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
38화. 황금우상 상단 (1)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에게 식인이나 흡혈은 어색한 풍습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이나 신앙에서는 그런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소녀의 말은 같은 교단 안에 헤인켈을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소녀는 허리를 세우며 사냥꾼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돌아가라. 여기서부턴 나 혼자 추적하겠다.”
“소공녀님.”
“분열 예식을 잃어버린 상태로 돌아갈 순 없어. 가문의 물건을 무단 사용한 것은 백부님이니 우리 가문이 책임지고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게 다른 가문과도 얽힌 문제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돌아가.”
사냥꾼들은 그녀를 두 번은 말리지 않았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힘의 척도는 노련함이나 단련보다는 혈통에 달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소녀였다. 사냥꾼들이 돌아간 뒤에도 소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차마 사냥꾼들에게 말하지 못한 정보 때문에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에라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가문이 뒤집힐 수도 있는 정보였기에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대체 왜 여기서 언급되는 거지?’
남은 혈액에서 읽어낸 정보는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부르짖는 비명으로 가득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난 3개월 간, 아이작은 수도원을 벗어나 북부로 향했다.
게임에서 묘사된 것도 그랬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국경의 개념이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빛의 법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백제국조차도 원래는 ‘게르토니아 제국’이라는 번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이작이 지내던 수도원 역시 백제국 산하의 작은 공국에 포함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자보다는 종교가 더 중요하다 보니, 같은 신앙끼리는 거의 같은 나라처럼 묶어 취급하곤 했다.
‘일반인들은 그냥 백제국, 그리고 반대되는 불사 교단쪽 나라들을 흑제국이라고 부르는 거고…….’
나라는 자주 바뀌고 통치하는 사람도 바뀐다. 하지만 신앙은 그 자리에 계속 남는다. 그래서 ‘빛의 법전’이 중심을 이루는 나라는 다 백제국으로 부르고 적대 국가는 흑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역은 우호적인 신앙끼리도 묶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엘릴 교단은 엄연히 다른 신앙이지만 빛의 법전에서 파생되었고, 사이도 좋았기 때문에 백제국의 영역으로 묶였다. 반면 붉은 성배 클럽은 불사 교단과 결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빛의 법전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입장이라 흑제국으로 엮이는 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작은 아무리 먼 거리를 여행하더라도 어지간하면 백제국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백제국은 영토가 아니라 개념의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백제국이라고 다들 똑같은 신앙, 똑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바르바리 같은 놈들이 그렇다.
“가진 거 다 내놔!”
“다 내려놓고 도망치면 목숨은 살려준다!”
아이작은 산비탈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들은 아이작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아이작을 보더라도 과연 그들이 똑같은 말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 겨울 내내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헤맨 아이작의 꼴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산적 같은 꼴이라는 뜻이다.
산적들이 상인들을 포위하고 창칼로 위협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벌벌 떨면서도 마차를 둘러싼 채 스태프나 창 비슷한 것들을 들고 맞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산적들의 수가 상인들보다 적었다. 산적들은 6명인데 반해, 상인들은 마차 밖에 있는 인원만 8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싸움은 사기긴 하지만.’
적을 죽일 각오가 되어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겁먹은 군중이 부딪치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것은 군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적들은 꽤 살벌한 기색을 내뿜고 있었다. 싸움이 붙는다면 상인들 중 절반 이상은 죽을 것이 뻔했다. 아니, 항복하더라도 살려둘지 의문이었다.
아이작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산적들은 아이작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고서야 화들짝 놀라 창칼의 방향을 바꿨다.
반대로 상인들은 아이작을 산적 일당 중 하나라고 생각한 건지 비명을 지르며 창으로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은 바닥을 찔렀다. 뭘로 어떻게 쳐낸 것인지 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아무도 없었다.
“넌 뭐야!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산적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제야 상인들은 화색을 띠었다. 산적과 일당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용병입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저희 좀……!”
“케산 지방에서 출발해 쇠르로 가는 상단 맞습니까?”
상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은 마차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 자기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작은 검집의 칼을 느슨하게 뽑으면서 산적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자, 나는 신앙이 없다. 거수.”
갑작스러운 말에 산적들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놈들은 아이작의 여유로운 태도와 아까 창을 쳐내던 모습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한 놈이 창으로 간을 보듯 대범하게 찔러왔다.
아이작은 좀 더 강한 ‘설득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대가 부서지고, 산적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그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아이작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간단하게 창대를 낚아챘다. 산적은 창을 비틀어 빼앗으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작의 왼손에 손바닥만큼 스며 나온 촉수와 빨판과 이빨이 창대를 꽉 물고 있었다. 아이작을 통째로 들어 올리지 않는 이상 창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이작은 그대로 창을 빼앗고는 남자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힐 정도로 내려쳤다.
굳이 칼을 휘두르지 않고 묘기를 부린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다.
“너희들 다 죽이면 이 한겨울에 땀난다. 쫓아가서 죽여도 마찬가지지. 곧이곧대로 말하면 살려줄 테니까 말해. 나는 신앙이 없다, 거수.”
땀이 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였다. 우선 아직 추운 계절이었고, 둘째로 아이작의 체질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잔챙이들을 쫓아다니면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산적들은 아이작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우물쭈물하다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유독 눈에 띄게 살기를 띠던 두 놈은 기어코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새끼가!”
아이작은 일찌감치 놈들이 결국 달려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도적질보다 살인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작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심판의 검이 겨울 햇빛을 여러 갈래로 부서뜨렸다.
***
두 구의 시체와 기절한 한 명을 정리한 뒤, 아이작은 다른 네 명을 꽁꽁 포박한 뒤 무릎 꿇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두 명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바르바리 산적들이 다른 산적들에 비해 유독 포악한 것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사후세계를 포기한 이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증오에 가까운 살의를 보였다. 그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상인들한테 원한이라도 있나? 내가 알기론 그냥 평범한 상인들인데.’
그 점이 신경 쓰여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한 상인이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저…… 기사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아, 아이작이다.”
아이작은 상대가 자신을 기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지난 겨울 동안 그가 성기사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줄근한 행색도 행색이지만 도무지 건장해지지 않는 체구와 여리여리한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방금도 상인들이 자신을 용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아,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얘기인가?’
반면 상인은 아이작이 성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아 귀족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모처럼 얻은 우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성기사도 귀족으로 취급되기는 마찬가지다. 신분제를 좋아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들은 마음껏 누리는 특권을 굳이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아이작은 웃사람의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왜 그러지?”
“저놈들 살려두실 겁니까? 이 계곡에서 죽은 사람들이 꽤 됩니다. 산적들 중에서도 흉포한 놈들이죠. 고아하신 마음씨는 잘 알겠습니다만 분명 살려두면 또…….”
상인들은 자신들을 위협했던 산적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어쩌면 그들의 지인들의 복수가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정하고 살인하던 놈들은 방금 다 죽였다. 살아있는 놈들한테는 용건이 있어.”
“하지만…….”
아이작은 다시 한번 상대방의 착각과, 신분제의 편리함에 감사했다. 아이작은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상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인은 아이작에게서 알 수 없는 강렬한 위압감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그제야 그는 상대방이 방금 사람 둘을 죽였으며, 그 사실에 눈 깜짝도 안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어쨌든, 케산 지방에서 출발한 상단 맞지?”
“예. 그런데 왜 저희를 찾으신 건지…….”
“딱히 너희들을 찾은 건 아니다. 케산 지방에서 물건을 사간 상인들을 찾고 있었거든.”
아이작은 마차에 다가가 짐칸의 모포를 훌쩍 젖혔다. 상인들은 어어 하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안에는 두터운 포대에 감싸여 있는 식물 구근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아이작이 맡은 냄새는 그 구근의 냄새였다.
아이작이 포대를 내려놓자 상인들은 서둘러 다시 짐칸을 정리했다.
“로어커스 구근을 실은 마차라, 가져가면 돈 좀 벌겠군.”
“어, 어떻게 그걸…….”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로어커스는 향이 풍부한 꽃이다. 예쁘기도 하고, 게임에서는 마법 저항 능력을 낮추는 포션 재료로도 쓰이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이 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어커스 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고?’
아이작이 케산 지방에서 트롤에게 잡아먹힐 뻔한 상인 한 명을 구해 주고 얻은 정보였다. 상인은 가진 돈이 얼마 없었고, 대신 돈이 될 만한 정보를 주었다.
북부 대도시인 쇠르에서 로어커스가 유행해 가격이 폭등 중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모양, 특이한 향을 내는 로어커스는 다른 로어커스에 비해 10배, 20배 가격에도 사들인다고 했다.
이 정보를 접한 상인들은 서둘러 로어커스를 짊어지고 쇠르로 향했다. 하지만 봄가을에 피는 로어커스는 이 한겨울에는 다 시들어 버린다. 때문에 취급하는 것은 대부분 구근이었다.
“어떤 모양으로 필지도 모르는 구근을 금화를 주고 사들인다면서?”
“예, 예. 들을 때마다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가고 있지요. 다들 가져가서 한몫 잡아보려고 합니다.”
“이 구근을 내게 팔 생각은?”
상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에게 돈이 있는지 없는지가 의문스러워서가 아니라 파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 구근은 이미 사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 사람한테 팔면 되지 않나?”
“그러니까 이게…… 그 팔 권리를 산 사람이 또 있는데, 기사님께는 다소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상인은 뭔가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어차피 아이작은 상인이 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상인은 아이작이 복잡한 개념을 피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반대였다.
아이작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더욱 놀라운, 현대적인 개념이었다.
‘선물거래잖아?’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쇠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튤립 파동과 비슷했다.
물품의 비정상적인 폭등과 그 거래 물품을 둘러싼 복잡한 거래방식. 이게 꼬이고 꼬이면서 로어커스의 가격이 원래의 가치보다 훨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로어커스 가격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미리 로어커스를 사들이고, 누군가는 로어커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소유권을 판다. 여기에 경쟁이 붙으면 로어커스를 ‘거래할 권리’까지도 사고팔게 된다.
전형적인 선물거래였다.
상인은 로어커스를 단순히 운반할 뿐 이미 소유자는 이리저리 오가는 상태였다. 결국 누가 로어커스를 갖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이 이 사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 가격 폭등이 결국 여명군의 시작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어커스의 가격 폭등은 튤립이 그랬던 것처럼 끔찍한 폭락으로 이어지고, 백제국 경제가 거덜 나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킨다.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백제국은 전쟁을 선택한다.
물론 겨우 로어커스 파동 하나 때문에 여명군이 일어나진 않는다. 여명군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사건이니까.
다만 그중 한 축 정도는 차지할 것이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들끓으면 위정자들은 전쟁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
당시에는 게임적 배경에 불과했지만 지금 아이작에게는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여명군이 일어나는 게 나한테는 좋지만……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