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성배기사 (5)
넓지 않은 막사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로튼해머는 아이작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는 이솔데를 보고 멈칫했다.
“선남선녀가 그렇게 자상하게 챙겨주는 걸 보니 아주 보기 좋군요.”
“생명의 은인을 돌봐주는 거니 아이작 씨가 부담스러워할 말은 마세요. 단장님.”
로튼해머가 놀리려는 듯 말했지만 이솔데는 능숙하게 넘겼다.
“여튼 제가 얘기한 것 게벨 씨에게 여쭤봐 주시고 답변 주세요. 게벨 씨의 결정이 중요하니까.”
이솔데는 붕대를 챙겨 들고 나갔다. 로튼해머와 아이작이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이란 걸 알아본 눈치였다. 아이작은 게벨에게 좋은 일인데 왜 그의 결정이 중요한가 생각했지만,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로튼해머는 잠시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세대에 천재가 또 하나 더 나타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다른 또 한 명의 천재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천재가 바로 제 뱃속에서 소화됐지만 말입니다…….’
아이작은 적당히 겸손을 표하기로 했다.
“이안이라고 했던가요? 그래도 실력이 대단하던데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이라서 그렇지 나이를 생각하면…….”
“신입? 하하.”
로튼해머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안은 내 아들이자 직접 가르친 제자야. 수련생이었던 시절에도 바르바리 토벌에 데려가 몇 번이나 실전을 경험했고. 상급 검술을 다루는 데에는 미진한 감이 있지만, 또래 중에서는 그 아이를 이길 수 있는 아이가 없다고 자신하네.”
“…….”
“원래는 다른 신입 성기사를 내보내려 했었지. 그런데 자네 실력을 보니 보통이 아니더군. 그래서 급하게 바꿨어.”
그런 녀석이 차세대 성기사들의 미래라니. 생각보다는 성기사들 수준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이작이 먹어 치운 칼센의 재능이 미쳤거나.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치챈 듯 로튼해머가 미소 지었다.
“늙은이 같은 말이지만 여명군을 경험해 본 세대와 아닌 세대의 수준 차이가 크긴 해. 게다가 최근에는 성기사들 수준도 전체적으로 많이 떨어졌고. 아무래도 산적 토벌과 성전은 다르니까.”
“아…… 그렇군요.”
아이작은 금방 납득했다.
게벨만 해도 대단한 실력이다. 로튼해머도 싸우는 걸 직접 보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게벨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차세대를 기대할 만한 희망도 있긴 했지. 어이없이 꺾이긴 했지만.”
또 칼센 이야기다. 자꾸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튼해머는 아쉬움과 동시에 기시감, 그리고 아이작에 대한 경고를 칼센이라는 인물 하나로 계속해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를 본 것 같군.”
“제게 과분한 기대를 걸고 계신 것 같은데요.”
“내가 키운 제자를 일방적으로 짓밟아 버린 천재에게 어찌 기대를 안 하겠나? 게다가 그 천재가 힘들고 고생만 하는 숭고한 성배기사의 길을 걷겠다고 자청하는데.”
‘이건 비꼬는 건지 말리는 건지.’
아마도 말리는 것일 것이다. 자꾸 칼센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뒤이어질 로튼해머의 말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권하네. 아이작,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오게.”
***
아이작은 미묘한 침묵을 지킨 채 로튼해머를 바라보았다.
“자네라면 내가 전적으로 밀어줄 수 있네. 내 후임 자리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고.”
“이안이 실망하겠는데요.”
“자네라면 납득할걸. 납득 못 하겠다고 하면 코뼈를 눌러놓게.”
로튼해머는 진지해 보였다. 성기사단의 자산을 전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선택지였지만 아이작의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튼해머가 저렇게 부득부득 아이작을 꼬드기려고 하는 데에는 그의 실력 말고도 다른 이유가 엿보였다.
그를 감시하기 위함이리라.
“제가 혼자 나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꼬드김에 속아 배교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튼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속내를 들켰다는 민망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되레 당당하게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내가 왜 걱정하는지도 알겠군.”
“칼센 밀터 얘기겠지요. 그냥 터놓고 말씀하십시오.”
“좋아. 나는 칼센을 수련생이었던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네. 조용하고, 겸손하고, 상냥한 젊은이였지. 아무도 녀석이 배교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러나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독실한 신자가 저지르는 것이니.
“솔직히 나는 자네를 보면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네. 뭐, 녀석만큼 겸손하거나 상냥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나이에 맞지 않는 재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
“그래서 옆에 두고 감시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지. 그러면 안 될 거 있나? 명예와 부, 모든 것이 녀석에게 보장되어 있었어. 심지어 명천사가 되는 것까지도! 그런데도 녀석은 배교를 선택했지.”
로튼해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녀석이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배교할 만큼의 사정이 뭐였는지 궁금할 정도야.”
아이작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자칫 잘못하면 로튼해머도 배교자로 몰 수 있는 발언이었다. 칼센과의 관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의 배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평생을 빛의 법전에 헌신해온 성기사단 단장을 흔들 만큼.
“나는 녀석이 주변인들과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들었네. 그래서 엉뚱한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로튼해머는 강렬한 눈빛으로 아이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도 황야를 혼자 돌아다니다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을 뿐이네.”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씀드렸지만, 그 건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지?”
아이작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짚으며 말했다.
“저는 예브하르 수도원장님께 증명을 받았습니다.”
빛의 법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경우 화상을 입히는 기적.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기적이지만, 아이작은 그것을 몇 년 전 수도원장에게 받았었다. 로튼해머는 잠시 멍한 표정을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믿음의 증명? 배교했다는 증인이 있을 때에나 실행하는? 그걸 너만큼 어린애한테?”
확실히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속으로 수도원장을 욕했지만 그 역시도 대가를 치렀으니 조금만 하기로 했다.
“예. 그리고 수도원장님의 손목이 불타서 재가 되었지요.”
“기적을 수행한 수도원장의 손목이 날아갔다고?!”
로튼해머는 막사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이게 어느 정도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인 듯했다.
아이작은 재빨리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예브하르 수도원장님께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떠들지 말아주십시오. 수도원장님은 신중하신 분입니다. 분명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셨겠지요.”
로튼해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너 정도의 재능과, 불과 얼마 전 이 근처에서 칼센이 배교를 저지르고 사라진 사건을 생각하면…….”
또 칼센과 연결 지어서 어떻게든 납득한 모양이다.
어쨌든 ‘믿음의 증명’ 기적을 받았다는 말은 로튼해머에게 대단한 신뢰감을 준 것 같았다. 로튼해머는 더 이상 아이작이 배교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순수하게 그의 실력을 탐내게 되었는지, 계속해서 브리엔트 성기사단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
“아직은 곁에 두고 한참 가르쳐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튼해머는 어쩔 수 없이 약속대로 그를 성기사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물론 성기사로 인정받는 과정은 ‘인정합니다’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 기사들처럼 봉토와 충성맹세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임에서야 성기사단이 소속된 수도원을 찾아가서 퀘스트 받고 가입하는 걸로 땡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적어도 실력을 보증해 줄 상급 성기사와 사제가 한 명씩 필요했다.
어찌됐든 그리하여 아이작을 성기사로 임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소는 아이작의 결투를 위해 마련된 공터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 문제인 증인이 될 사제와 성기사들은 차고 넘쳤다. 아이작의 실력을 인정해 줄 로튼해머의 직위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단심문관인 이솔데까지 증인으로 나서 주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성기사단마다 전해지는 일종의 ‘전통’을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 아이작은 조금 긴장했다. 게벨이 ‘성기사단마다 가입할 때 절차가 다 다르다’고 했는데, 예로 든 것들이 전부 기상천외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섯 번은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성기사들이 단체로 달려 들어서 구타를 하거나, 뺨을 한 대씩 얻어맞거나…… 아무래도 군사 조직이다 보니 주로 얻어맞는 것들이 많았다.
‘성기사단이란 사실 대학생들이랑 크게 다를 게 없을지도.’
“준비됐나?”
로튼해머는 아이작을 향해 씩 웃으며 다가갔다. 아이작은 이빨 몇 개 날아가는 것까지는 각오했다. 하지만 로튼해머가 칼을 뽑아 들자 정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 숙이고.”
다행히 칼로 얻어맞는 건 아닌 모양이다. 로튼해머는 의외로 평범한 기사 작위식처럼 검을 옆면으로 눕혀 아이작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나,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로튼해머는 세상에 질서와 빛을 가져다주신 빛의 법전의 이름으로 아이작에게 묻겠다.”
“예.”
“그대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그대는 악에 맞서고 힘 있는 자의 부조리에 분노할 것을 맹세하는가?”
“예.”
“나,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로튼해머는 세상에 질서와 빛을 가져다주신 빛의 법전의 이름으로 성기사 아이작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한다.”
딱. 로튼해머는 검 옆면으로 아이작의 양쪽 어깨를 두들겼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이내 아이작은 로튼해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났다. 사방에서 성기사들과 수련생들이 몰려와 아이작의 성기사 임명을 축하해 주었다.
아이작은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축하를 받았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이게 전부인가? 싶을 때 로튼해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쉽군. 우리 성기사단에 들어오면 얼굴에 똥을 바르고 성기사들에게 한 대씩 얻어맞는 전통이 있는데…… 성기사 임명까지만 해서 입단 신고식은 치르지 못하겠군.”
아이작은 그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아이작의 의심을 깨뜨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성기사로의 전직이 진행되었습니다.] [전직 조건 완료!] [성물을 소지하고 있어 성배기사로 전직이 가능해집니다.] [성배기사로 전직하시겠습니까?]의식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진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이작은 ‘예’를 선택하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십 번 반복해서 결론을 내렸듯, 아이작은 결정했다.
단지 버프가 좋아서,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혼자 다녀야 해.’
아이작은 붕대에 감싸여 있는 왼손 손바닥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헤인켈을 처치하면서 느꼈다. 그가 가진 검술의 재능도 분명 대단하지만, 이 빈약한 몸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아이작은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야 이 세계에서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배기사를 함으로서 받을 수 있는 ‘숭고한 여정’ 버프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이작은 혼자 다녀야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컸다.
예를 들어 아이작의 지금 검술 실력으로는 로튼해머나 게벨을 이길 수 없다. 동시에 일반 성기사 둘만 상대해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촉수를 사용한다면, 어떤 적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미 명천사가 될 예정이었던 칼센까지도 처치해 버린 마당에 어지간한 적들은 다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성기사단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지만, 촉수를 들키면 오히려 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아이작의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배기사를 택했지.’
중요한 것은 결과다.
촉수만 직접 보지 않는다면 아이작이 무모한 곳에 뛰어들었다가 적의 머리를 들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를 칭송하고 떠받들 것이다.
물론 평생 혼자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2년. 여명군이 시작되기까지의 2년 동안만 성배기사로 돌아다니자.’
그동안 아이작은 적당히 명성을 떨치고, 강한 놈들을 포식하고, 성물을 찾아 강해지면 된다.
그때쯤이면 굳이 촉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