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65)
365화. 생과 사가 무너진 땅 (2)
천년왕국의 도래를 예고하는 징조와 상징은 ‘그을린 자’ 외에도 많이 있다. 교단은 여명군을 진행하면서도 그런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해 왔고, 성전이 격화될수록 점점 그런 징조들이 서서히 등장하는 것을 포착했다.
천년왕국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리라.
성지 루아를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며 그들을 마중하리라고 호르헬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르헬 사제님. 성화가 준비되었습니다.”
주교 한 명이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하며 성화가 담긴 화로를 내밀었다.
공식적으로 호르헬은 일개 방랑승에 불과하다. 하지만 핵심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교황 대행으로서 실질적으로 여명군을 지도하는 그를 단순한 방랑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여명군의 얼굴은 데라 헤만의 황금사자 성기사단이지만, 사제들을 지도하는 자는 호르헬이었다.
호르헬은 화로를 들어 올렸다. 쇠사슬 끝에 달린 화로는 번뜩이는 백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안에 천국의 빛과 등대지기의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의 시선이 해골탑으로 향했다.
즉시 성화를 던져 이 불경한 배교자들을 영겁의 고통 속에 밀어 넣을 수도 있었지만, 호르헬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장 앞에 놓인 해골의 머리를 만져 밀봉을 해제했다.
[그냥 불태우지 뭘 하나, 대머리 사제.]기대했던 반응이 즉시 돌아왔다. 인신공격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
“네 비명이 듣고 싶어서.”
[오, 성화로군. 비명을 잊은 지 오래인데 간만에 목 좀 풀 수 있겠어. 목청 터지게 질러줄 테니까 귀담아들으라고. 너도 곧 실컷 지르게 될 테니 참고해야 할 거 아냐?]날카로운 웃음이 정신적 파동을 담아 울려 퍼졌다. 호르헬도 마주 웃었다.
그가 대화하는 상대는 벨 슬라프를 지키던 리치였다. 한때 빛의 법전 주교이자, 40년 전 있었던 11차 여명군의 참전자이기도 했다.
“어쩌자고 여기 남았나, 알 시네라.”
호르헬은 상대를 이미 아는 듯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알 시네라라는 이름의 리치는 이빨을 딸각거리며 웃었다.
[나를 아는 모양이군. 내 얼굴이 별로 변하지 않은 모양이지?]“나는 네가 공부하던 수도원의 수습 사제였다. 수련생들 기강 잡는다고 몽둥이 들고 다니던 네 모습을 기억하지. 그때는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네가 여명군에 참전했을 때만 해도 얼마나 신앙심 충직한 자였는지 안다.”
호르헬은 성화가 불타오르는 화로를 알 시네라의 두개골 가까이 가져다 대며 물었다.
“왜 배교한 거지?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가장 신앙심 깊은 사제와 성기사들이 지금은 불사 교단의 개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기까지 하지. 왜?”
알 시네라는 웃는 표정이었다. 원래 해골은 웃는 표정이지만, 호르헬은 알 시네라가 실제로도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왜 영원히 해골 노예가 되어서 돌이나 캐는 대신 리치가 되어서 영생과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는 거냐’라고 묻고 있는 거 맞나?]“내가 아는 선배는 고작 부와 영생 따위에 현혹될 자가 아니야. 교단에는 이미 그런 자들이 득시글거리지만, 적어도 선배는 아니었지. 그리고 내가 아는 무수한 성기사와 사제들 역시 그렇고.”
[위험한 구멍에 등불을 비추는구나, 대머리 후배. 왜 그게 궁금하지? 내가 무슨 달콤한 꿀단지를 받았는지 알면 너도 배교할 생각이 있나?]“……배교자들의 머릿속을 알아야 배교를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성지로 향하면 향할수록 네 의문은 점점 더 커지겠지.]알 시네라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등대지기는 천년왕국을 도래시키기 위해 여명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불사 교단의 천국은 이미 이 땅에 도래했어.]성지 루아.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무너뜨린 땅.
불사황제 베세크가 끌어내린 저승은 성지 루아를 우르반수스와 지상이 혼재하는 영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덕분에 죽어서도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기적을 얻었다.
그곳이 바로 불사 교단이 지키고자 하는 천국이다.
[불사 교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미 천국이라고 한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땅에 머물러 바르게 고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사실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이 모든 고생을 하는 중이라면, 내가 왜 그걸 부정해야 하나?]호르헬이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아니, 알 시네라가 진심으로 말한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거 뭐라 항변하려던 순간, 갑자기 알 시네라의 두개골이 덜컥 움직이면서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곤 단숨에 화로를 콱 이빨로 물어뜯었다.
성화가 단숨에 알 시네라의 두개골을 하얗게 불태웠다. 안에서부터 타오르는 알 시네라의 두개골이 섬광을 내뿜으며 연신 웃듯이 달각달각 흔들거렸다. 성화는 순식간에 해골탑을 불꽃으로 휘감았다.
망자들의 정신적인 비명이 터져 나오자, 둘러싸고 있던 그을린 자들이 일제히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유리알 눈동자에 성화의 빛이 반사되며 성화는 더욱 크게 타올랐다.
호르헬은 그 모습이 마치 천국의 불꽃이 광신도들의 눈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알 시네라에게 내뱉지 못한 대답을 씹어 삼켰다.
‘이 땅이 이미 천국이라고?’
그에게는 구역질 나는 헛소리였다.
‘이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자들이 가득한 땅이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천국은 엄격하게 선별된 진정한 선인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
“선생님, 정말로 저주받은 태양이 다시 나타난 게 아니라구요?”
“아닙니다.”
아이작의 단호한 대답에 에델레드는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사막을 응시했다. 엘릴 기사들조차 그들이 자랑하는 중장갑을 말없이 짐 속에 넣을 만큼 뜨거운 열기였다.
미르미아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이 열사의 사막지대는 기사들의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심마저 한 수 접게 만들었다.
아이작은 그들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소금 사막도 하루 만에 돌파하신 분들 아닙니까? 덥긴 하지만 저주받은 태양의 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요.”
아이작 역시 군대가 퍼지는 것을 대비해 태양이 낮게 뜬 오전이나 저녁 무렵, 혹은 밤에만 이동하고 있었다. 낮밤이 바뀌는 것을 피곤해하는 병사들이 많긴 했지만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지금 이사크레아 군도 사막 한쪽의 거대한 절벽 아래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해가 질 무렵 출발할 예정이었다.
“소금 사막 때는 다들 나름 각오가 되어 있었지요. 그 저주받은 땅에 대해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기도 했고, 어디 ‘얼마나 끔찍한지 한번 보자’ 하는 오기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그냥 더운 날씨잖습니까.”
“……그러니까 이 더위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기에 의지가 샘솟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소금 사막은 천 년간 메마른 황무지와 저주받은 태양이라는, 소위 기사의 가슴을 불타게 만드는 멋진 서사와 역사가 얽힌 곳이었다. 가끔 외경의 괴물들도 추가 토핑처럼 튀어나오고.
하지만 이곳은 그냥 사막이다. 아무리 엘릴 기사들이 전투 광인이라 해도 태양과 싸우려 들진 않는다.
“애초에 이곳은 문명의 발상지라고 들었습니다. 빛의 세기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내로라하는 대제국의 전사, 왕, 신들이 이곳에서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퉜다고. 빛의 법전 교단조차 조그만 변방 종교에 불과할 때 이미 아득한 규모의 고대 제국들이 있었다면서요?”
에델레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모래로 가득한 사막을 바라보았다.
“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런 사막에서 먹고 살며 문명을 꽃피운 겁니까? 그때 사람들은 불꽃을 버티는 피부라도 가지고 있던 건가요?”
아이작은 에델레드의 상상력에 웃어 버렸지만, 그는 진지했다.
아이작도 설정을 완전히 빠삭하게 배운 건 아니기 때문에 더듬더듬 아는 지식을 풀어보았다. 이 사막은 수많은 신앙의 승리 목표가 되는 땅이기에 아이작이 아는 것도 적지 않았다.
“천 년 전만 해도 원래 이곳은 비옥하고 푸른 초원이었다더군요.”
“……이런 사막이요?!”
“예. 수십 갈래의 강들이 흐르고, 영양가 풍부한 토양과 뜨거운 햇볕으로 일 년에 세 번씩 추수해도 될 정도로 알곡이 잘 자랐다고 합니다. 성지 루아는 이 영토 대부분을 소유했던 고대 제국의 수도였지요.”
“아니, 그러면 사람도 많이 살았을 텐데 그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갔으며 이 땅은 이 지경이 된 겁니까?”
신심 깊은 신도인 척하고 말하자면 ‘등대지기 루앗딘을 감히 화형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논리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보다 미르미아에서 배운 지식을 통해 세계의 논리 가까이 접근해 보기로 했다.
“글쎄요. 외경의 중심이 리히트하임으로 옮겨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경의 중심?”
아이작은 남쪽을 가리켰다.
미르미아를 떠났지만 여전히 외경은 멀지 않았다. 애초에 성지 루아 자체가 외경과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거의 붙어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거리였다.
“한때 ‘문명의 중심’은 성지 루아였지요. 그곳에는 많은 인구와, 식량과, 문화가 존재했으니까요. 루아에 모인 사람들은 신을 찬양하고 많은 신앙심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이 질서가 영원하리라고 믿었을 거예요.”
아이작은 다시 시선을 돌려 북서쪽으로 향했다. 리히트하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 문명의 중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신을 찬양하는 땅은 게르토니아 신성제국이지요. 세계의 중심이 바뀐 겁니다.”
외경은 황량하고 두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단지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땅 자체가 죽음에 가까워질 정도로.
아이작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고대 제국이 루앗딘 탈주 이후 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몰락해 버린 것과 외경의 이동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굳이 전쟁을 일으켜서 무너뜨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국경이 외경에 잠식되는 것만으로도 무너져 내렸고, 등대지기는 다시 자신이 화형대에 올랐던 도시를 탈취하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
“외경이라는 게 이동할 수도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미르미아에서 한번 보긴 했지만…… 그게 신앙에 따라 이동할 수도 있는 겁니까?”
“외경이 뭔지는 아시잖습니까, 폐하?”
“그야 빛의 법전이 삿되고 부정한 것들을 추방한 공간…… 아아.”
에델레드는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빛의 법전은 질서를 상징한다. 내일에도 내일의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 그 굳은 인식.
그 헤게모니가 이 사막의 고대 제국에서 게르토니아로 넘어가면서 외경 또한 움직인 것이다.
에델레드는 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좀 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결국 모든 신들은 빛의 법전보다 한 수 아래란 말이니…….”
“엘릴께서도 빛의 법전을 섬기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에델레드는 쑥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그 역시도 왕이다. 자신의 국가가 가장 번창하고 웅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빛의 법전이 없으면 이 사막과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시선을 돌려 다시 사막을 바라보았다.
“뭐, 그래도 이렇게 뜨거울 때가 차라리 나은 겁니다.”
“뜨거울 때가 차라리 낫다구요?”
“예. 만약 낮인데도 덥지 않다면…… 근방에 언데드 군대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아이작은 겁을 주듯 말했지만,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릴 신도는 전투를 피하지 않는다.
본래 기사혐오자인 에델레드조차도 ‘싸움도 하고 더위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아이작은 불사 교단 영토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들의 싸움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아이작은 사막 한가운데서 첫눈을 맞이했다.
“여기서부터 우르단투 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