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54)
354화. 목마른 만찬 (4)
배신당할 바에야 배신한다.
왜 배신당하고 나서야 복수하지?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죽이면 되는데.
이게 무슨 신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포칼립스적 사고인가 싶겠지만, 이 ‘배신당할 바에야 배신한다’는 의외로 전통적인 개념이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 조조가 있겠다.
신뢰는 의외로 최근에 발명된 개념이다.
흔히 사람들은 순진무구한 야만인과 비열하고 신의 모르는 문명인의 구도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신뢰와 명예는 문명인의 발명품이다.
사람이 농경사회를 이루고, 도시를 만들고, 근거리 전투 집단이 귀족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도덕, 명예, 신뢰’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강력한 무장집단이 일방적으로 사회를 뒤흔들지 않게 만들기 위한 구속구를 씌워 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사’라고 불리는 이 집단은 명예라는 허상을 좇아 기꺼이 그 굴레를 썼고, 이는 곧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을 동경한다. 때문에 문명인들은 귀족의 전유물이던 ‘도덕, 명예, 신뢰’를 숭상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의 질서가 되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그걸 모른다.
그들이 실리적이라서가 아니다. 아직 필요가 없어서일 뿐이다. 그래서 야만인인 것이고.
즉, 야만인을 상대할 때에는 어느 정도 야만인이 될 필요가 있다.
상대는 신의와 도덕의 개념을 모를 수도 있는, 천 년 전 존재이기 때문이다.
***
“……사드라자가 정말 배신할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쿠르르르, 쿠쿵.
미르미아 외곽.
아이작은 사막까지 나와 괴물을 사냥 중이었다.
한때 미르미아의 위성도시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도시는 아마 오아시스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터를 중심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공터 중심에는 팔뚝만 한 굵기의 팔다리를 가진 거대한 거미가 있었는데, 사실 거미인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다리가 적어도 스무 개는 넘어 보였고, 그 가운데에 있는 몸통은 넘실거리는 촉수들로 어설프게 인간의 얼굴을 흉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뭐라고?”
아이작은 그 거미의 팔다리를 잘라 떨어뜨린 다음 그 몸통에 촉수를 쑤셔 넣은 직후였다. 때문에 에이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드라자가 정말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었습니다.”
아이작은 이번에도 배만 채웠을 뿐, 별다른 포식 효과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평범한 동물보다는 혼돈의 짐승을 먹어 치울 때 훨씬 더 금방 포만감이 들었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미르미아에 도착했을 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는데.”
“허전하다고요?”
“묘지가 없더라고.”
“묘지…… 요?”
에이단은 아이작이 쓰러뜨린 거미 괴물의 사체에 의식용 소금을 뿌리면서 물었다. 사체가 상하지 않고 의식에 써먹을 수 있도록 손질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재앙이 내려진 직후에 미르미아에 살아있던 생존자들이 있었어. 실제로 우물도 남아 있고, 사람이 아예 못 살 환경은 아니었지. 물론 바다가 초토화된 시점에서 그들의 목숨은 어차피 경각에 처했겠지만…… 어쨌든 사람은 있었다고?”
“그렇…… 겠죠?”
“그런데 미르미아에는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그야 천 년 전 시체가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지 않냐고 말하려던 에이단은 뭔가 기이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천년의 세월은 시체를 먼지무더기로 바꾸고도 남는 시간이다.
평범한 장소라면.
하지만 여기는 바다조차 마르는 극한의 땅이다.
“시체는 없을 수 있어. 하지만 미라는 남아 있을 수 있지.”
비도 오지 않는 극도로 건조한 환경, 풍부한 소금, 기온 변화조차 없는 일관된 날씨까지.
미라가 만들어지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다.
물론 아이작이 미라 제작자는 아니므로 그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다른 요인에 의해서 잔해가 제거된 것일 수도 있고.
에이단은 결국 아이작이 말하고 싶은 바를 대신해서 물었다.
“사드라자가 그 시체들을 공양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묘지가 없잖아. 그렇다고 바다가 없는데 수장했을 리도 없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아이작은 그렇게 말했다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얼마든지 다른 이유로 시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확실한 건 한번 그런 짓을 저지른 놈은 언제든 또 저지를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에이단, 사드라자는 천년 동안 스캐빈저로 살아온 놈이야. 천 년 전 고위사제다운 명예나 고결함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그게 사드라자 탓은 아니야. 하지만 천 년 전 사드라자와 지금의 사드라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사람을 바꾼다.
큰 정신적 충격을 겪은 사람이 성격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는 많다.
사드라자는 둘 모두를 겪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사드라자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우리에게 조금 실망하고 말겠지. 문제는 사드라자가 배신한 경우다. 그러면 이사크레아 여명군 자체가 파멸할 수도 있어. 그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잖나?”
“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드라자가 과연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저희를 배신할까 싶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굳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더라도 소금 사막을 깨뜨릴 수 있을 테니까요.”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에이단의 말이 맞다. 하지만 소금 의회로서 승리를 경험해 본 아이작은 사드라자의 의식이 다른 욕심을 부추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천년의 세월과 고난, 고독에 대한 어떤 보상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개 스캐빈저는 독점하기 위해 신의도 도덕을 내려놓은 존재다.
단지 그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를 의심하는 것뿐이었다.
***
아이작은 필요한 제물을 찾아서 남하하고 또 남하하다가, 마침내 외경에 가까운 영역에 도달했다.
외경은 그의 생각보다 미르미아 가까이 존재했다.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어떻게 도시를 세웠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천 년 전 대제국들은 성지 루아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시 문명의 중심은 이쪽이고, 변방은 지금의 게르토니아 제국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미르미아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리히트하임 쪽이 외경이나 다름없었을지도.
그렇다고 아이작은 그 광기 어린 영역에 가까이 다가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외경이라고 해서 무슨 선처럼 딱 잘라 정해진 국경선은 아니고, 그저 빛과 그림자 사이에 있는 애매한 부분일 뿐이다.
실제로 ‘외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의 두께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한다.
“저 너머에는 대체 뭐가 있습니까?”
빛의 법전의 질서가 미치지 않는 외경은 가혹하고 잔인하다.
마른 돌덩이로 가득한 사막의 계곡 위에서 에이단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응시하는 남부는 갈수록 짙은 먹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판판한 회색의 황무지 너머에서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은 외경은커녕 그 윗줄기에도 닿지 않았지만 저 황무지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기운은 에이단의 속을 메슥거리게 만들었다.
“나도 모른다.”
“아이작 님이 뭘 모른다고 하시는 말씀은 처음 듣는 것 같군요.”
“나도 모르는 게 많다. 솔직히 내 나이 또래 애들에 비하면 백치나 다름없을걸.”
“신들의 비밀을 엿듣고 우르반수스의 그림자를 들춰보신 분께서 말입니까?”
“당연하지.”
아이작은 진심이었다.
실제로 아이작은 이 시대 평민이라면 상식인 파종기, 산나물 구분법, 짐승 도축법, 장작으로 써도 되는 나무와 아닌 나무…… 등등 모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배고프면 짐승을 잡아서 포식하고, 수도원에서 먹고 살 방법을 찾아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했다. 아마 촉수 없이 이 세계에 던져졌다면 아이작은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경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빛의 법전의 질서가 미치지 못해, 도망친 고대신들과 혼돈의 권속들이 도망친 곳’이라는 것이 설정의 전부인데, 아이작은 그 모습이 어떤 마경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저쪽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아이작 또한 혼돈의 권속이라면 권속이지만, 저곳에 가까이 가선 안 된다는 어떤 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외경 너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안 좋았으니.
아이작은 회색 황무지와 어우러진 먹구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너머에 뭔가 있다는 듯이. 느리게 꿈틀거리는 먹구름은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배신자.]마침내 구름과 황무지가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갈라진 지평선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검붉은 혓바닥이 넘실거렸다.
[약속을 지켜라, 배신자……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았나.] [어째서 당신의 권속들을 버리시나이까, 신이시여…….] [결국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배신자의 수작질은 단지 약속의 이행을 늦출 뿐이다.]아이작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들에 휘청거리듯 움직였다.
그의 목구멍 뒤쪽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목구멍 뒤쪽에도 또 다른 촉수가 존재해서, 저 지평선 너머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들에 답하려는 것 같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꺼져라, 미친 자살광들아!!”
아이작은 무심코 버럭 소리쳤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나자빠져 넘어졌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의 뒤에서 에이단이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단은 황급히 손을 놓고 화난 듯 소리쳤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아니,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보다가 중얼대면서 절벽 끝으로 걸어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말리다가 허리를 붙잡았는데 그대로 저도 끌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작은 당황했다. 자신이 그런 상태였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기다리던 장소에서 약간 떨어진 상태였다. 여기서 세 걸음만 더 갔으면 천길 낭떠러지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자신의 정신을 두들겨 깨우지 않았으면 떨어졌을 것이다.
아이작은 지평선을 다시 보았다. 아까처럼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나타나던 혓바닥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구름의 모습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고맙군.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허, 참…….”
자신과 달리 에이단이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름 없는 혼돈과 상관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작은 우르반수스의 압력을 생각했다.
그들이 저 너머에서 아이작을 향해 부추기고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리 오라고. 자신들과 합류하라고. 그리하여 약속을 지키라고.
뭔지도 모르는 약속이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도 지키고 싶지도 않았다. 저런 미친놈들이 강요하는 약속이라고 해 봤자 정상적인 것도 아니겠지.
그때 아이작의 외침에 반응하듯, 먹구름이 갈라지면서 무언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이작 님!”
에이단이 뒤늦게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이작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기다리던 놈이 온 것이다.
“목마른 목구멍에 채울 포도주 자루가 오는군.”
아이작이 굳이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외경의 존재를 사냥하던 이유다. 목마른 만찬 의식을 성공시키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선한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놈만은 아이작이 소금 의회로서 승리를 거둘 때에도 잡았던 놈이기에 어디서 나타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준비해라, 에이단. 이놈만 잡고 돌아갈 테니.”
***
쿵. 넬은 들고 온 거대한 생물의 사체를 힘겹게 어부의 집 앞에 떨어뜨렸다.
워낙 거대해서 넬이 없었다면 함부로 끌고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병사들은 어부의 집 앞마당에 놓인 날개 달린 뱀을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칼레아툴. 외경으로 도망친 고대신. 하늘에 대한 동경에서 태어난 신이다. 비와 벼락을 다루는 힘이 있다더군. 이 정도면 부족한 신성을 채우기에 충분하겠지?”
원래 폭풍우를 몰고 다니며 그 안을 유유자적 헤엄쳤을 이 고대신은, 외경에서 무슨 가혹한 일을 겪은 건지 온몸이 뒤틀리고 곳곳에 포자 같은 촉수가 자라나 있는 상태였다. 이미 신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신선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었다.
실제로 어부의 집 안에서 만난 사드라자도 만족한 눈치였다.
아이작이 지난 며칠간 구해 온 괴물과 고대신의 사체는 부족한 제물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사드라자는 촉수를 꾸물거려 칼레아툴의 사체를 검은 피라미드 안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정도면 충분한가?”
“좀 더 부탁한다면…… 안 되겠지?”
“어려워. 우리에게도 일정이 있다. 분명 네가 얘기한 양보다 더 많이 준비했을 텐데?”
사드라자는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이제부터 나는 의식을 진행하겠다. 그동안…… 외경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 미르미아를 지켜 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