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78)
378화. 영원한 창백 (4)
쓰러졌던 겨울아귀가 일어서 카훌린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깨 위에는 하늘 위에서 도도하게 내려다보던 창백이 내려와 앉아있었다.
불사교단의 천사들은 다른 신앙의 천사들과 달리 영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불사 황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우르반수스 대신 불사교단의 영토 안에 머무른다. 때문에 그들이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는 직접 그 자리에 방문해야 한다.
고된 명상을 통해 영육 분리가 가능해진 죽은 십이월은 영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오직 존재감만을 드러낼 뿐, 기적은 사용할 수 없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존재한다.
장점은 지상에 임했을 때 힘의 제약과 소모가 없다는 것.
모든 천사는 지상에 임한 순간부터 빠르게 힘을 소모한다. 이를 줄이거나 막기 위해 대리인이나 무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힘도 제한된다.
하지만 불사교단의 명천사는 ‘항상’ 지상에 임해있을 수 있다. 이는 강력한 장점이었다.
단점은 육신을 가진 자들과 마찬가지다.
권능을 발휘하려면 일일이 육을 끌고 움직여야 하고, 육이 파괴되면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다른 명천사들은 신으로부터 징벌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죽지 않지만, 이들은 최악의 경우 소멸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불사’인 이상 그들을 죽이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영이 산산이 찢기고 으스러져 의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구천을 떠돌더라도, 혼이 남아 있기만 하다면 부활할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어쨌든 창백에게 육신에 구애된다는 단점은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명천사가 되기 전부터 뼈가 약했다.
넘어지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는 체질을 가진 그녀에게 세상은 위험하고 혹독했다.
‘뼈’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는(사실 그것 외에는 숭배할 만한 외모가 없지만) 불사교단 기준에서도 자질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는 더욱 불사라는 개념에 심취하게 되었다.
창백은 자신의 약하고 가벼운 뼈에서 미학을 찾았다.
뼛속이 비어있기에, 새들은 하늘을 날 수 있다.
창백은 자신이 하늘을 날기 위해 이런 뼈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데드가 된 뒤 스스로의 뼈를 깎아 온갖 새 떼들을 창조해 냈다. 자신의 몸을 수백, 수천 갈래로 쪼갠 그녀는 불사교단에서 가장 전능한 조각자이자 불사 황제의 전령이 되었다.
창백은 이제 세상을 조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녀의 힘 앞에 세상은 여리고 부드러운 뼈를 가진 조각에 불과했다. 창백이 원하는 바는 단 하나, 영원의 풍경 속에서 아름답게 박제된 세상을 감상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겨울아귀는 그녀가 세상을 조각하기 위한 조각칼 중 하나였다.
***
까가가가각!
카훌린과 겨울아귀가 맞닿아 맹렬하게 요동쳤다. 원래대로라면 단숨에 부서졌어야 했을 겨울아귀가 비명을 지르며 버티고 있었다. 창백이 그 안의 혼들마저 으스러뜨릴 정도로 힘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백은 겨울아귀가 부러지게 둘 수는 없었다. 겨울아귀는 그녀가 오랜 시간 공들인 작품이었다.
이 요도는 창백의 약한 몸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고, 세상을 조각할 만큼 많은 힘이 담겨 있기도 했다.
뭣보다 그 안에 수집한 무수한 기사들의 영혼은 창백이 놓아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이작이 내리치는 검을 막아내기 위해 창백은 열죽음의 영역마저 좁혀야 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검기는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되려 끊임없이 창백의 힘마저 빨아들였다.
[이게 무슨…….]한없이 무거운 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 어둠 속에서 창백은 자신과 비슷하면서 다른 힘을 느꼈다. 자신의 힘이 무한정 정지된 것으로 만든다면, 이 힘은 무한정 응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창백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추위는 그저 삼켜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야.’
창백은 아이작이 인간치고 놀랄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을 봉쇄하면서도 아이작과 힘을 겨룰 자신이 있었다.
단숨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소모전이 된다면 당연히 자신의 압승이리라.
‘인간이 천사와 힘겨루기를 하려고 해?’
창백은 아이작이 우스울 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작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소재를 발견한 예술가의 시선이었다.
젊고, 아름다우며, 무모할 정도의 용기, 숭고한 이상, 전우애, 무엇보다 훌륭한 실력까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이대로 꺾기 아쉬울 정도로.
[성배기사.]그래서 창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은 내가 양보할 테니 겨울아귀를 가져갈 생각 없니?]아이작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창백은 더없이 관대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아귀는 강력한 성물이다. 칼을 두 개나 가지고 다니는 걸 보니 성배기사도 칼 욕심이 많을 터. 기사치고 칼 욕심 없는 자는 본 적이 없다.
창백의 제안에 아이작은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네가…… 린데 단장에게 살해당했다는 대장장이인가?”
[그래.]창백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린데라는 기사가 겨울아귀를 ‘전리품’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지. 린데는 훌륭한 성품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어. 처음으로 겨울아귀를 회수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까지 느꼈다니까.]“왜 그런 짓을 했지?”
[겨울아귀를 벼려 내는 과정이야.]예술가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귀중한 절차이자 기회다.
창백은 자신이 명천사가 된 이래 만난 가장 훌륭한 기사인 아이작에게 이 ‘예술품’을 설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든 기사는 좋은 칼에 집착하지. 나는 기사들이 좋아. 튼튼하고 용감한 기사들. 특히 숭고하고 좋은 성품을 가진 기사일수록 겨울아귀가 잘 벼려진달까. 그들이 점점 겨울아귀의 강한 힘에 현혹되고……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이 좋아.]아이작은 창백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있진 않았다.
“그따위 걸 내가 왜 가져야 하는데?”
[무섭니?]창백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겨울아귀는 네가 언데드가 되기 전까지는 널 지배하려 들지 않아. 그저 강한 힘에 현혹된 기사들이 검에 휘둘리다가…… 마침내 검의 일부분이 되는 것뿐이지.]창백은 그렇게 말하며 유혹하듯 속삭였다.
[하지만 너라면 겨울아귀의 마지막 주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내 칼은 천국의 빛을 비추는 루앗딘 열쇠와 엘릴의 성검인 카훌린이다. 내게 칼이 부족해 보이나?”
[거기에 기사 수백 명의 원혼이 서린 악명 높은 요도를 추가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아이작은 솔직히 잠깐 혹했다.
성배기사로서가 아닌, 게이머로서 유혹을 느낀 것이다.
보기 드문 컬렉션을 수집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게이머들의 공통의 욕망이다. 그것이 게임에선 시스템상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특히 강력한 성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이작은 말없이 카훌린에 힘을 더 불어넣어 찍어 눌렀다. 창백은 이 말 없는 거절에 아쉬움을 한숨을 내뱉었다.
[뭐…… 고민은 죽어서도 할 수 있지.]분명 아이작은 전력을 다하고 있을 터.
팽팽하게 당겨진 끈은 가볍게 찌르는 것만으로도 터져 버린다.
창백은 주변에 있는 데스나이트 하나에게 의지를 부여했다. 쓰러져있던 데스나이트는 휘꺽 일어나 비틀거리며 아이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품속의 단검을 꺼내 단숨에 왼쪽 옆구리를 찔렀다.
푹. 단검이 깊숙이 갈비뼈 아래를 후벼 팠지만 아이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극도로 집중한 모습에 창백은 기이함마저 느꼈다. 아무리 전투의 열기로 흥분하고 있다 한들 이 정도 상처의 통증을 못 느낄 리가 없다.
‘한 번 더…….’
창백은 데스나이트가 아이작을 몇 번 더 쑤시면 반응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재차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아이작의 몸에서 단검을 빼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깊숙이 손을 밀어 넣었다.
우둑, 우두두둑. 그제야 창백은 아이작이 단검에 찔린 상처를 보았다.
아니, 그것은 상처가 아니었다. 옆구리에 돋아난 ‘아가리’였다. 그것은 입을 쩍 벌리며 단검은 물론, 길고 날카로운 수십 갈래의 혓바닥을 꺼내 데스나이트의 손과 팔까지 집어삼켰다.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창백을 소름 끼치게 했다.
[아냐.]창백은 데스나이트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데스나이트는 전신이 다 집어삼켜지기 전에 왼팔 어깨를 통째로 뜯어내며 쓰러졌다.
아이작의 왼쪽 갈비뼈가 아쉽다는 듯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네놈은 대체 뭐냐?]창백은 아까 유혹하듯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지우고 사납게 곤두선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이 혼돈의 영역에 속한 어떤 존재라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돈의 권능은커녕 정의롭고 동료들에 대한 애착만을 보여주었기에, 스스로 멀리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것은 명예로운 성배기사는커녕 괴물 아닌가.
“하하.”
아이작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창백은 보랏빛으로 물든 아이작의 눈동자 너머에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외경의 존재들을 무수하게 처치해 온 그녀였다.
하지만 이 성배기사의 ‘가죽’을 뒤집어쓴 존재의 뒤쪽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왜, 기대했던 아름답고 숭고한 기사가 아니라서 실망했나?”
창백이 꿈꾸는 영원하고 완전한 세계에 괴물의 자리는 없다.
아이작은 기사에게, 영웅에게 퇴치당해 마땅한 존재였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아이작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도려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작의 손끝부터 서서히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죽어라, 괴물.]***
“아이작을 도와야 합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막아서면서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 게벨은 치료받으면서도 소리쳤다. 로튼해머도 동감했지만, 지금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창백은 아이작을 따라 시커먼 장막 속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열죽음의 영역은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채 시시각각 좁혀 오고 있었다.
“지금 아이작은 홀로 저 안에서 천사와 싸우고 있을 겁니다! 도와주지 않겠다면 저 혼자 가게라도 내버려 두십시오!”
여전히 성가와 기적의 가호 아래 버티고 있을 뿐인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게벨은 아직 다 묶지도 못한 붕대를 덜렁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로튼해머의 손길에 주저앉았다.
그는 사납게 게벨을 노려보며 다그쳤다.
“저 꼴을 보게! 저게 인간이 싸움을 벌일 수 있는 흔적처럼 보이나? 지금은 성배기사를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어!”
로튼해머가 가리킨 자리는 아이작이 겨울아귀를 처치하기 위해 돌파한 흔적이었다.
일직선으로 깔끔하게 잘려 나간 데스나이트와 갑옷, 바위 따위의 흔적은 대체 무엇이 저렇게 만들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그 흔적을 만든 장본인은, 천사와 데스나이트 무리들을 끌고 시커먼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그 장막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로튼해머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아이작은 신의 가호와 축복이 따르는 영웅이야. 우리는 그를 믿고 응원해 주면 돼!”
“그럼 우리가 하는 일은 영웅의 뒤꿈치만 쫓아다니러 온 것뿐입니까?”
게벨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로튼해머도 복장 터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입조심해라. 그럼 저 죽음의 영역을 어떻게 돌파할 건데? 손만 대도 터져버릴 지경인데 죽지 않고 갈 수나 있냐고! 너는…….”
“죽지 않습니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로튼해머는 무슨 소린가 하며 돌아보다가 한 성기사가 열죽음의 영역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누군지도 모르는 성기사였다.
“성배기사님을 믿는다면 죽지 않습니다.”
‘안셀이라고 했던가?’
로튼해머는 그가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이사크레아 영지에 머물던 성기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갑옷이 쩍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안 된다는 고함이 나오기도 전에, 안셀은 그 안쪽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로튼해머는 기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안셀은 열죽음의 영역 안에 들어서자마자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셀은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