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71)
371화. 분열 (1)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이작은 굳이 동맹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목소리에서 사무적인 어조는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레오노라와의 거리감은 이 정도면 딱 적당하다. 그녀에게 휘말려 들었다간 남자건 여자건 인생 망치기 쉬웠다.
레오노라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듯했지만 쓸데없는 기 싸움이나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녀는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금화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지, 초 단위로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슬슬 보급 물량이 달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추가 보급 물자를 가져왔어요. 불사 교단 영토 안에서는 보급이 불가능하니까.”
아이작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에이단이 후발 보급대와 함께 오기로 했는데, 그 후발대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다.
“에이단은 안 왔습니까?”
“어차피 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게 되었으니 나중에 한 번 더 후발 보급대와 참가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보급은 황금 우상 상단이 돕기로 했습니다.”
에이단 대신 황금 우상 상단이 보급을 돕겠다는 소리에 아이작은 놀라면서도 반가워졌다. 에이단이 아무리 아문달라스의 보살핌을 받게 된 예비 명천사라 해도 내륙 깊은 곳에서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다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마당에 추가 보급은 사기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황금 우상 상단은 보급 물자만이 아니라 외부 소식까지 들고 찾아왔다.
“데라 헤만이 이끄는 여명군 본대가 불사 교단이 차지하고 있던 벨 슬라프를 박살 내고, 왈라이카 왕국의 꼬챙이 군단을 격퇴했다고 해요. 꼬챙이 군단은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지만, 이걸로 붉은 성배가 여명군에 개입하지 않을 것은 분명해졌죠.”
여명군 본대가 대승을 올렸다는 소식에 병사들은 기뻐했다. 여기저기서 등대지기와 빛의 법전을 찬양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아이작은 레오노라가 전한 이야기 이면에 찜찜한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병사들 사기를 위해 일단은 침묵했다.
아이작은 로튼해머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하고, 여명군 본대가 거둔 대승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빛의 법전이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섣불리 사망보험 생각을 하는 자는 없을 거예요.”
“그러도록 하지.”
빛의 법전이 마음에 들든 말든 어쨌든 현재로선 같은 편이다. 내막을 알 필요 없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아이작은 레오노라가 가져온 소식이 전부 전해진 듯하자,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죽였다.
“레오노라, 그리고 지휘관님들. 잠시 이쪽으로 모여주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지휘관들만이 공유해야 할 이야기였다.
***
레오노라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축시킬 수도 있는 이야기들도 전하기 시작했다. 우선 올칸 규율의 바뀐 대약탈 방향에 대해서였다.
“칸의 군대가 남하 중인데…… 아직은 이렇다 할 충돌은 없나 봐요. 하지만 칸이 바뀌었다는 첩보가 있었어요.”
“칸이 바뀌었다구요?”
“예. 원래 칸의 친위대 중 하나라는데, 누군지는 아직 정보를 수집 중…….”
“아틀란일 겁니다. 전대 칸인 사훌란 칸이 자신의 애마와 통정하여 낳은 자식이지요. 만생자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활과 두 자루의 만곡도를 능숙하게 다룹니다. 오크 중에서도 보기 드문 대영웅인데 황천까지 들었으니 적이 되면 위협적일 겁니다.”
“…….”
레오노라는 넌 대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냐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아틀란이라는 이름과 그가 쓰는 무기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디테일한 정보까지는 수집하지 못했다. 아득히 먼 초원의 오크 부족에는 상인들도 첩자를 두기 힘드니.
곁에서 듣고 있던 에델레드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아니, 말이랑요? 그…… 오크는 그게 됩니까?”
“올칸이 인도한 신의 기적이라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성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칸의 친위대가 되지요. 다만 자식을 남길 수는 없다더군요.”
에델레드는 어질어질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레오노라는 그 이야기를 깊게 생각했다. 아이작이 전달한 새로운 정보 속에서 어떻게 돈 될 만한 정보가 있는지 궁리하는 모양새였다.
아이작은 그녀가 딴생각에 빠지게 두는 대신, 다른 소식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했다.
“레오노라, 제가 알기로 벨 슬라프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요새는 아닙니다. 여명군 본대는 솔직히 말해 힘만 센 오합지졸이구요. 충분히 강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대승을 거뒀다고 믿기 힘들군요.”
“그 힘만 센 오합지졸이 세상을 케이크 자르듯 뭉갤 수 있는 정도의 도끼를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레오노라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배기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불사 교단은 그 여명군이라는 케이크 도끼를 맞상대하는 대신 대부분 병력을 후방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벨 슬라프가 쉽게 함락됐지요. 그 빼돌린 병력이 게헨나 감옥 요새로 갔는지, 수도 우샤크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혹은…….”
아이작은 지금 성지 루아에 누가 제일 가까운가를 되새겼다.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거나.”
“저는 그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어요.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치들도 보는 눈이 있을 테니.”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악몽 해협과 소금 사막을 돌파해 성지 루아로 접근하는 루트는 충분히 충격적인 접근이었다. 죽은 십이월을 악몽 해협에서 마주쳤으니 저들도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존재를 눈치챘겠지만, 소금 사막을 깨뜨리고 보급항으로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위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전군을 이사크레아 여명군 쪽으로 돌릴 수는 없다. 잠깐 한눈을 잘못 팔았다간 여명군 본대가 든 도끼가 불사교단의 영토를 정수리에서 턱 밑까지 쪼개놓을 수도 있다.
“여명군 본대는 머리를 노리는 도끼,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턱 밑의 비수가 된 거예요. 불사 교단은 어느 한쪽도 방심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점령한 영토를 줄인다는 결정을 한 거고.”
명천사가 개입할 것은 분명하고 구세대를 풍미하던 영웅들도 백골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건 누가 이쪽으로 오느냐다.
‘설마 그래서 불사황제가 직접 나타났던 건가? 아니겠지.’
아마도 제일 한가한 사람이 베셰크여서 그랬을 확률이 높다. 다른 명천사들은 지금 죽어라고 전황을 흔들기 위해 애쓰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베셰크가 아이작을 막으려 했다면 훨씬 더 교묘하고 잔인한 방법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레오노라가 전해준 소식은 아이작이 향후를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황금 우상 상단의 적극적인 조력은 기쁜 소식인 동시에 걱정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황금 우상 상단이 제공한 정보와 물자, 모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황금 우상 상단이 지금 저희를 돕는 모양새가 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상단원이 공격받을지도 모르는데.”
“흐음, 제 걱정을 해주시는 건가요?”
“보급이 중단되면 곤란하다고 해두지요. 성기사나 사제도 없이 어떻게 방위가 가능할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정 여의찮다면 군을 쪼개서라도…….”
“걱정 마세요. 성배기사님 물자만 가져온 게 아니니까.”
레오노라는 그렇게 말하며 짐수레를 감싼 천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온갖 특이한 예술품과 보석, 심지어 희귀한 성물들까지 담겨 있었다. 왕족이나 대상(大商)들을 상대할 때나 가져갈 법한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다. 심지어 성물들이 별 기능 없이 예쁘기만 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아이작은 곧 그 물자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 와중에도 불사 교단과 장사를 하는 겁니까?”
“전쟁 와중에는 전쟁 나름의 특수한 경제가 이뤄지는 법이지요.”
레오노라는 짐수레에 실려있는 화려한 장식의 칼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온갖 보석이 박힌 은은한 빛까지 뿜어내는 성물 검은, 도저히 실용적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어쨌든 예쁘기는 했다.
“참으로 불사 교단다운 물건 아닙니까? 그자들은 먹지도 자지도 않아요. 그래서 ‘실용성’이라는 게 없죠. 하지만 전쟁은 유일하게 그들을 실용적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유독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어 하거든요.”
전쟁만큼 불사의 군대를 실용적으로 만드는 순간이 또 있을까.
레오노라는 칼을 어설프게 휘둘러보다가 무거운 듯 다시 짐짝에 쑤셔 넣었다.
“이 와중에도 황금 우상 상단과 거래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있습니다. 경쟁자가 줄어든 지금이야말로 큰 거래를 할 타이밍이기도 하지요.”
“정 급해지면 당신을 인질로 삼아서 협박이라도 할지도 모르는데?”
아이작이 말하는 ‘정 급해진’ 사람들은 불사 교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그럴 마음이 없지만 여명군 본대나 붉은 성배 클럽의 누군가, 혹은 예상치도 못한 세력이 황금 우상 상단을 흔들려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레오노라는 코웃음 쳤다.
“그러면 황금 우상 상단의 저울이 어디로 기울어지는지 보게 되겠죠. 제 목숨값을 얼마로 계산하든, 우리는 장부에 적어둔 빚을 절대로 잊지 않거든요.”
***
레오노라가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에는 ‘미다스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조사하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미다스의 손은 백금 결사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이게 만드는 물건이었으니까.
‘성지 루아가 당장 누구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상황이니 더 급하겠지.’
아이작은 이미 불사 황제 베셰크에게 목숨이 저당 잡힌 레오노라를 걱정하는 대신 자신부터 걱정하기로 했다. 당장 언데드들에게 죽을 확률이 더 높은 사람은 아이작 본인이었으니까.
“적 출현! 전방에서 언데드 무리가 출현했습니다!”
우르단투 제국 국경에 진입한 이래 첫 적의 출현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베셰크가 먼저겠지만, 그걸 일단 적병으로 치고 싶지 않은 것이 아이작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이 민첩하게 방어 태세를 갖추는 사이, 아이작도 전방으로 달려갔다.
최선두에 있던 엘릴의 군대가 가장 먼저 언데드 병력과 대치 중이었다.
리안나는 불같이 호령하며 기사들에게 언제든 달려 나갈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고 있었고, 에델레드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바로 도착한 아이작은 주변 지형부터 살폈다.
“위치가 별로 좋진 않군요.”
“으음, 그렇소. 기병대가 활약하기 어려운 환경이군.”
사막 자체가 말이 달리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냉기에 노출된 사막은 그럭저럭 단단한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모래사막에 불어닥치는 바람과 영하의 냉기가 겹치자, 가끔 온갖 기괴한 지형이 튀어나오곤 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굽이치는 파도들이 엉긴 지형의 고지대 위에서, 일군의 무리가 조용히 엘릴 군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저들이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왜 기습하는 대신 저렇게 눈에 잘 띄는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그때 아이작은 에델레드가 유난히 초조해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응? 아아, 그게 사실은…… 저들의 병력 배치가 조금 신경 쓰이는군.”
아이작은 무슨 말인가 하다가 이내 금방 알아차렸다. 팬텀스티드를 타고 있긴 하지만 저 데스나이트들은, 엘릴 군대와 거울과도 같은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매복이 아닌 정면 대결을 상정했을 때 나오는 배치였다.
아이작은 싸늘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리안나를 비롯해 시드리크, 레이나 힐드를 비롯한 기사들도 어떤 예감을 느낀 듯 굳은 표정이었다.
그때, 언덕 위에 있던 데스나이트 군대 사이에서 깃발 하나가 펄럭이며 일어섰다.
“루아 벨린…….”
누군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녹색 배경에 붉은 칼의 문양이 새겨진, 벨린 가문의 깃발이었다.
붉은 칼, 루아 벨린이 나타났다. 구시대의 전설이 그들을 막아서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같은 불길한 속삭임이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기껏 끌어올렸던 사기가 곤두박질치기 전에, 아이작은 대뜸 말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선생님!”
기겁하는 에델레드의 외침이 뒤따랐지만, 아이작은 멈추지 않았다.
‘저건 붉은 칼 루아가 아니다.’
이 세계의 ‘전개’가 많이 꼬였지만, 루아 벨린은 여기서 나타날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애당초 전개와 아무런 상관없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 때문에 아이작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저게 루아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아이작이 다가가자, 언데드 무리 속에서 한 기사가 뛰쳐나왔다. 가슴에 장미와 창이 새겨진 문양이 박힌 화려한 갑옷을 입은 데스나이트였다.
‘역시.’
화살을 쏘거나 단체로 달려드는 대신 일대일 결투를 위해 달려오는 그 모습만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볼테로 가문의 레반테다! 그대, 용기 있는 자는 이름을 대라!]아이작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들은 붉은 칼 루아가 이끄는 언데드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상관있는 군대임은 분명했다.
루아 벨린과 함께 참전했던 엘릴 출신 기사들.
그들이 창칼을 들고 후배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