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68)
68화. 생과 사가 무너진 땅 (5)
아이작이 내뱉은 순간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단숨에 그를 짓눌렀다.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의 격이 상승하여 더 이상 천사에게 일방적으로 짓눌리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아이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숨도 쉬기 힘든 압력에, 아이작은 간신히 손가락 하나밖에 꿈틀거릴 수 없었다.
그때 안젤라가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어 모닥불을 탁탁 쳤다. 불똥이 튀자 아이작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한결 덜해졌다. 이내 베셰크의 사과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바로 제 정체를 맞출 줄 몰라서 약간 놀랐습니다. 역시 그 유명한 성배기사답군요.]아이작은 최종 보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기회라는 생각보단 당혹감부터 들었다.
방금 그 중압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당장은 무슨 수를 써도 베셰크를 이길 수 없다.
게임상으로도 온갖 의식과 절차와 천사들의 협조를 구하고서야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성지 루아 점령이다.
베셰크 퇴치가 아니라.
베셰크는 피하고 도망 다녀야 하는 존재지,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작에게는 다행히도 베셰크는 온화하게 말했다.
[제 영토에 오셨으니, 가볍게 대화나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들렀습니다. 아이작.]아이작은 일단 조심스럽게 안젤라 곁에 앉았다.
“이렇게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만, 솔직히 크게 놀랍지는 않군요.”
[놀랍지 않다구요?]“이미 미르미아에서 저를 도와주신 적 있지 않습니까?”
아이작은 안젤라를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그가 미르미아 앞바다에 빠졌던 날, 안젤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아이작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때 아이작은 안젤라에게 자신이 모르는 천사가 깃들어서 도와줬나 생각했지만, 굳이 황금우상에서 있지도 않은 천사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었다.
안젤라에게는 또 다른 신앙이 있었으니까.
안젤라는 사망보험 가입자이며, 불사 교단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래서 불사 교단의 천사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불사황제 베셰크 본인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군.’
베셰크는 두터운 장갑에 감싸여 있는 손으로 후드를 매만졌다. 후드 안쪽은 너무 시커먼 탓에 모닥불을 앞에 마주 앉고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그때 저를 왜 도와주신 거죠?”
[저는 별 도움이 안 되지 않았나요? 아문달라스가 귀하를 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느 쪽이든 도와주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특히 그쪽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이 작은 소녀밖에 없는 상황에선.”
베셰크는 말이 없었다. 아이작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다른 신도들과는 다르군요. 아니, 세상 어떤 인간도 제 앞에서 귀하와 같은 행동과 태도를 보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모계 쪽 영향일까요?]아이작은 네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아냐…… 라는 대답 대신 흰올빼미를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아이작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일단 흰올빼미다. 천사와 잠자리를 한 운 좋은 남자, 혹은 천사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사실 아이작은 흰올빼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여러모로 그녀를 떠오르게 합니다.]어쩐지 대답을 피한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베셰크가 빛의 법전 천사였던, 혹은 이름 없는 혼돈과도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천사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좋은 징조일지 고민했다.
불사 교단 입장에서는 둘 다 거의 원수 같은 존재 아닌가?
[하지만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그녀에 대한 추억을 나누러 온 것이 아니라, 귀하와 관심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왔습니다.]“제 목에 대한 관심은 아니지요?”
아이작과 베셰크, 둘 다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웃으면서 넘어갔다.
지상에 육신이 있는 존재라서 그런지, 신치고는 묘할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신 중에서 가장 어린 신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
[과거, 이 땅에 커다란 재앙이 있었습니다.]자잘한 잡담의 시간이 흘러가고, 베셰크는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재앙?”
[예. 성지 루아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떼죽음을 당했지요.]아이작은 베셰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백사병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빛의 법전의 황금기였습니다. 모든 신앙들이 그 강대한 광휘 아래 숨죽이고 있었지요. 성지 루아까지 빛의 법전의 광휘가 닿을 정도였지만, 그 강렬한 빛 아래엔 짙은 그림자가 있었지요.]“…….”
[저는 그 당시 성지 루아를 총괄하던 빛의 법전 주교였습니다. 관리라고 해 봤자 외경의 괴물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공격당하는 마을을 지원하러 다니는 게 전부였지요. 사실 사제보다는 무관으로서 경력을 더 많이 쌓은 기분입니다. 그때는 성기사라는 개념도 없어서 사제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게 당연했지요.]아이작은 신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낯선 기분을 느꼈다. 일단 베셰크 본인의 입을 통해 듣긴 했지만 적어도 그는 나쁘지 않은 주교였던 것 같았다.
[백사병이 퍼졌을 때, 저는 서른넷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다스리던 성지 루아는 역병 소굴이 되어 있었고, 온 사방에 비보와 오열, 공포가 가득히 번져 갔지요. 치료하고 말 것도 없이 순식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먼지가 되어 갔습니다.]베셰크는 불현듯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제가 이 상황에서 어찌할 수 있었을까요?]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 내가 보호하고 다스려야 할 영지.
그것들이 먼지가 되고 무너져 간다.
아이작은 그것을 이사크레아 영지로 치환해 보았다. 그러자 곧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아이작이라면 애당초 자신의 영지에 세계 멸망을 바라는 불경한 신앙이 번지게 두지 않았을 테니까.
아이작은 본인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혼돈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한다. 다른 자가 혼돈을 섬기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 실체를 강제로 들춰 진실을 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셰크처럼 온전히 영지에 신경 쓸 수 없는 환경이라면? 부패한 교단과 외경의 침입 탓에 자주 영지를 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일주일을 내리 굶고 마시지 않으면서 기도했지요.]베셰크는 처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빛의 법전께서 부디 그 강대한 광휘를 내비쳐 이 불경한 역병을 사멸시킬 수 있도록. 비록 불경한 이름에 귀 기울인 죄가 있으나, 관대히 용서하고 다시 그분께서 품을 수 있도록.
[하지만 기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성지 루아를 비롯해 인근 도시는 이미 모두 파멸했고, 백사병이 대륙까지 번져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당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재앙일지 몰라도, 신들에게는 혼돈을 섬기는 이교도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신과 천사들은 지상에 퍼지는 죽음을 방관했다.
[그제야 저는 신들이란 애당초 없거나, 의지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베셰크는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있는 높은 곳의 궁궐에 구멍을 냈습니다. 오직 그 높은 분들만이 불사의 권능을 누리는 것은 불공평했으니까요.]무엇으로 어떻게, 라는 설명은 생략되었다.
일단 알려지기로는 백사병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영험한 주교가 있다’라는 소문을 듣고 성지 루아로 몰려들면서 불사 교단 신앙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거기서 신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베셰크는 일련의 의식과 희생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신이 되기 위한 의식이 아닌,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제야 발작하듯이 여명군이니 뭐니 하며 쳐들어오더군요. 우습지 않습니까? 신도들이 죽어 나갈 때는 가만히 있던 자들이 자기네 거처에 ‘감히’ 구멍을 내자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인 겁니다.]***
베셰크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듯한 모습에 아이작도 함께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우르반수스가 그렇게 중요한 공간이라면, 그곳의 일부라도 무너진 사태는 나름 위험한 사태 아닐까요?”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베셰크가 만든 균열이 세상을 무너뜨리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했었다. 실제로 불사 교단의 영토는 나날이 넓어지고, 언데드 역시 쌓여가고 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실제로 언젠가는 모든 세상이 불사교단의 영토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이 언데드가 되어 버린 세상의 꼴은 아무래도 아이작 입장에서도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베셰크는 담담하게 물었다.
[귀하는 무엇을 위해 여명군에 참전하였습니까?]아이작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과거의 아이작이라면 부와 명예,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작이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쭉 추구해 왔던 목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이작은 충분히 살아남을 만큼의 무력을 얻었고, 빛의 법전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신앙의 소속이 되더라도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성지 루아를 점령하는 것은 굳이 아득바득 위험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꼴이었다.
그렇다면 답변은 하나밖에 안 남는다.
빛의 법전이 성지 루아를 점령하는 대신, 자신이 점령하기 위해서.
“성지 루아를 점령하기 위해서죠.”
[성지 루아를 왜? 그곳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에 불과합니다. 물론 신앙과 유물로서의 가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땅에 수많은 목숨을 던져넣을 이유가 있습니까?]빛의 법전은 천년 왕국의 도래를 위해 여명군을 진행한다.
그렇다면 아이작이 성지 루아를 점령하면?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어라?’
아이작은 문득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성지 루아를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매달려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명제여서 왜? 라는 의문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성지를 점령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제가 정답을 알고 있으니 말씀드리죠.]베셰크는 느긋하게 아이작 대신 대답했다.
[‘압력’입니다. 온 세상 모두가 당신에게 압력을 쏟아붓고 있으니,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지요.]우르반수스의 압력.
아이작은 그 개념을 떠올리고 표정을 굳혔다.
과거의 총합인 우르반수스는 사람들의 기억과 의지 또한 누적되어 현재에 영향을 준다. 수백 년에 걸쳐 쌓인 성지 루아에 대한 열망이 가장 성지에 가까운 존재, 가장 신성하고 숭배받는 ‘영웅’ 아이작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 라고 베셰크는 말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신들이 인간을 조종하는 방식입니다.]베셰크는 마치 신들을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귀중한 생명들이 제 목숨을 파리처럼 구덩이에 던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무가치한 희생이 있을까요? 이게 전부 신들이 사후세계를 쥐고 흔들기 때문입니다.]“마치 자신은 신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이작의 날 선 대답에 베셰크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곧 웃음기를 지우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소한 신처럼 행동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지요. 그래서 저는 저승도 현실로 끌어내렸습니다. 이 땅에서만큼은 모두가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어요.]노예로 일하는 비개종자와 좀비들은 제외하고는 말이지.
물론 아이작도 그 모순점은 지적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오히려 그 모순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베셰크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현실과 밀접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쪽이 하고 싶은 말도, 충분히 선한 의도로 행동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아이작의 대답에 베셰크는 침묵을 지켰다. 아이작이 꺼낼 대답을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저는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진 않습니다. 저는 여명군을 그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불사 교단의 영토가 점점 넓어지게 둘 수도, 사람들 전부가 언데드가 되게 만들 생각도 없으니까요.”
[그럼 모두가 죽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베셰크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저 아이도?]그의 손가락이 안젤라를 가리켰다. 아이작은 그 손짓에 화가 났다.
“지금 애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겁니까? 애초에 안젤라의 인지능력을 억압하는 저주를 걸어서 여기까지 끌고 오게 만든 당사자인 주제에?”
[안젤라는 저주받은 것이 아닙니다.]신을 향한 폭언에도 베셰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되레 담담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