 가면을 쓴 채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다시 가면을 벗은 데라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칼센은 자유로운 자였다. 성기사답지 않게 구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쏘다니면서 베고 싶은 자들을 베어 넘겼다. 천사들도 그를 신임하고 기꺼이 임무를 맡겼다. 오월의 검께서는 그에게 직접 검을 알려주시기도 했지.]아이작은 칼센의 행보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데라 헤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조차 아이작과 칼센의 유사점이 보였다.
그러나 데라 헤만은 어두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 때문에 그는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방만함에 빠졌다. 교만함. 그의 힘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잊어버린 것이지. 통제받지 않는 힘은 반드시 어긋나게 되어있다.]칼센의 배교. 그것은 데라 헤만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칼센에게 패배한 것보다 그 사건이 더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데라가 한 말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눈치챘다.
‘칼센이 천사들의 명령으로 배교한 것을 모르는 건가?’
칼센은 이름 없는 혼돈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 과정에서 명천사 흰올빼미를 사냥하고, 불타는 처녀와 오월의 검이 협력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칼센이 아이작의 뱃속에 들어가면서 실패했다.
즉, 칼센은 교만해져서 빛의 법전을 배신한 게 아니라 천사들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배교한 것이다. 아이작은 이 사실을 데라에게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알려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후회한다.]“…….”
[내가 칼센보다 강해서 그를 이끌어 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빛의 법전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고 환하게 빛났을 텐데…… 라고.]아이작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라 헤만을 움직이던 것은 패배의 아픔도, 분노도, 열등감도 아닌 안타까움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아까운 성기사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제야 아이작은 데라 헤만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과의 대결에 임했는지 알게 되었다.
데라 헤만은 무거운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예?”
아이작은 이 뜬금없는 채용 제안에 놀라 되물었다.
[네가 칼센에게 짙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 내가 너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마. 너를 차기 황금사자 성기사단의 단장으로 밀어주마.]황금사자 성기사단의 단장. 아이작이라면 못해도 수석기사 내지는 부단장까지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밀어주지 않아도 데라 헤만이 은퇴한다면 기사단장은 보장되어 있을 것이고.
성기사로서는 올라설 수 있는 최상의 위치다.
하지만 아이작이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아이작은 고민조차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침묵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다.]‘그렇겠지.’
아이작도 알고 있었다. 데라는 ‘칼센과 같은 예를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아이작에게 굴레를 씌워 자기 밑에 두고 교화시키거나, 아니면 목을 자르겠다는 뜻이다. 마침 이단심문관의 고발도 있겠다, 고발, 판결, 집행까지 한방에 이루어질 것이 뻔했다.
아이작의 대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재판은 당장 내일 아침이다. 판결 전까지 생각을 끝내도록.]***
밀리샤르 수도원의 끔찍한 중 하나는 바로 벽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거친 파도 소리였다.
파도는 벽을 거칠게 깎고, 구멍에 바람을 불어넣으면서 기이한 소리를 냈다. 잠들만하면 얼굴에 흩뿌려지는 소금물은 환상적인 조합을 이뤘다.
덕분에 아이작은 간만에 기이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군.’
아이작은 감옥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를 보자 자신이 잠든 건지, 아니면 깬 상태로 환각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어중간한 상태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크지.”
칼센 밀터가 감옥 맞은편 벽에 기댄 채 말했다. 그의 머리 위 창문으로 파도가 치면서 물이 스며들어 왔지만 칼센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환상이냐, 유령이냐?”
“네 머릿속 망상이다.”
칼센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작은 어쩐지 놀랍지도 않았다. 여기는 칼센 밀터의 본거지였던 수도원이고, 칼센과 깊게 엮인 데라 헤만 때문에 복잡한 상황에 꼬였다.
그의 망령이 다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번엔 무슨 소리를 하러 왔지?”
칼센은 아이작의 삐딱한 태도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는 주름진 입가를 쓰다듬다가 천천히 말했다.
“데라 헤만의 제의를 받아들여라, 아이작.”
“왜?”
“데라는 올곧은 사람이야. 도무지 의심할 줄 모르는 충직한 빛의 법전 신도지.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빛의 법전 덕분이니 그렇겠지.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기적이니까.”
아이작은 데라 헤만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누가 봐도 불쾌감이 드는 외모, 고위 사제와 성물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연명하기 힘든 육체.
그런 그가 살아갈 방법과 이유를 준 것은 오직 교단뿐이다.
그의 신앙심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게 내가 데라를 따라갈 이유가 되나?”
“그래. 네가 데라를 이끌어 줘야 한다. 저렇게 칼로 이용당하다가 죽기에는 아까운 자니까.”
아이작은 헛웃음 지었다.
끼리끼리라더니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데라는 아이작을 이끌어 주겠다고 하고, 칼센은 아이작이 데라를 이끌어 줘야 한다고.
물론 그런 관계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원래 스승과 제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칠 때 그 자신 또한 성장한다.
문제는 아이작이 데라 헤만을 스승, 혹은 제자로 둘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내 망상이 아니라 진짜 칼센이 맞나 보군.”
“뭐?”
“교만함으로 파멸한 성기사 나으리, 칼센 밀터가 맞는 것 같다고. 데라는 이미 완성된 자다. 너나 나나, 감히 데라를 가르치거나 이끌 자질 따윈 없어. 데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아이작이 수십 회에 걸쳐 데라 헤만을 꼬드겨 보고 내린 결론이다.
데라 헤만은 빛의 법전 성기사의 기준 같은 존재다. 그는 무너지지도 배신하지도 않는다.
싸우러 갈 때가 되면 싸우러 가고, 죽을 때가 되면 죽는다. 그뿐이다.
그를 움직이려는 건 태풍의 진로를 바꾸려는 시도나 마찬가지다.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칼센은 눈살을 찌푸린 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칼센이 데라 헤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아이작이 칼센의 내면에 대해 알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단지 그가 데라 헤만을 꺾었음에도 그것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는 점과, 딱히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 뿐.
“그리고 지금은 데라보다 내 코가 석 자야. 내가 데라를 따라가면? 너도 내 몸속에 뭐가 있는지 알 텐데? 데라가 내 정체를 아는 게 빠를 것 같냐, 아니면 내가 데라를 마성의 매력으로 굴복시키는 게 빠를 것 같냐?”
“…….”
그 말에는 칼센도 별로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재밌다고 생각했다.
‘동정하는 건가?’
빛의 법전 최강자인 데라 헤만은 자신이 칼센에 비해 ‘약하다’고 했고, 칼센은 데라 헤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에로 여명군에 휘말려 든 병졸 1이 들으면 피를 토하면서 분노할 생각들이었다.
아이작은 문득 이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데라가 나를 따라온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뭐라고?”
“내가 데라 헤만을 꺾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단 말이다. 솔직히 나는 데라 헤만과 싸웠을 때 벽을 느꼈다. 그건 내 근간을 뒤흔들어 버리는 검술이었어. 데라를 정직한 방법으로 이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갈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데라 헤만의 신성력 포식으로 인해 간발의 차로 패배하는 미래만 그려질 뿐이었다.
“데라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그랬던 것처럼 데라를 쓰러뜨리는 것뿐이다.”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칼센을 차분한 눈으로 응시했다.
앞서 말했듯 데라 헤만은 태풍과 같다. 태풍의 진로를 바꾸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태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배의 돛을 움직이는 것뿐이다.
“너라면 검술만으로 데라 헤만을 쓰러뜨릴 수 있지?”
“……그래.”
칼센은 담담히 대답했다. 칼센은 아이작의 몸 안에 있으면서도 그의 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역시나 칼센은 데라 헤만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데라 헤만은 예전의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때 난 이미 빛의 법전 성기사가 검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올라선 상태였어. 하지만 나는 그 뒤에도 수없이 싸우면서 강해지고 진보했다.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나는 그걸 왜 못 익혔지?”
“네 스승 덕분이지.”
칼센은 비스듬히 웃으면서 말했다.
“네 검술은 기초 중의 기초, 성 아르테 식에 기반한 것이다. 내가 견습생 시절에 졸업한 검술이지. 하지만 내 진짜 검술은 성 아르테 식과 전혀 관계없는 이교도들의 검술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불사교단에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미쳐 버린 검사들이 많거든.”
그건 아이작도 안다.
먹지도 자지도 지치지도 않으니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는 광인들.
그런 자들이 불사교단에는 득시글거린다.
“그들은 아르테 식과 전혀 다른 길을 갔어. 게벨이라는 성기사 밑에서 기초를 쌓아 올린 네가 배우거나 영향을 받을 여지가 없지. 네가 동방에서 쌓은 경험이 좀 더 풍부했다면 모르겠다만.”
칼센의 대답을 들은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또 교만 떠는 거 같은데.”
“뭐라고?”
“네가 얼마나 재능 넘치는 천재인지는 알겠는데, 나라고 해서 그동안 논 건 아니야. 내가 네 영향을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데라가 내 검술을 파훼할 수 있었던 건 아니란 거지. 내 생각에는 데라 헤만이 나한테 전력을 다한 건 아닌 것 같다.”
데라는 강하다. 어쩌면 칼센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여전히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력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무섭고 강한 점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장은 방법이 없군. 지금은 자신감이 떨어졌으니 네 교만함이라도 배워야겠다. 그 검술 좀 알려줘.”
마치 당연한 걸 내놓으라는 듯한 태도에 칼센은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하루 만에? 검술이 쑤셔 넣으면 들어가는 감자포대 같은 건 줄 아냐?”
“내가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정확히는 칼센을 잡아먹은 덕분에 그런 거긴 했지만, 아이작은 굳이 거기까지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이작이 증명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봐 온 칼센 역시 아이작이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실을 알고 있었다.
“한번 가르쳐주기나 해봐. 안 그러면 당장 내일 내 모가지가 매달릴 수도 있다고.”
칼센은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