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79)
379화. 영원한 창백 (5)
쩍, 쩌저적. 피부가 갈라지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부스러져 내렸다. 토해 내는 숨결조차 입술을 벗어나기도 전에 얼어붙어 입가를 희게 물들였다. 순식간에 안셀은 그저 새하얀 덩어리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기사들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 안셀이 비명조차 내지 않는데, 그들이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크게 성가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파슥, 파스슥…… 로튼해머는 안셀의 몸이 바스러져 내린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몸은 마모되고 있었다. 손가락도, 귀도 떨어져 나가며 전신이 서서히 뭉뚝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안셀은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모두가, 안셀이 죽어 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허물을 벗어 던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안셀의 안에서 낡고 오래된 껍질을 벗으려 하는 모습이었다.
로튼해머는 저 성기사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서지는 형상 속에, 안셀은 완전히 마모되어 뭉뚝해진 손을 들어 숨겨진 제례의 장막에 가져다 댔다.
마치 조용히 허락을 구하듯이.
그리고 이내, 안셀의 몸이 스며들 듯 장막 안쪽으로 사라졌다.
***
‘뭐지?’
한참 창백과 힘겨루기를 하던 아이작은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질감에 깊게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창백은 다른 명천사들과 달리 힘을 아끼거나 방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육신은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에 있고, 모든 권능을 집중하고 있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명천사의 힘이 아이작을 찍어 누를 것이 분명했다.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성가가 그녀의 추위를 몰아내고 있기에 아이작이 그나마 대적이 가능할 정도였다.
툭, 투툭. 칼을 쥔 아이작의 손을 타고 촉수가 뿌리처럼 얽혀 왔다. 이제 아이작은 반쯤 인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형상이 되어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창백은 더더욱 증오와 혐오를 불태우며 아이작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촉수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가 아이작을 향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아이작은 또 한 번 이질감을 느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아이작에게 정중하게 허락을, 초대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모든 권속을 동맹들에게 두고 온 아이작은 무엇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허락했다.
창백을 꺾기 위해서라면 무슨 변수든 필요했다.
장막이 걷히고,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인간, 성기사였던 무언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온몸이 절대영도에 노출되어 마모된, 오뚜기 같은 형상이었지만 갑옷은 실루엣이나마 남아 있었으니까.
아이작은 그것이 어떻게 걷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아이작이 보기에도 섬뜩했다. 마치 안식하지 못하고 겨울 눈폭풍 속을 헤매는 망령 같았다. 오히려 창백이 자신을 속이고 들여온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창백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뭐냐.]창백은 처음으로 아이작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신경 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뭘 불러들인 거냐, 괴물아. 또 다른 괴물이냐? 성기사 흉내를 내는 괴물이라니, 악질적이군. 네놈의 위선적인 행태에 욕지기가 올라온다.]창백은 과할 만큼 흥분하고 있었다.
숭고한 이상, 강인한 육체를 가진 기사들에게 애증을 품은 그녀에게, ‘저것’은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창백이 불러들인 게 아니라고?’
아이작은 성기사가 천천히 창백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백은 더 맹렬한 한기를 성기사에게 뿜어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것은 열죽음의 영역으로 막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어딘가 불사 교단의 영역의 존재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느꼈다.
‘안셀?’
아이작은 불현듯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이름부터 생각, 이미 혀가 떨어져 나가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읊조리는 기도문까지. 심지어 저 창백하고 차가운 몸뚱이 속에 여전히 심장이 뜨겁게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 수 있었다.
한 줌의 믿을 수 없는 기적이 그의 몸을 움직이고 보호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이 세상은 원하는 자에게 힘을 준다.
갈망은 곧 기적으로 연결된다.
자신의 칼이 닿는 범위 안에서 뭐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전사들에게는 검기를, 신에게 자아와 의지를 의탁하면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사제들에게는 기적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후세계를, 내일도 세상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신들을 만들었듯이.
‘성배기사님을 믿는다면 저는 죽지 않습니다.’
***
안셀은 창백을 향해 느리게 손을 뻗었다.
데스나이트 하나라도 남아있었다면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주변에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얼어 터지거나 아이작에게 박살 나서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와서 불러들이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안셀의 손이 더듬더듬 창백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찾아도 어떻게 할 건지 알 수 없었다. 목이라도 졸라 죽일 건가? 언데드, 그것도 명천사의 목을 졸라 죽인다면 그것도 기록적인 업적이지만 안셀의 손엔 성한 손가락이 없었다.
게다가 창백이 아무리 아이작과의 힘겨루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고, 몸이 쇠약하다 한들 일개 인간에게 제압당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안셀의 손끝에 창백이 닿았다.
안셀은 창백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 이제껏 본 움직임 중 가장 빠르게 움직여 단숨에 창백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설마 예상치 못했던 주먹질에 아이작도 창백도 경악했다.
퍽, 펑! 안셀은 멈추지 않고 창백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때마다 깨져 나가는 것은 창백이 아닌 안셀의 팔이었다.
[이게……!]창백은 분노하여 안셀을 향해 힘을 발산했다.
그와 동시에, 안셀의 전신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안셀의 팔다리가 무너져 내리며, 가슴 죽지까지 크게 갈라졌다. 그리고 부서진 몸뚱이 사이로 마침내 심장이 드러났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와 빛이 맥박에 맞춰 요동치고 있었다.
흉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따스한 심장을 품고 있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파장이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아이작은 그것이 순간적으로 촉수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프랙탈 형태의 파장.
극도의 혼돈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질서의 도형이 길게 손을 뻗었다.
그리곤 한 번 더, 창백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그 주먹질을 마지막으로, 안셀의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며 하얗게 흩날렸다. 불의의 일격에 얻어맞은 창백의 머리에 작은 상처가 새겨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창백 역시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아…….]팽팽하게 당겨진 줄에 칼을 들이댄 것처럼 균형이 단숨에 무너졌다. 아이작은 그 균형이 붕괴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찍어 눌렀다.
카훌린이 창백과 겨울아귀의 칼날을 동시에 갈랐다.
시커먼 검기는 자비 없이 조각과 뼛조각마저 남기지 않고 으스러뜨리며 박살 냈다.
창백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칼날 아래 부서졌다.
엄청난 힘의 파장이 아이작을 휩쓸었다. 겨울아귀가 품고 있던 무수한 악령들이 해방되고, 창백의 영마저 육을 잃자 갈 곳을 잃고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강력한 명천사와 수백의 영이 길을 잃고 날뛰자 아이작 또한 버티지 못하고 장막을 거두었다.
쿠르르르르…… 무수한 악령들이 일거에 해방되어 하늘로 흩어졌다.
창백이 만들어낸 일식 또한 새들이 사방팔방 흩어지면서 햇살이 다시 드리워졌다. 아이작은 단순히 햇살이 비치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온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장막이 사라지고, 햇살이 드리워지자 이 싸움의 결과를 알아차린 이사크레아 성기사단도 황급히 다가왔다. 그들은 엉망진창이 된 아이작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이작. 상처 치료를…….”
게벨이 다가오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신 그는 안셀이 있던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머리는 물론, 팔다리가 전부 마모되고, 갑옷에 감싸인 몸통만이 반쯤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이작이 손을 대자마자 마치 수백 년 된 먼지처럼 가볍게 바스러져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기사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고 하나둘 부복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뒤늦게 이 안셀이라는 기사와 좀 더 깊게 대화해 보지 못한 사실을 후회했다.
***
“안셀은 새벽기도회의 열성 신도였습니다.”
“이사크레아 새벽기도회요?”
아이작은 뒤늦게 안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그와 친하게 지내던 성기사들을 불러내 대화했다.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던 신도들을 갱생하고 신앙심을 뽑아내고자 만들었던 기도회. 빛의 법전 기준에서 보면 다소 이단적이기까지 한 그 모임에 안셀이 자주 참여했었다고 했다.
“예. 그곳에서 신앙 간증과 성배기사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었지요. 모두들 성배기사님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 친구만큼 열정적인 친구는 없었을 겁니다.”
아이작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신도가 있었다는 사실에.
어떻게 보면 안셀은 이미 선을 넘어 ‘아이작의 신도’가 된 셈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바치는 사람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누구도 희생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이지, 모두가 망설임 없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세상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작이 무모한 싸움에 뛰어들었기에 안셀이 대신 희생한 것이 아닌가?
자신 또한 신과 천사들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오래된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안셀의 친구인 듯한 성기사는 그런 아이작의 착잡한 심정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성배기사님.”
“제가 괜히 무모한 싸움을 걸어서 그 친구가 죽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성배기사님, 저희는 모두 당연히 희생할 마음가짐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성기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는 성배기사님이 이끌어 주시는 미래, 보여 주실 세상, 맞설 악과의 싸움에 함께하기 위해 온 겁니다. 성배기사님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요. 저희는 아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전우입니다.”
아이작은 성기사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이미 무수한 성기사들이 이번 전투에서 죽었다. 안셀이 특별한 경우는 아니다. 오히려 천사를 처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모든 성기사들이 바라 마지않는 죽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원하는 이상을 위해 죽었으니 기쁠 겁니다. 분명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려 그를 받아들이겠지요.”
아이작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고뇌의 본질을 알아차렸다.
마지막 순간 안셀의 모습은 빛의 법전의 성기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분명 아이작을 위해 희생했다. 그렇다면 아이작은 자신은 뭘까? 이름 없는 혼돈의 사도이자 대리인?
그렇다면 안셀은 이름 없는 혼돈의 천국으로 간 걸까?
아이작은 안셀처럼 숭고한 희생을 한 사람이 그 어둡고 기괴하게 비틀린 영역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그가 보여 준 아름다운 빛의 프랙탈 파장은 이름 없는 혼돈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만약 안셀이 보여준 그 모습이…… 내게 기대한 어떤 이상적인 형태라면.’
아이작은 처음으로 사후세계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사후세계를, 우르반수스라는 개념을 믿고 상상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작은 안셀이,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이, 모두가 기대하는 천국이 아름다운 형태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이 죽은 신을 섬기게 된 성기사가 마침내 꿈꾸던 천국에 도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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