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66)
366화. 생과 사가 무너진 땅 (3)
불사 교단은 신앙의 이름이고, 그들이 점령한 영토는 우르단투 제국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 ‘제국’이라는 땅엔 사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이름이다. 무인지대나 다름없을 정도로 인구밀도가 극도로 낮은 땅을 과연 영토라고 부를 수도 있는지도 의문이고. 심지어 언데드들조차도 우르단투 제국이라는 정식 이름을 낯설어할 정도였다.
“사막 한가운데서 눈이라니.”
에델레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늘하늘 쏟아지는 눈송이를 응시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비가 올 줄 알았지만 설마 눈이 올 줄은 몰랐다.
이미 여명군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로튼해머와 게벨을 비롯한 성기사들은 놀라지 않는 눈치였지만, 엘릴 기사들은 대부분 놀라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전조가 없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언데드 군대가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지휘관들 사이로 긴장된 눈빛이 오갔다.
하지만 행군하는 병사들은 서늘해진 날씨에 한결 살 것 같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장기적인 전략은 높으신 분들이 고민할 일이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당장 시원해진 것을 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 중에서는 게르토니아 제국에서도 북부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눈이라면 오히려 반가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발걸음 속도와 활력이 넘치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에델레드는 어느 틈부턴가 자신들이 사막 한가운데에 쭉 뻗은 길고 거대한 도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로변에는 부서진 열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여긴……?”
“옛 제국의 폐허입니다.”
에델레드의 의문에 아이작이 답했다.
“300년 전까지만 해도 빛의 법전이 이용하던 도로지요. 불사 교단도 정비해서 사용하고 있을 겁니다.”
에델레드는 아이작이 그 넓은 사막에서 모래에 파묻힌 도로를 어떻게 정확히 찾아내 군대를 인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의 답은 항상 그러하듯 ‘우리 성배기사 대단해’라는 타당한 자답으로 돌아왔다.
길을 따라 걷고 또 걷자 또 다른 고대의 폐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약간 다른 양식의 건물들로 세워진 마을이었다. 주변 열주들을 캐와 기둥이나 주춧돌로 쓴 흔적이 보였지만,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건물들이었다.
그때 로튼해머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비로 다가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빛의 법전 기도문이 새겨져 있군. 여기는 과거 빛의 법전 영토였던 곳이오.”
“그럼 최소 300년 전 마을이겠군요.”
아이작은 담담히 대답했다.
로튼해머는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빛의 법전의 힘이 가장 강대했던 통일제국 시대 유적이란 말이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그 당시 빛의 법전은 대륙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강대했다. 다른 신앙들이 숨죽인 채 변방으로 물러나 있을 만큼.
수면 아래의 부조리가 켜켜이 쌓여 있었지만, 역사에 그런 자잘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명군 진군 루트는 보통 북부에 위치한 벨 슬라프에서 게헨나 감옥요새를 지나, 성도 우사크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성지 루아로 향한다. 그 중간에 있는 지대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재건하여 원형을 찾기 힘들기에 이렇게 온전한 유적은 보기 힘들었다.
마을은 다소 풍화되긴 했지만 석재를 쓴 덕분인지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었다. 다만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이작은 마을을 잠시 살펴보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은 문틀을 따라 새겨진 문양에 꽂혀있었다.
그 문양은 마치 물결치는 촉수들을 닮아있었다.
‘설마……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던 신도가 살았던 곳인가?’
아이작은 통일제국 당시 전 세계 인구 중 1/3 가까이가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중 대다수가 빛의 법전 신도였다는 것도.
강대했던 통일제국은 백사병 발병과 불사 교단의 등장으로 산산조각 났다.
아이작은 이곳의 주민도 백사병 발병 당시 흰 모래가 되어서 죽었을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랬다면…….’
아이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막을 돌아보았다.
이 사막의 모래알 중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의 지분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고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합시다.”
아이작의 갑작스러운 말에 에델레드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벌써 말이오?”
“더 걸어봤자 이보다 쉬기 좋은 곳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 이 마을은 제법 넓고 마을을 둘러싼 벽도 있군요. 아마 외경의 괴물을 경계하려고 쌓은 걸 테지만 언데드를 상대할 때에도 유효할 겁니다. 저희가 써먹으면 더 좋겠지요.”
그동안 낮밤이 바뀐 채 행군하던 병사들도 이제 바뀐 기후에 맞춰 움직일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의견에 다른 지휘관들도 동의했다.
아이작에겐 다른 속내가 있었다.
‘성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백사병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더 알아봐야겠어.’
***
이름 없는 혼돈은 왜 자살했는가.
그것은 아이작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왜 자살했는지 알아야 같은 사태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며, 왜 인제 와서 자신의 몸에 깃들어 세력을 넓히려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도를 알 수 있다면 대비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을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를 위해 힘 써준다는 건 알겠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가끔 내려오는 임무 역시 아이작 본인의 생존이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들뿐이다. 가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벌하지도 않는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제한적인 애정.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애정을 베푼 이유가 단지 변덕 때문이라면? 우연히 주사위 굴림이 행운의 숫자로 연달아 뜨고 있는 것뿐이라면?
자신의 신도와 자기 자신마저 죽여 버린 신이 ‘아이작’이라는 장난감에 질려버린다면?
아이작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도를 알기 전까지는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배려에 순수하게 감사할 수 없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 알기 위해 애써왔지만 쉽지 않았다. 빛의 법전이 결벽증적으로 혼돈의 존재를 지우고 인멸해 왔으니까.
‘하지만 이곳, 불사 교단의 영토에서라면 다를지도…… 흠?’
아이작은 촉수 표식이 발견된 주민의 집을 뒤지던 도중, 문득 침대의 머리맡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평범한 빛의 법전 경전이었으나, 아이작이 손에 쥐자마자 바스라지듯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장신구 하나가 발견되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형태의 앙크였다.
아이작은 이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루주베르크의 그 황제 습격범 사제에게서…….’
종말처리자를 소환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성물이었다.
황제 습격은 황제 스스로가 벌인 자작극이었다고 고백하긴 했지만, 이런 형태의 앙크가 이름 없는 혼돈과 관련된 것은 분명했다.
아이작은 앙크를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문득 아이작은 앙크의 머리 부분의 구멍이 색유리라도 달린 것처럼 색감이 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앙크의 머리를 들여다보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보였다.
노란 옷을 입은 노인이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아이작을 가리켰다.
“배신자.”
순간 갑자기 앙크 안쪽에서 손이 튀어나와 아이작의 목을 조르려는 듯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칼 위에 올렸다. 그러나 손은 사라지고,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급히 돌아보자 당황한 표정의 에델레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서, 선생님?”
아이작이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을 본 에델레드가 당황하며 말했다. 동시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리안나가 당장이라도 루미아드를 뽑으려는 듯 아이작을 쏘아보았다.
아이작은 이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검에서 손을 뗐다.
에델레드도 서둘러 움직였다.
“리안나, 칼에서 손 떼십시오. 성배기사께서 피곤으로 예민해지셨던 모양이오.”
하지만 리안나는 손을 떼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 배어있었다. 에델레드가 그녀의 손을 쥐고 직접 떼고서야 리안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성배기사님. 살기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칼에 손을 올렸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앞에서 칼에 손을 댄 제가 잘못이지요.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도 주저 없이 똑같이 행동하셔도 괜찮습니다.”
아이작도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리안나는 파리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집 밖으로 나간 리안나가 다리 힘이 풀려 벽을 짚는 것을 눈치챘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그리곤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리안나가 칼을 쥔 것을 본 순간,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도륙 낼 여러 방법들을 빠르게 떠올린 것이다.
그 어떤 검술로도 리안나는 아이작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이미 아이작은 그녀와 격이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리안나도 방금 그 사실을 깨닫고 좌절, 혹은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중에 따로 가서 사과해야겠군.’
아이작은 에델레드에게도 재차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런데 혹시 들어오셨을 때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아이작은 분명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다. 잘못 들었다기엔 너무 분명했던 그 목소리가, 앙크 속에서 들려온 환청인지 아니면 인지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넘어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에델레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헛기침도 하고, 문도 두드리고, ‘이사크레아 경, 잠시 실례하겠소.’라고 양해를 구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만, 선생님께서 그걸 듣고 칼을 뽑진 않으셨겠죠. 무슨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지에 가까워지니 환청이라도 들리는 모양이군요.”
아이작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손에 든 앙크를 숨겼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에델레드는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 숙소에서 심상찮은 물건이 발견되었습니다.”
***
“대략 30년 전쯤, 한 여기사가 있었습니다.”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숙소에 자리 잡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괴팍하지만 엘릴 이래 최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호수의 귀부인께서 아끼던 기사이기도 합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여기사는 엘릴 왕국이란 좁은 섬 안에서 최강자라고 으스대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바다를 건너가서 닥치는 대로 강자를 깨부수다가…… 어처구니없는 행렬에 휘말려 들었습니다. 바로 여명군이었지요.”
강자라면 환장하고 깨부수는 소드마스터가 여명군에 참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강자란 강자는 죄다 그쪽에 모여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여기사의 행보는 약간 더 독특했다.
“여기사는 ‘빛의 법전 놈들도 되찾지 못한 성지를 내 손으로 빼앗겠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이름까지 성지 이름을 따서 바꿨습니다. 이후로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까지는요.”
에델레드는 한숨을 내쉬며 단검 하나를 꺼냈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흰 백색목의 검집에는 거칠게 ‘루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이작도 사실 누구의 이야기인지 알고 있다. 에델레드가 저 유명한 소드마스터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도.
일명 ‘붉은 칼’ 루아 벨린.
붉은 칼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명천사로 예정되면서 지어질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명천사가 되기 전에 여명군에서 실종되었고, 이후로 행방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 단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 단검이 벨린 가문의 단검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엘릴의 참전 사유는 ‘신께서 전쟁을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제들이나 납득할 이유고, 병력과 금화를 낸 귀족, 그리고 기사들에겐 보다 절실한 이유가 있다.
불사 교단이 엘릴 기사들의 시신을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도둑질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엘릴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심이 아니다. 신앙심이 가장 중요했으면 엘릴이 등대지기를 들이받고 배교한 뒤 신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엘릴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다.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엘릴 기사들은 가오 빠지는 일을 죽어도 하기 싫어하지.’
그런 그들에게 조상, 스승, 선배, 혈육의 시체를 강탈당하고도 가만히 있는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몇몇 현실과는 타협해야겠지만 여전히 엘릴 기사들의 참전 목표 목록에는 성지 루아 탈환보다 ‘사라진 조상님들 유해 수습’이 최상단에 있었다.
그리고 그 유해들은 지금 높은 확률이 이 불사 교단 영토 어딘가를 뛰어다니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희는 조만간 그 이름 높은 대선배와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