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75)
375화. 영원한 창백 (1)
아이작은 린데를 사로잡거나, 그대로 으스러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고 그녀를 보내준 이유는, 린데가 대화할 의사를 보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이작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뭉개 버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게벨의 복수와 원한을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원정이었으며,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린데를 성불시킬 생각조차 없었다.
‘아직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희생자인지, 배교자인지조차 알 수 없어.’
게벨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배신당했다고 했고, 바슐은 천사의 명령에 의해 그들이 희생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만나 본 린데 단장은 게벨과 여명군을 거리낌 없이 적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이작은 새로운 가능성에 눈떴다.
‘단장인 린데가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전부 배교자의 길로 이끈 거라면?’
아이작이 이런 가능성을 떠올린 이유는 칼센 때문이었다.
칼센 또한 자신의 성기사단을 전부 불사 교단 측으로 개종시켰다. 정작 그 본인은 신이 되어 이름 없는 혼돈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다.
린데 또한 자신의 성기사단이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길 대신 일찌감치 배교하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단순히 게벨의 문제만이 아니게 된다.
빛의 법전 천사들의 속내와 목적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직접 대화를 나눠봐야 진상을 알 수 있겠지.’
아이작은 다시 나타난 린데와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린데의 갑옷은 여전히 거칠게 파괴된 상태였지만, 뼈들은 벌써 온전하게 붙은 듯 멀쩡한 상태였다.
그녀가 푸른 안광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린데 단장은 데스나이트들을 증오했었다.”
게벨이 아이작 곁에서 말했다.
“데스나이트라는 것들이 아주 더러운 것들이라고 했지. 잘 안 죽거나,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세 번이나 죽여야 한다고.”
“세 번이요?”
아예 죽지 않는다면 모를까 세 번 죽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싶었다.
“죽었을 때 한 번, 죽음에서 돌아왔을 때 한 번, 그리고 돌아왔음에도 자신을 죽이려 들 때 한 번.”
죽이지 못하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로 패기가 넘치는 말이었지만,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린데는 늙은 성기사단 단장이다. 무수한 동료들이 그녀 곁을 떠나 불사 교단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린데는 그런 그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추모함으로써 한 번, 옛 동료들이 안식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 번, 동료였던 그들이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에 그들을 완전히 떠나보내면서 한 번 더.
설령 직장동료에 불과할지라도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은 심한 정신적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심지어 죽은 자가 전우, 동료, 선배, 스승, 후임이라면 어떨까.
그때마다 린데는 마음속 일부를 죽이고 죽여야 했으리라.
그리고 그랬던 그녀가 데스나이트가 되어서 돌아왔다.
무엇이 그녀를 돌아서게 만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게벨도 그런가요?”
아이작은 게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역시도 린데를 세 번 죽일 수 있을까.
린데의 ‘세 번 죽인다’는 말은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말을 지껄이든 죽여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게벨에게도 그런 각오가 있을까?
바로 눈앞에 게벨의 전우들이 있다. 오직 게벨과 바슐만을 제외한 모든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도열하여 마치 그를 기다리는 듯 내려다보고 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원 사망한 것은, 어쩌면 혼자 살아 돌아갈 바에야 모두 같은 자리에서 죽기로 결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기사단은 가족과 같다. 게벨이 어떤 욕망을 느끼고 있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이작은 입 안에 질문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게벨, 혹시 파란 장미잎을 가지고 있나요?’
아이작은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작은 질문 대신 크게 외쳤다.
“전투 준비!”
***
‘대화는 안 할 생각인가 보군.’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구릉을 따라 빠르게 달려 내려오기 시작하자 아이작은 혀를 찼다. 분명 대화할 의지가 있어 보였는데 착각이었나? 아이작의 실력이 만만찮다는 것을 알아서?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전투는 피해야 할 선택지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게벨, 혹은 로튼해머를 설득하거나 신앙심을 흔드는 말들로 갈등을 부추겨서 아이작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지인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을 텐데.’
실제로 불사 교단이 많이 하는 전략 중 하나다. 죽은 지인이 돌아와 ‘네 신앙은 잘못되었고, 언데드가 되면 영원히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라고 속삭이면, 정신적, 육체적 갈등에 흔들리는 인간은 쉽게 혹하게 된다.
성기사나 사제도 현혹되니, 일반병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여명군이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죽은 자의 유혹 때문이었다.
하지만 린데는 그런 선택지 대신 공격을 시작했다.
“전원 대기!”
로튼해머가 크게 외쳤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이쪽보다 수가 적지만 데스나이트의 숫자가 더 많다. 저쪽은 아무래도 서둘러 온 탓인지 일반 보병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대응 수단이 부족하고 방어에 취약하지만, 대신 가볍고 기동성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창 들어!”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임박해온 순간, 로튼해머가 크게 호령했다. 전통적으로 기병을 막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역시 장창이다. 일반적인 말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상대는 팬텀스티드를 탄 데스나이트들이었다.
창꼬치가 되기 바로 직전, 팬텀스티드가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령말들이 순식간에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리 위로 스치고 날아오른 데스나이트들은 아래쪽으로 단창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몇몇 병사가 그 창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나 로튼해머 역시 여명군 참전 경력이 있는 관록 있는 성기사였다.
“불꽃으로 당신을 향한 기도를 올리나이다!”
훅, 성기사들의 검이 일제히 타오르면서 하늘을 겨냥했다. 불꽃의 열기는 하늘을 향해 발산한다. 신성력까지 더해진 열기에 팬텀스티드들은 기이한 신음을 내며 몸부림쳤다. 일부는 권능을 잃고 추락하기까지 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공중전을 포기하고 두 갈래로 찢어져 후방 좌, 우측으로 나뉘었다. 아이작은 사실상 이것이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의도한 바였다고 생각했다.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 성기사단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 대신 머리 위를 교란하면서 돌파 후 방어가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측후방을 공략하는 것이다.
불사 교단이기에 가능한 현란한 방식이었다. 전투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고 봐야 했다.
역시나,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착지하기 무섭게 곧바로 기수를 돌려 돌격을 시도했다.
“찢어발겨!”
그러나 로튼해머는 이미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휘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찢고 찢는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크게 의미가 없는 일반병들은 일단 뒤로 빠졌다.
이것은 성기사들의 싸움이다. 신의 권능을 빌려와 싸우는 자들 앞에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은 어느 한쪽이든 죽었을 때 언데드가 되지 못하게 막는다는 중요한 책무가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놈이!”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성기사 이안은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데스나이트와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사크레아 성기사단, 아니 원래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검술은 섬세하고 정확한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만 번 떨어진 물방울이 바위를 꿰뚫는다는 이치에 따라 ‘정확한 부위’를 타격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망치를 들고 다니는 로튼해머에게 어울리지 않는 방식인 것 같지만, 로튼해머는 실제로 무엇이든 단 한 방에 약점을 박살 낼 수 있는 정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체력이 못 버틴다.
이안은 방금 절묘한 공격으로 데스나이트의 두개골 안쪽을 깊게 후벼팠다. 심지어 두개골 안쪽이 깨져 나가는 것까지 느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잠깐 주춤하는가 싶더니, 오히려 머리를 쑥 밀어 넣으면서 이안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덕분에 이안은 칼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피하던 순간, 커다란 망치가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후려갈겼다. 갑옷이 움푹 패면서 들썩거리던 데스나이트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일어나라!”
로튼해머가 이안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이안은 허겁지겁 쓰러진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에 꽂힌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놈들은 목뼈와 척추가 약점이다! 머리가 떨어지면 그 아랫부분은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 평범한 인간 상대하듯이 싸우면 안 돼!”
“예, 예!”
이안은 허겁지겁 지시받은 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상대하기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배운 상급 검술의 묘리는 ‘정확하게’ 척추와 목뼈를 겨냥하기 쉬웠다. 미세한 빈틈을 뚫고, 빈틈이 없다면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반복해 찔러넣으면서 마침내 빈틈을 만들어 냈다.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성기사들이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데스나이트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진짜 실력은 뒤늦게 드러났다. 대열이 갖춰지자마자, 밀리는 듯하던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갑작스레 귀가 아플 정도의 굉음을 터뜨리며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개개인의 전투에선 불리하던 아발란체 성기사들이 한 번에 밀어닥치는 산사태가 되자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이 짜고 있던 대형이 무너져 내렸다.
“이런 개……!”
돌파당한 자리에 있던 성기사들 몇몇이 순식간에 창칼에 찔려 쓰러졌다. 로튼해머가 노성을 터뜨리며 달려들었지만, 마치 한 덩어리의 전차처럼 밀어붙이는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전열이 붕괴하는가 싶던 그때, 산사태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 흐름에 끼어들어 방해한 것이다. 산사태를 가로막은 나무 한 그루 같은 모양새였으나 기세를 한순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벨!]데스나이트 하나가 포효하며 게벨에게 칼을 휘둘렀다. 게벨은 침착하게 검을 막아내고, 재차 뒤이어 들어오는 다른 공격마저 차단했다.
게벨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에서 선두를 맡던 수석 기사였다. 이 집단 돌격의 취약한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게벨이 절묘한 타이밍에 막아서자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흐름이 깨져나가고, 흐름이 느려졌다.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게벨은 상대가 누군지, 어디가 취약한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마치 과거, 아발란체 성기사단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나다, 게벨! 왜 우리 앞을 막는 거냐!]델레 형제, 증오를 죽이십시오. 상대를 잘 죽이는 것보다 동료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게벨 형님도 저 등하맹인들의 개들과 한패입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버림받았는지 모르는 겁니까!]칼, 하단이 약하다고 했지. 아직도 고치지 못했구나. 그래도 노력했군.
게벨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서 그들을 막아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가 이 자리에 아직 서서 그들을 막아내는 것은 관성에 불과했다. 만약 홀로 린데와 대담했다면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지 스스로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칼을 휘둘렀다.
죽지 않는 자들을 죽일수록, 죽어 나가는 것은 게벨이었다.
이미 다 마모되었다 생각했던 마음에, 아직도 상처가 날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누군가 게벨과 어깨를 맞댔다.
아이작이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은 단체로 쓰기 위한 검술이라면서요?”
“……그렇지.”
게벨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럼 실력 발휘 한번 제대로 해보죠.”
아이작은 카훌린을 들고 게벨과 동작을 맞췄다.
게벨은 아이작의 검이 자신을 정확하게 흉내 내는 것을 인지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이작은 거침없이 데스나이트들을 베어 냈고, 게벨은 그의 보조를 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이작의 검은 마치 수십 년간 게벨과 함께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거리낌 없이 그를 새로운 경지로 인도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게벨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벨은 자신이 아직 배울 것이 더 있다는 사실에, 그 너머의 경지를 다름 아닌 아이작이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내가 이 아이를 가르쳤다고?’
대체 수도원을 떠난 몇 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이작은 게벨도 본 적 없는 초월적 경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낯설지 않았다. 베고, 휘두르고, 찌르는 공격 사이사이에 게벨이 평생 보아 온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이작은 후대에 길이 남을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게벨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름 곁에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함께 남을 것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배교자 집단이 아닌, 영웅을 가르친 선배이자 스승들로.
이 경이로운 미래와 가능성 앞에 문득, 게벨은 자신의 원한이나 회한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