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64)
364화. 생과 사가 무너진 땅 (1)
등대가 마침내 성벽 일부를 지져 뭉개 버리자, 그 틈새를 노리고 거대한 백색거상이 맹렬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삼십여 미터에 이르는 사슴 형태 백색거상이 부딪친 순간, 끓어오르는 용암이 유성우처럼 흩뿌려졌다. 그 틈을 타 여명군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죽은 자들에게 죽음을!”
병사들이 직접 달려들지 않아도 불사 교단은 이미 퇴각하고 있었고, 어차피 점령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이상 기적과 성물만으로도 충분히 벨 슬라프를 초토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명군은 굳이 펄펄 끓어오르는 요새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쿵, 쿵, 쿵.
백색거상들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벨 슬라프를 짓밟아 다졌다. 그 발굽 아래 불꽃이 뜨겁게 타올랐지만 백색거상은 그저 묵묵히 다지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 행동은 벨 슬라프 내성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언데드들을 완전히 짓밟아 뭉개 버리는 동시에, 퇴로를 막아 버리는 효과도 있었다.
유일한 퇴로였던 내성의 우물이 녹아내린 용암에 막혀 버리자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뒤늦게 정석적인 퇴각로─후문으로 탈출하는 길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그쪽도 여명군에 의해 포위당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길은 결사항전뿐이었다.
그러나 불사 교단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언데드 병사들 상당수는 여전히 쏟아지는 등대의 포격을 피하면서 성벽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그들은 현 상황에 당혹감과 분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온다. 쏴라.]짧막한 데스나이트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언데드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집어던졌다.
쉬리리릭! 백 개의 창이 일제히 하늘을 가로질렀다. 몰려드는 병사들의 수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숫자였으나, 그 전과는 그렇지 않았다.
“컥, 커헉!”
쉬릭, 콱! 콰드득! 백 개의 창은 전부, 단 한발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백 명의 목을 꿰뚫었다.
전쟁에서 사용되는 화살 대부분이 빗나간 채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창을 던진 이들이 전원 교단의 정예인 ‘불사투창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이 한바탕 쏟아진 뒤 백 명의 시체가 창에 꿰뚫린 채 서 있는 풍경은 섬뜩했다. 선두에서 달리던 자들이 일제히 몰살당한 광경은 누구라도 움찔할 만한 광경이었으나, 여명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믿음이 부족한 자가 가장 먼저 죽을 것이다!”
광신도 하나가 유리 눈알을 번뜩거리며 시체 사이를 뚫고 달려갔다.
불사투창병들은 이 무적의 논리에 대한 대답으로, 재차 준비한 창을 집어던졌다. 그중 한 발은 선두에서 뛰어오는 광신도를 겨냥한 것도 있었다.
굳이 많이 던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반드시 한발이면 놈을 죽일 테니까.
광신도는 창을 쳐내려는 듯 허우적거렸지만 실패했다. 창은 순식간에 광신도의 눈을 꿰뚫었다. 또 다시 수많은 시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광신도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휘청대더니, 자신의 눈을 꿰뚫은 창을 단숨에 부러뜨렸다. 그리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을 부르짖으며 달려들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불사 교단 언데드들마저 경악했다.
“으아아아아! 믿음 부족한 자가 먼저 죽는다!”
그 광신도의 영웅적인 돌격을 뒤따라 다른 병사들도 달려들었다.
광신도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궈진 성벽 잔해 위로 올라갔다. 단지 올라선 것만으로 옷에 불이 확 붙자 언데드들은 이번에야말로 자신들이 죽이지 못한 저 광신도가 불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빛, 빛, 빛의 법전께서 나를 가호하신다!”
광신도는 뜨겁게 부르짖으면서 녹아내린 용암 위를 성큼성큼 걸어왔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그 모습에 무언가를 떠올린 것은 언데드들만이 아니었다.
보는 모두가 광신도의 모습에서 가장 유명한 명천사, 등대지기를 떠올렸다.
[물, 물러나라!]데스나이트가 다급히 지시했다.
등대지기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광신도의 뒤를 따라서 다른 여명군 병사들도 일제히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역시 온몸이 불타오르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기꺼이 끓는 바위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뒹구는 자는 뒤에 쫓아오는 병사들의 발판이 되었다.
벨 슬라프 안으로 순식간에 수백 명의 불타오르는 여명군 병사들이 난입했다. 언데드 병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그들을 향해 창을 내질렀지만, 뻐걱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창이 미끄러졌다.
언데드 병사는 그 불타고 찢어진 옷 사이에서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가 마치 흑요석처럼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언데드 병사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불타오르는 광신도가 휘두른 도끼가 그의 머리를 쪼개고 불을 질렀다.
데스나이트들은 이 일방적인 상황에 이를 갈았다.
불사황제 베셰크에 대한 원망은 하지 않았다. 최전선 요새에 선 순간 이미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원망은 그들의 적이 아닌 동맹을 향하고 있었다.
[왈라이카 왕국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저거 끝장난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지요?”
벨 슬라프 인근의 언덕. 왈라이카 왕국에서 파견된 왕실 군대, 일명 ‘꼬챙이 군단’으로 일컬어지는 정예부대는 먼 곳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벨 슬라프가 포위당하지 않도록 전장의 한 축을 맡아 여명군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요새화시킨 고지대에서 철저한 방비와 기적으로 무장하고 대기하는 것만으로도 여명군이 쉽게 벨 슬라프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빛의 법전은 그들의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대응했다.
왈라이카 군의 존재를 철저하게 무시한 채 오로지 벨 슬라프에만 집중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예비대를 남겨 두긴 했지만, 꼬챙이 군단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여명군 본대의 뒤통수는 훤히 비어 있어서 당장이라도 공격하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군단장의 부관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슬쩍 물었다.
“지금이라도 공격 명령을 내릴까요? 아까보다 더 무방비해진 거 같은데.”
동맹이라면 당연히 내릴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꼬챙이 군단의 군단장을 맡은 말러 로어노크는 판단을 다르게 했다.
“저거 봐. 벨 슬라프는 지금 곰 앞에 뛰어든 여우 꼴이야. 여우가 앙칼지게 물어뜯는 사이 우리가 곰 옆구리에 창 한 대를 박아 줄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다음은?”
말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뒷일 걱정할 것도 없이 저 여명군 본대 중 일부만 진로를 북쪽으로만 틀어도 왈라이카 왕국은 불바다가 될 거다.”
“우리가 여명군에 심어놓은 첩자들이 몇 명인데 설마요?”
“그 첩자들이 경고했다. 전황 자체가 확실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끼어들지 말라고. 어떻게 버티기야 하겠지만 굳이 우리가 피해를 부담할 필요는 없는 전쟁이지.”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말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르토니아…… 아니, 이제는 국명조차 무의미하군. 빛의 법전은 완전히 미쳤어. 대체 왜 이런 무의미한 피를 흘리는 거람?”
대부분의 왈라이카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말러 역시 전쟁은 실패한 음모와 계략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말러라면 저렇게 시끌벅적하게 대군을 이끌고 성물로 도시를 뭉개 버릴 것도 없이, 영주나 성문지기를 매수하거나 지속적인 암살로 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여명군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정면에서 쳐들어가 성물을 처박고, 신수를 처박고, 병사들을 처박아서 깨부쉈다. 말러가 보기에는 단단히 미친 짓이었다.
“그래도 벨 슬라프가 점령당하면 우리 옆구리가 뜨끈뜨끈하지 않겠습니까?”
“저 꼴을 보아하니 점령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이걸로 확실해졌어. 여왕 폐하 말씀대로 여명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놈들은 이대로 남하할 거야.”
말러와 꼬챙이 군단이 참전한 진짜 목표는 ‘여명군이 정말로 성지 루아로 향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저 무지막지한 전투를 관찰한 결과, 의심의 여지 없이 빛의 법전이 이번 여명군에 사활을 걸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방의 소국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말러는 씩 미소 지었다.
“빛의 법전이든 불사 교단이든 전쟁이 끝나면 쇠약해질 거야. 조용히 힘을 아끼고 있던 쪽이 이기는 거지.”
말러는 그렇게 말하곤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 군단병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사 교단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붉은 성배의 최정예군단은 그렇게 최전선에서 창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그대로 북부로 퇴각했다.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데스나이트 기사단장이 분노의 노성을 터뜨렸으나 들리지 않는 거리였다.
***
“꼬챙이 군단이 퇴각했다는 보고입니다.”
제국 기사단장, 펠트런의 보고에 교황 대행 호르헬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지. 모기 같은 놈들. 절대로 자기보다 강한 자한테는 덤비지 않으니까.”
꼬챙이 군단의 잔인함과 군기는 유명하다. 게르토니아 제국군도 함부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그 꼬챙이 군단의 잔인함과 군기가 발휘된 전장은 모조리 자신들보다 약하거나 수가 적은 대상들뿐이다.
왈라이카 귀족들은 오로지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 싸울 때만 전력을 다한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경우는 대개 기습에 실패했거나 도망치지 못할 때뿐이다.
이번에도 그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추격대를 붙여 둘까요?”
“아니. 놈들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 전부 공성에 투입해라.”
“예.”
꼬챙이 군단의 퇴각 덕분에 여명군은 훨씬 더 벨 슬라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명군은 성기사들의 지휘 아래 넓게 포위망을 구성하며 언데드들을 착실하게 짓밟았다.
저녁이 될 무렵, 장미 꽃잎처럼 성벽이 촘촘하던 성, 벨 슬라프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성 그 자체가 녹아내려 바위가 된 모습은 장엄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자아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바위는 저녁이 되어서도 붉은 묘비처럼 빛났다.
여명군 본대가 거둔 영광스러운 첫 번째 승리였다.
그러나 전장의 상황은 영광과 거리가 멀었다. 호르헬은 전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이미 곳곳에서 시체를 태우기 위한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즐비했다.
불사 교단의 공격은 ‘시체의 수’ 자체를 늘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어설픈 공격은 하지 않고, 확실하게 적을 죽인다. 시체가 곧 아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명군은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불사 교단에 비해 열 배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대승이로군.’
하지만 호르헬은 압도적 대승이라고 판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사 교단과 빛의 법전은 인명의 가치가 다르다.
언제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빛의 법전과 달리, 불사 교단은 오로지 개종자만을 진정한 신도로 받을 수 있다. 개종하지 않은 자는 지성이 없는 언데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종한 언데드 역시 한명 한명 최소 수십에서 길게는 수백 년간 경험과 지식을 쌓아 올린다. 무지렁이 광신도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운 여명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1:10 비율이면 싸게 먹힌 셈이다.
그리고 그 대승의 배경에는 호르헬이 기다려 왔던 ‘상징’이 있었다.
호르헬 눈앞에 해골탑이 높게 쌓여있었다. 언데드 군세 상당수는 벨 슬라프 바위 무더기 아래 파묻혔으나, 적지 않은 수는 이렇게 머리만 떼어 낸 채 수거되었다. 그들은 어떤 정신적 파동도 내뿜지 못하게 밀봉된 채 그저 장식물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 죽지 않는 그들이 죽음 대신에 맞이한 결과였다.
“수거한 머리는 이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대답한 것은 한쪽 눈이 파괴된, 흑요석처럼 온몸이 새까만 광신도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 모두 하나 같이 유리 같은 눈알을 번들거리는 검은 광신도들이 수백 명씩 줄지어 서 있었다.
“빛의 법전께서 가호해 주신 덕분에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찬양합니다. 사제님.”
호르헬은 히죽 웃었다.
‘그을린 자, 인간 검댕…….’
호르헬은 파수자 회의에 전해진 신탁을 떠올렸다.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천사들의 전언이었다.
가장 먼저 유리와도 같은 눈알로 천국에서 지상을 들여다볼 것이다. 이내 그 눈동자를 통해 뿜어져 나온 천국의 빛에 그을린 자들이 일어서 앞장서게 되리라.
그리고 마침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같이 이뤄짐과 같이…….
‘이로써 빛의 법전은 천년왕국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