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63)
363화. 부르는 자가 부르나니 (5)
청동빛의 비늘을 가진 거대한 물뱀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부르는 자의 살점을 먹었을 때 나를 보고 있던 그 물뱀이군.’
아이작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아문달라스십니까?”
청동빛 물뱀은 혀를 날름거리다가 이내 정신적 파동으로 아이작에게 대답했다.
[그렇소. 어쩌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는군.]아문달라스를 우르반수스에서 만난 것이 불과 오늘 저녁이다. 그런데 아이작은 두 번이나 우르반수스에 빠졌다가 돌아왔다.
이곳이 소금 의회의 성지, 미르미아인 것을 감안해도 너무 많았다.
아문달라스는 뭔가 복잡한 심경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부름에 휘말린 것을 알고 급히 왔소.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소.]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유독 정중하게 대답한다고 느껴졌다. 원래 예의 바른 명천사긴 했지만, 지금은 쩔쩔매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자신의 격이 그만큼 상승했다고 생각하는 대신, 방금 본 환상을 떠올렸다.
아이작이 당할 뻔한 일이 아문달라스의 어떤 트라우마를 자극했다고.
“걱정 마십시오. 무사하니 된 일 아닙니까.”
아이작의 담담한 대답에 아문달라스는 안도하는 듯했다. 그녀는 과거 루앗딘을 배신했다가 소금 의회가 당했던 꼴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아이작은 아직 등대지기에 비견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생전 루앗딘 못지않은 업적을 세우고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그대가 부름에 휘말리지 않도록 억지로 해변까지 밀어 올린 상태였소. 하지만 깨어나질 않아서 초롱아귀를 부를까 하던 참에 그대의 권속이 나타났지.]아이작은 헤사벨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문달라스의 말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작의 대답만으로 정황을 유추 중이었다. 어쨌든 아이작이 사과를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니, 천사 앞에서도 당당해도 좋다고 판단한 듯 콧대를 세운 모습이었다.
‘역시 부름은 의도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부르는 자께서는 아직 잠들어 계신 것이지요?”
[그렇소.]아무래도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이 라엘과 만난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본 것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바다에 빠져있을 때…….”
아이작은 자신이 본 환상인지 우르반수스인지 모를 풍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번성하는 미르미아, 부둣가에 서 있는 아문달라스, 소년 사제 라엘, 그리고 지시가 이뤄진 후 파멸하는 미르미아까지.
자신이 본 것이 우르반수스였다면 아문달라스가 모를 리가 없다. 명천사들은 우르반수스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자들이니까. 그 말은 즉, 자신이 본 것이 우르반수스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뜻이다.
아이작이 ‘지워진 역사’를 보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아문달라스는 크게 놀란 눈치였다. 다만 아이작도 라엘이 마지막에 중얼거렸던 ‘꿈꾸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등대지기나 흰올빼미보다는 낫겠지’라고 했던 말은 생략했다.
부르는 자가 아이작의 존재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은 소금사막조차도 예상했다는 것이다. 교단의 파멸을 예측했으면서도 그걸 지시한 신을, 아문달라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역시나, 아이작이 본 것은 우르반수스가 아니었다.
[그대가 본 것은 미르미아에서 있었던 일이 맞소. 하지만 실제와는 다르군.]“실제와 다르다?”
[라엘…… 그러니까 부르는 자께서는 그리 조리 있게 말씀하지 못하오. 고집부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뤄질 때까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기다리시지. 물론 깊은 뜻이 있을 때도 있으시지만, 인지를 초월하여 판단하는 그 능력은 명천사인 나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소.]아이작은 저 말이 비아냥인지 푸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문달라스 말대로라면, 라엘이 실제론 그냥 떼를 쓰기만 했고, 제대로 된 설득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의 인격이 반드시 성숙하고 현명하리란 법은 없다. 어쨌든 숭배와 신앙만 있으면 일개 자연물도 신이 될 수 있으니까.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이 한 말을 되새겨보다가 말했다.
[어쩌면 그대는 부르는 자의 꿈을 들여다본 것일지도 모르겠소.]“꿈?”
[부르는 자께선 사실 내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이지. 그래서 꿈에서라도 그렇게 투덜거리신 걸지도. 신의 꿈을 들여다보다니, 귀중한 경험을 했구려.]신의 꿈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귀한 경험이기는 하다. 부르는 자는 미르미아 수복 기념으로 미르미아가 파멸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번 일이 어딘가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부르는 자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파멸을 보여주면서, 등대지기나 흰올빼미보다는 나은 선택을 하라고.
‘그들이 대체 무슨 선택을 했길래?’
***
소금 사막이 깨진 여파는 미르미아 주변에만 미치지 않았다.
거의 즉각적으로 전 세계 곳곳에 흩어진 소금 의회 선장들이 부름을 들었고, 무슨 상황인지 알기 위해 서로에게 연락을 취하고 회의를 소집했다. 세계 곳곳에서 의회가 열렸고, 미르미아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에이단 선장님, 배가 옵니다!”
미르미아 앞 부두에서 기다리던 에이단은 빠르게 접근하는 배가 누구 배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배는 빠르게 다가오다가 매끄럽게 안착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그 배가 멈추기도 전에 옌코스 하레가 뛰어내리듯 내려왔다.
“에이단! 에이단 선장!”
옌코스는 에이단을 발견하자마자 펄쩍 뛰면서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과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는 다짜고짜 에이단을 끌어안았다.
에이단은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주 안아주었다.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제가 천 년 만에 미르미아 항구에 배를 댄 첫 번째 선장이라고요?”
“현실입니다. 옌코스 선장님. 그리고 현실은 현실답게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요.”
옌코스는 이 경사스러운 날에 그 무슨 불경한 소리냐며 화를 내려다가 주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소금 의회 신도들이라면 으레 듣고 자라는 ‘미르미아 최후의 날’에는 그 대도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번창했는지에 대한 묘사가 반드시 들어있다.
그러나 지금 그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황량하고 바스러진 폐허에 불과했다. 멀쩡한 건물은 찾기 힘들었으며, 곳곳에 아직 수습하지 못한 괴물들의 사체들로 썩은 내가 풍겼다. 하지만 옌코스는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제가 꿈에도 그리던 풍경이라고는 못하겠군요. 하지만 우리들의 성지를 이렇게 되찾고 신의 음성을 되찾았으니 그걸로 충분히 복된 일입니다.”
“생각보다 늦게 오셨군요. 사막이 깨지자마자 오실 줄 알았는데.”
“사막 주변을 제대로 못 본 모양이군요? 바깥쪽은 아직 소금둑이 다 무너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소금둑이 무너졌을 때 균열 안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기세가 어마어마해서 배가 지나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죠. 충분히 넓어지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하지만 지금 당장 다시 미르미아에서 떠나야 할 판입니다. 주거나 위생은 물론이고 기반 시설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거점으로 재활용하려면 필요한 물자를 실어와야 해요.”
오랫동안 저주받은 태양 아래 방치된 땅은 지력을 모두 상실한 황량한 사막이 되어 있었다. 주변에 교류할 만한 자들이라곤 말 그대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웃들뿐이니,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입니다. 미르미아 앞바다에서는 물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아요.”
“물고기가? 흠, 염도 문제일 수도 있겠군요.”
소금 사막은 빠르게 녹고 있지만 그 덕분에 소금기가 다른 바다에 비해 몇 배는 높았다. 바다 생물이라도 염도가 이렇게까지 높으면 살 수 없다.
사실, 미르미아 앞바다에 바다 생물이 없는 것은 대부분 소금 사막 균열 아래 부르는 자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에이단이 알지 못했기에 그저 염도 문제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옌코스가 으스대며 웃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쿵. 부두에 또 한 척의 배가 도착했다. 옌코스를 뒤따라 온 크고 화려한 배에는 황금우상 상단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소금 의회의 반응을 민감하게 포착한 자들은 눈치 빠른 상인들이었다.
배에서 곧 널빤지가 걸리고, 가장 먼저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노라와 그 호위로 따라온 샬록이었다. 레오노라는 익숙한 드레스 차림 대신, 돌아다니기 편리한 복장 위에 경갑을 걸치고 있었다.
레오노라가 손짓을 하자 이내 곧 어마어마한 물자들이 배에서 실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술과 밀, 의약품, 천 등 가장 시급한 보급 물자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에이단은 천년 묵은 고민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레오노라 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필요한 물자를 정확히 맞춰서 오셨습니까?”
레오노라는 에이단을 바라보며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물었다.
“천 년간 방치된 도시라고 들었는데, 상인이 수요와 공급도 예측 못 하면 쓰나?”
“……저희는 지불할 돈이 없습니다만…….”
“걱정 말게. 성배기사 앞으로 달아놓을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깃발이 안 보이는데.”
옌코스는 미르미아를 살펴보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에이단은 머슥한 얼굴로 뒤통수를 만졌다.
“아이작 님께서는 이미 성지 루아로 향하셨습니다. 소금 사막이 깨진 것은 분명 불사교단도 알았을 테니,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고.”
“그래? 그럼 동쪽으로 향했겠군.”
에이단은 당장이라도 아이작을 뒤따라갈 듯한 레오노라를 보고 당황했다.
“레오노라 아가씨, 설마 뒤따라가실 생각이십니까?”
“성배기사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레오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명군 본대의 기세가 심상찮다. 벌써 벨 슬라프를 불태우고 남하 중이야. 칸의 군대가 새롭게 참전했는데도 붉은 성배의 군대는 패퇴했고. 생각보다 여명군 본대의 진군 속도가 빨라. 천사가 참전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야.”
“그 말씀은…….”
에이단은 레오노라의 말 뒤에 숨겨진 뉘앙스를 읽고 긴장했다.
“그래. 불사 교단은 여명군 본대와 싸울 힘조차 아끼고 있어. 그 힘이 이사크레아 여명군을 내리치려고 준비한 것이라면…… 성배기사는 아주 곤란해질 거다.”
***
벨 슬라프는 ‘언덕의 꽃’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꽃이란 언덕 위에 세워진 장미 꽃잎처럼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애당초 붉은 성배 클럽의 신, 무희가 이곳의 풍경을 아름답게 여겨 이름 지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제 그 꽃밭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에 세워진 이 도시는 수백 년간 올칸 규율과 붉은 성배, 빛의 법전 사이에서 뺏고 빼앗기는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성은 수없이 증축을 거듭하면서 꽃잎처럼 여러 겹이 되었다.
수없이 주인이 바뀐 끝에 최종적으로 벨 슬라프를 차지한 자는 불사 교단이었다.
그리고 동부 최대의 요충지답게, 벨 슬라프는 불사 교단이 지배하는 우르단투 제국의 최북단 도시로서 기능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내성으로 대피해라!]자가가가각! 뜨거운 열과 섬광이 성벽을 긁는 소리가 맹렬하게 울려 퍼졌다. 도망치다 녹아내린 바위에 깔린 데스나이트 하나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자신의 냉기에 의해 석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등대’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은 그런 데스나이트 석상조차 녹여 버렸다.
그 모습에 데스나이트 기사단장이 치를 떨며 외쳤다.
[저놈들, 벨 슬라프를 점령할 생각이 없다! 후퇴해!]보통 군대가 후퇴한다면 후문으로 대피하겠지만, 언데드인 이들의 ‘퇴로’란 좀 더 선택의 폭이 넓었다. 그들은 인근 강으로 이어지는 내성의 우물을 퇴로로 선택한 것이다.
물속에서 백 년도 버틸 수 있는 언데드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데스나이트 기사단장은 빛의 법전이 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다른 세력이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면 점령한 뒤 요새화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수백 년간 수없이 이 도시를 뺏고 빼앗기면서 항상 그래왔다. 하지만 성벽 밖의 여명군은 그딴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말 그대로 벨 슬라프 전체를 ‘녹여 버리고’ 있었다.
‘마치 두 번 다시 이곳을 사용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