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0)
380화. 도색된 천국 (1)
창백과의 전투가 종료된 후,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은 사상자 수습과 전후 처리에 나섰다.
데스나이트들을 강하게 속박하고 있던 창백이 갑작스럽게 패퇴한 탓인지, 데스나이트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이 다시 육에 자리 잡을 것이기에,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곳곳에서 데스나이트들과 전사자들을 태우는 불꽃이 이어졌다.
게벨은 착잡하게 떠나가는 전우들을 지켜보았지만, 이미 참전했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아이작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우면서, 그는 오래된 원한과 회한은 꽤 희석된 상태였다.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가슴 한쪽 어딘가를 항상 텅 비워 둔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게벨은 이제 그 구멍을 새로운 가족들과 제자로 채울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확실하게 해 둬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
곳곳에서 시체가 타오르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불구덩이 한쪽에 아이작과 성기사들이 둥글게 모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데스나이트, 린데의 육신이 놓여있었다.
린데는 역시 몸을 장악하고 있던 창백과 겨울아귀가 동시에 파괴된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다리면 저절로 육에 영이 안착하면서 정신을 차리겠지만, 약속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작은 다소 서두르기로 했다.
“우선 여러분들 앞에서 불경한 의식을 행하게 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아이작 앞에는 의식을 위한 준비와 린데의 골격 전부, 갑옷, 부러진 겨울아귀까지 포함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육신과 소지품을 전부 가지고 있어야 영의 복귀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걱정 말게. 아이작, 자네가 하는 일이라면 불사 황제와 어깨동무를 한다 해도 목을 비틀려 하는 거라고 믿을 테니까.”
로튼해머는 아이작에게 강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 주변의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백 토벌 이후 로튼해머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성기사들은 아이작에게 거의 명천사에게 보내는 것에 가까운 신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사실상 살아있는 명천사 취급이었다.
창백 토벌도 토벌이지만, 안셀이 보여 주었던 모습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아이작은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선택받은 자다. 하지만 안셀은 평범한 성기사다.
그런 안셀도 명천사의 결계를 뚫고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했다.
성기사로서 이만한 영광이 또 있을까.
그리고 안셀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작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음이 분명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아이작은 쓴 표정을 하며 린데를 부르기 위한 의식을 준비했다.
죽은 육에 영을 불러들이는 의식은 엄연한 불사 교단의 의식이다. 아이작에게는 불사 교단의 의식 절차를 무시할 만한 강력한 성물도, 사제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아이작은 편법을 써야 했다.
아이작은 작은 손수건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파란 장미잎이었다.
로튼해머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자마자 불편한 표정을 했다. 왜냐면 그것은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치부를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이 가져온 파란 장미잎은 다름 아닌 이사크레아 성기사단과 병사들 중 전사한 사람들의 소지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이 언데드로 부활하기 전에 태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망보험이 아직 맺어진 상태가 아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부활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로튼해머를 분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다시 한번 사과하겠네, 아이작.”
로튼해머가 사과했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사망보험에 가입했다고 신의를 배신했다거나 굴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우리가 싸우는 적은 그만큼 이겨 내기 힘든 공포이기도 합니다.”
아이작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베셰크가 파란 장미 잎을 뿌리고 갔을 때 아무도 줍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어지간한 인간의 각오로는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게벨이 조용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파란 장미잎이었다.
로튼해머가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게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변명은 하지 않겠다. 아이작. 나를 징계해도 좋고, 배신자라고 욕해도 좋아.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어쩌면 아발란체 성기사단과 함께 하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의 가족들은 진작에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가족들이 이미 곁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언데드가 된다면, 이후로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줄곧 떠나보내며 상처 입기만 할 것이란 사실도.”
게벨은 깊게 한탄하며 아이작의 주머니 위에 파란 장미잎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병사들과 성기사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눈빛이 오갔다. 그러다 결국 누군가 앞으로 나와 게벨처럼 파란 장미잎을 내려놓았다.
이안. 아이작과 결투한 적도 있던 신입 성기사였다.
아이작은 그가 자신을 여자로 착각했던 것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안은 아이작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물러났다. 뒤이어 다른 성기사들과 병사들도 우물쭈물하며 앞으로 나와 파란 장미잎을 내려놓았다. 로튼해머는 얼굴을 감싸 쥐었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베셰크는 그들 사이에 분열을 심으려 했지만 믿음과 신뢰는 더욱 견고해졌을 뿐이었다.
파란 장미잎이 충분히 쌓이자, 아이작은 의식을 진행했다. 그는 린데를 내려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아마린데, 아마린데, 아마린데.”
파란 장미잎이 부드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
아이작이 행하고자 하는 의식은 단순했다.
파란 장미잎은 일단 가지고 있기만 하면 소지자의 혼을 육신에 붙드는 능력이 있었다. 사망보험에 계약한 상태라면 그대로 생전의 자아를 가지고 일어나지만, 아니라면 그저 끝없는 망아(忘我) 상태에 빠져 지상을 헤맬 뿐이다.
파란 장미잎의 유용한 점은 혼이 다소 멀리 떠나 있더라도 강제로 불러들인다는 점이다. 아이작은 파란 장미 잎을 한 줌 집어 린데의 몸에 뿌리기도 하고, 입을 벌려 안에 넣기까지 했다.
모든 절차가 불사 교단의 의식과 무관하고, 제대로 된 사제는 없었지만, 어차피 그런 것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망자를 기리는 모든 의식에는 공통된 행위가 있다. 죽은 자의 생전 모습을 재현하거나 이름을 부르고, 생전에 가까웠던 자를 의식에 참여시키는 것.
“아마린데, 아마린데, 아마린데.”
게벨 또한 린데의 조속한 귀환을 청하며 이름을 불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란 장미잎이 푸른 빛으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데드들의 안광을 닮기도 했고, 도깨비불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내 린데의 두개골 안쪽에서 푸르스름한 섬광이 흘러나왔다.
“린데 단장.”
게벨이 숨을 죽이며 말했다. 린데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작은 엉뚱한 혼이 안착한 것일 수도 있기에 잠시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그때 불현듯 린데가 말했다.
[게벨, 아직 살아있구나. 보아하니 내가 진 모양이지?]린데의 목소리가 맞았다. 게벨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숨줄은 제가 더 질긴 모양입니다.”
[다행이군.]린데는 일어나려 했지만 팔다리가 구속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당연한 절차였기 때문에 린데는 실망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리다가 부러진 겨울아귀를 발견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
[내 칼이 부러졌군.]“사악한 요도였습니다.”
[알아. 부러뜨릴 수도 없고, 어디 내다 버렸다가 엉뚱한 놈 손에 들어가면 큰일 날 거 같아서 내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통제도 잘하고 있었지.]아이작은 린데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그녀가 죽은 것은 겨울아귀 때문이 아니라 빛의 법전 내부에서 있었던 이해할 수 없는 지시와 배신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다 린데는 문득 겨울아귀가 부러진 의미를 깨달았는지 물었다.
[창백을 물리쳤나?]그 질문에는 아이작이 대답했다.
“아마도.”
창백이 소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힘을 유지하는 대신 소멸의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불사 교단의 천사지만, 지독하게 죽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창백을 파괴했을 때 태양을 가리던 새 떼가 떨어지는 대신 흩어졌으니,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중상 이상은 입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창백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파괴했습니다. 당분간은 정신을 못 차리겠지요.”
창백의 육은 수천 개로 나뉘어 있지만, 영은 한곳에 머문다.
아이작 앞에서 맞서던 머리 셋 달린 비둘기가 바로 창백의 영이 머물던 거처였다. 그 무수한 새 떼 역시도 창백의 영 근처를 멀리 떠나지 못한다. 영이 머무는 거처를 파괴한 데다 새 떼는 흩어졌으니, 아무리 명천사라 해도 단기간에 제힘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린데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정말이군. 창백의 영향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머리가 맑은 건 처음이야. 너 대단한 성기사로군?]린데의 감탄에 게벨이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이작이 명천사를 물리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정말? 대단한 신입이 들어왔군.]아이작은 게벨이 주책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스승의 체면을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창백은 이전과 격이 다른 상대였다. 이전에 쓰러뜨린 명천사들은 힘이 쪼개져 있거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거나, 다른 명천사의 도움을 받아 물리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사의 온전한 본체를, 그것도 정면에서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명천사를 물리친 것이었다. 아이작의 힘이 명천사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창백은 정면 대결에서 강한 천사는 아니지만.’
오월의 검이나 사자기사 같은 명천사와 싸우게 된다면 그건 또 결과가 다를 것이다. 능력과 가호, 운,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로 결과가 나뉠 수 있는 것이 천사들의 싸움이었다.
그보다 아이작은 린데가 자신을 ‘신입’으로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찌 됐든 불사 교단 신도가 된 그녀가 자신을 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한 것이다.
성기사단의 유대는 어쩌면 신앙조차 뛰어넘을 정도로 끈끈한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배교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린데 단장. 왜 배교하신 겁니까?”
게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배교하지만 않으셨더라면 육을 태우는 것으로 영을 해방시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광산에서 노역하고 있든, 오지에 파묻혀 있든 꺼내서 안식을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가 된 이상 영원히 불사 교단 소속일 수밖에 없지. 원래 육신을 잃으면 새로운 육신을 빼앗기 전까지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될 수밖에 없고.]어느 쪽이든 언데드가 된 자에게 영원히 안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벨은 린데가 다 알면서 배교했다는 사실에 착잡한 표정을 했다.
“그러면 배교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이작도 그것은 궁금했다. 그녀가 죽음에 내몰린 것은 빛의 법전 교단의 배신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신앙을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 이후 어쩌면 영원히 찾아올지도 모르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린데는 거기에 예상을 뛰어넘는 답변을 내놓았다.
[신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