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37)
337화. 광휘 (3)
오월의 검은 아이작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사그라들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베셰크가 만든 실수? 균열이 세상을 깨뜨려? 저승을 끌어내려 지상에 강림시킨 걸 말하는 건가?’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아이작의 ‘불경함’을 눈감아줄 정도로는 위급하다는 뜻이리라. 다른 신앙의 손을 빌려서라도 성지 수복을 완수해야 할 정도로.
아이작은 최근 신앙들이 급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변화 또한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명군은 인간만의 목표가 아니다. 신과 천사들마저 움직이는 이 세계의 숙명이다.
‘흠, 사실 여명군을 성공시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이 나긴 하지.’
빛의 법전이 강력하긴 하지만, 그들은 이미 수차례 실패했다.
열기와 냉기가 번갈아 찾아오는 무시무시한 사막지대와 싸울수록 병력이 불어나는 불사 교단의 영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요새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불사 교단의 승리 선언은 단지 쳐들어오는 자들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질까.
‘다르게 생각하면 이번 여명군이 마지막이라는 뜻이 되겠군.’
단지 수비만 했을 뿐인데 불사 교단이 승리한다는 것은, 성지를 빼앗고 뺏기는 순환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14차 여명군은 없다. 여명군이 실패하면 그 뒤로 성지는 영원히 불사 교단의 차지다.
그리고 그것은 빛의 법전이 원치 않는 상황이다.
***
불타는 처녀와 오월의 검이 떠난 뒤 남은 것은 성기사들과 타고 바스라진 솔트나의 잔해뿐이었다. 하지만 솔트나를 돌아보는 성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천사의 손에 심판받은 자를 돌보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
물론 아이작을 처형하자고 다시 떠드는 이도 없었다.
“성배기사님.”
데라 헤만을 돌보던 부관이 아이작에게 다가와 깊게 고개 숙였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단심문관의 농간에 속았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단심문관 때문에 그랬다는 변명을 들은 거 같습니다만.”
“…….”
부관은 못 들은 척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은 성기사들에게 화를 내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무슨 잘못인가. 아이작에게 배교자 칼센 밀터의 검술의 흔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불경한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인 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옛날에는 성기사도 죽인 적 있다.
갑자기 나타난 오월의 검이 아이작을 보호해 준 덕분에 죽일 이유가 없어진 것뿐이다.
그들은 의무대로 행동했을 뿐, 천사의 날갯짓에 휘말려 든 것은 그들이나 아이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작.]그때 데라 헤만이 아이작을 향해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가면을 반쯤 벗은 채 아이작에게 힘겹게 속삭였다.
[……나는 여전히 너를 여기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이작은 기가 찼지만 이제 우위에 선 것은 자신이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데라는 침침한 눈동자로 아이작을 응시하며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너는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결국 칼센 밀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놓아주는 수밖에 없겠지. 네가 살아서 빛의 법전을 빛내길 바랐건만. 하지만 그마저도 대계의 흐름이라면 받아들일 뿐이다.]데라 헤만은 끝까지 고집불통으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태산 같은 사내였다.
아이작은 새삼 불타는 처녀가 왜 이단심문관이 아닌 성기사인 데라 헤만을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데라 헤만의 외골수적인 신념은 불타는 처녀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등대지기의 대리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리히트하임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그를 경배하고 찬양했지만 오직 불타는 처녀, 이스보셋만이 그를 의심했다. 이스보셋은 감히 믿음의 증명을 행했고, 그 대가로 온몸이 불타 버렸다.
세상 모두가 그렇다고 할 때 혼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존재가 많진 않을 것이다. 그게 옳든 그르든.
데라 헤만은 조용히 가면을 다시 쓰고 성기사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부관이 통역했다.
“짐 싸라, 회군한다!”
성기사들은 그 결정에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고 일제히 짐을 챙겼다. 그들이 여기서 무슨 재판을 하고 추측을 했건, 천사들이 나타나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아이작은 도움 받은 처지였음에도 그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사들은 인간들이 한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들의 큰 족적 앞에 인간들이 쌓아 올린 근거와 토대는 의미 없이 짓밟혀 버린다.
그 강대한 존재들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게 느껴질 뿐이다. 실제론 그 모든 힘들이 결국 인간의 신앙심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것도 천사들이 의도한 바일지도 모르지. 천사는 강하고 인간은 약하며, 천사들이 행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저항할 수 없다는 믿음을 심어주려는 것일지도.’
아이작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솔트나의 불탄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헤사벨과 넬이 중정으로 내려오면서 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솔트나의 재가 흩날리며 바다에 흩뿌려졌다.
누구도 추모하지 않는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
소금 의회의 선단이 오드리프 항구에 배를 대는 사이, 아이작은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지휘관들을 다시 만났다.
투할린은 아이작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이게 상의도 없이 뭐 하는 짓이야!”
아이작은 투할린이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제가 데라 헤만과 개인적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빛의 법전에서는 목을 내놓니 마니, 불로 태우니 지지니 하면서 대화를 하나? 세상에, 명천사가 둘이나 나타나서 지지고 볶는 대화가 어딨어? 데라 헤만이고 뭐고 거기서 다 죽을 뻔했다는 거 몰라?”
화로 장인인 투할린은 명천사의 강림을 감지하고 기겁했던 것이다.
사실 투할린의 반응이 일반적인 인간의 반응이긴 하다. 명천사는 별생각 없는 움직임만으로도 사람을 죽인다. 잔인하거나 공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을 걸을 때 개미를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명천사를 많이 만나본 아이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명천사나 둘이나 나타난 상황은 작명고지를 받은 투할린조차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 명천사 둘이 나와 데라의 몸에 임해 서로 싸울 뻔했다는 걸 알려주면 기절하겠군.’
알려지면 또 불타는 처녀가 아이작에게 앙심을 품을 것이 분명했기에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이야기였다. 투할린은 화가 쉽게 가라앉는지 아이작의 배를 퍽퍽 치면서 다그쳤다.
“다음부터는 그 미친 광신도들이랑 단신으로 있을 생각일랑 말게! 나 원, 그 미치광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가 자네 말빨에 속아 따라왔지, 그 광신도들 뒷수발하러 온 줄 아는가?”
“하하, 주의하겠습니다.”
말투는 투박해도 투할린 만의 걱정하는 표현이었다.
다른 지휘관들도 걱정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데라 헤만이 ‘정당한 절차’로 아이작을 처형하거나, 본대로 보내버렸다 한들,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뭐, 교단의 입장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사실 아이작은 교단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백제국 동맹’이라는 큰 깃발 아래 모여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외국 군벌을 끌어들인 사병집단이다. 그것도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만약 아이작이 교황이나 황제 비슷한 입장이었다면 여명군보다 아이작을 먼저 박살 내러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천사의 개입으로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이작에게 암묵적으로 드리워져 있던 ‘천사의 가호’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제 아이작이 교단의 손에, 적어도 대놓고 방해받을 일은 없었다.
불타는 처녀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은 단지 그녀가 시야를 넓게 가지는 것보다 교리를 집행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재단사 역할보다 보풀을 제거하는 역할에 가깝다.
비타협적이고 원리원칙에 집중하는 깐깐함이야말로 이단심문관에게 필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걸로 확실히 정리되었으니 빛의 법전 교단에서 저를 더 이상 방해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 원, 이런 쓸데없는 일로 발목을 잡혀서야…….”
“음, 그러면 성배기사님.”
그때 리안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안 그래도 아까 전부터 뭔가 조바심을 내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기에 아이작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시죠?”
“그러면 성배기사님이…… 데라 헤만을 꺾은 겁니까?”
리안나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VS배틀을 참기 힘들어하는 엘릴 신도들 사이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아이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환호성과 함께 시끌벅적한 소란이 퍼져나갔다.
황금사자 성기사단이 물러난 걸로 이미 짐작할 순 있었지만, 아이작 입으로 분명하게 듣고 싶었던 것이다. 칼센과 달리 아이작의 승리는 분명하게 명시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성배기사님이 그 금사자를 이기다니!”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차피 같은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 대장이 제일 세다’는 타이틀은 놓지 못하는 게 평범한 병사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총지휘관이라고 가장 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강한 사람이 이끌어 준다고 하면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리안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저와 대등한 승부를 겨룬 상대답군요. 그때 에델레드 폐하의 방해만 없었어도…….”
“아,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견식 해보시겠습니까?”
“제가 그때 칼 맞은 부위가 쑤셔서 조금…….”
엘릴 신도는 승부를 피하지 않지만 리안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데라 헤만을 꺾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겨뤄보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기사들은 널려있었다.
당장 싸움판을 벌이고 싶어 하는 분위기를 찍어 누른 것은 투할린이었다.
“이 깡패 놈들아! 지금 이사크레아 경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겨우 돌아온 참이다! 이제 좀 쉬고 배 타야 하는데 어디서 방해야? 썩 꺼지지 못해!”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투할린이 적절한 때에 잘 나서주었다고 안도했다. 엘릴 신도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물러났다. 하지만 데라 헤만과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을 복기하고 싶은 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일단 배부터 채웁시다. 배고파 죽겠군요.”
***
황금우상 상단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먹이기 충분한 양의 식사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레오노라 부상단주의 명령으로 원정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받았다. 물론 전부 아이작 이름에 ‘외상’으로 걸리긴 했지만.
“갚으면 좋겠지만, 갚지 않아도 되는 돈입니다.”
아이작은 특별히 레오노라와의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다. 아이작은 병사들과 식사를 할까 했지만, 그의 기괴하기까지 한 식사량을 굳이 병사들 앞에서 선보이는 것은 민폐나 다름없었다. 레오노라는 아이작의 대식에 놀랐지만 깊은 호기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요? 왜죠?”
황금우상 상단은 빛의 법전에게도 돈을 무상 기증하지는 않는다. 돈을 뜯기면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어떻게든 대가를 뜯어낸다. 아이작은 그들이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리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시다시피 무상으로 물자를 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투자’ 명목으로 내건 거지요. 다행히 성배기사님은 신용이 아주 높아서 문제가 없었지요.”
아이작이 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먹어 치우는 동안 레오노라는 생선 몇 조각의 살점을 발라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백금 결사 명의로 지출된 겁니다. 황금우상 상단 내부 감사팀도 백금 결사 이름으로 나간 지출은 손실이 얼마가 나든 문제 삼지 않아요. 성배기사님께서 갚지 않더라도 그냥 손실처리하고 말 겁니다. 이자도 없구요.”
아이작은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이런 작은 반지에 ‘이자 면제, 대출 한도 무제한, 대출 기한 무제한’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적이 걸려있다니…….
“제가 가진 성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성물 같군요.”
아이작은 진심으로 말했지만 레오노라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깔깔 웃었다.
이 소시오패스도 돈에 관련된 농담은 재밌는 모양이다.
한참 뒤 레오노라는 아이작을 보면서 말했다.
“강력한 성물에는 크나큰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백금 결사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큰 지출을 감당하시는지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