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1)
381화. 도색된 천국 (2)
신께선 그들이 죽길 바라셨다.
린데의 말에 게벨은 잠시 말을 잊었다.
로튼해머는 충격적인 발언에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린데의 말은 아무리 작아도 주변 모두가 들릴 수 있는 정신적 파장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과거 성기사단 단장이었으나 지금은 데스나이트가 된 그녀의 말이 궁금해 찾아온 성기사들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게벨은 린데의 말을 재확인했다.
“빛의 법전께서 린데 단장님이 죽길 바라셨단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내가 그 의도를 읽었지. 나는 진작에 교단이 우리 성기사단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우리만이 아니라 수많은 성기사와 사제들을. 단지 내가 차마 너희들까지 희생시킬 수가 없어서 아득바득 살아남고 있었을 뿐.]린데의 말은 담담했다. 게벨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이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벨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전멸했던 날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살아왔고, 바슐은 자신이 동료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칼을 입에 물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린데는 이미 진작에 교단의 그런 의도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빛의 법전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구요?”
[아까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는구나, 게벨. 어렸을 때부터 이해력이 안 좋긴 했지. 정확하게 정정하자면, 빛의 법전은 명령하지 않았다. 내가 정황과 상황을 분석하여 ‘우릴 죽이려고 한다’고 판단한 것뿐이지.]린데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성지 루아는 더 이상 전략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땅이다. 여명군은 계속 실패하기만 하고, 교단은 망상적인 전략과 목표만 제시하지. 실제로 우리는 최초 여명군 이래 계속 불사 교단의 세력과 영토만 늘려주었다.]“참을 수가 없군. 아이작, 이 배교자의 말을 계속 들어야 하나?”
로튼해머가 마침내 견디다 못한 듯 입을 열었다. 그는 어쨌든 빛의 법전 교단의 신도다. 광신적이지만 않지만 ‘배교자’인 린데가 자신의 신앙을 모욕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에도 건강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작도 여기서는 참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만요. 린데, 빛의 법전이 맞습니까? 다른 명천사가 아니라?”
린데는 잠시 푸른 안광을 일렁이다가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빛의 법전이라고 하면 등대지기지. 빛의 법전께선 대지가 단단하고 태양이 떠오르는, 당연한 이치로 그분의 존재와 뜻을 알리신다. 허나 그분의 입이라 할만한 존재가 달리 더 있나? 등대지기가 여전히 명천사인 걸 보면 결국 등대지기의 뜻이 빛의 법전의 뜻 아니겠나.]“……등대지기를 만나보신 적 있으시군요?”
[물론.]린데의 말에는 그 어떤 감동도 환희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대지기는 내게 죽으라고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원래 왕들은 그래. 죽으라는 말 대신 ‘왕국의 위상을 드높여라’, ‘네 용기를 만방에 선보여라’라고 말하지.]“그건 반드시 필요한 희생에 대한 은유일세! 이 사악한 언데드들로부터 우리가 맞서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찾아오는 밤에 맞서겠는가!”
로튼해머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작은 로튼해머에게서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그의 말에 린데는 희미하게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하…… 망치 영감, 당신 말이 맞아. 필요한 희생이었을지도 몰라.]린데는 스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명령에 따르지 않자 내 부하를 배신시켜서 사지로 내몰 정도로 필요한 희생이었겠지.]바슐에 대한 이야기였다.
[12차 여명군에서도 살아남았던 우리 성기사단이 사지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지. 바슐라프, 그 가엾은 것이 내 고집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짐을 끌어안고 있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로튼해머는 이를 꽉 깨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 역시도 방금 겪어봐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전략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지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그게 과연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나?
***
[자, 망치 영감. 우리의 죽음이 꼭 필요했던 희생이었다고 치자.]린데는 낄낄거리며 로튼해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로튼해머는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이 자리에는 그의 밑에 있는 수많은 성기사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린데의 최후에서 뭔가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필요한 희생’이란 내 성기사단의 죽음이었고, 마침 상대는 불사 교단이었어. 의도가 분명하지 않나?]“무슨…….”
[등대지기는 내가 배교하기를 원한 거다.]선물. 아이작은 무심코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어떤 불길한 그림의 윤곽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그려지기 시작했다.
[신을 등지는 인간은 있을 수 있어. 뭐, 마음에 안 들면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신앙심 깊은 자도 하루 몇 번씩 용서를 빌면서 신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해.]“…….”
[하지만 만약 신이 인간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신을 등진 행위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신에게 다시 받아 달라 애원해야 하나? 후자 역시 신의 뜻을 거역한 행동 아닌가?]로튼해머는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신의 뜻이 정의롭고 올바르리라는 것은 그의 인생의 상식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은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등대지기는 우리더러 사지로 걸어 들어가 죽으라고 했다. 그러면 죽어야지. 내가 불사 교단의 손에 죽었다가 되살아나, 내가 섬기던 신에게 다시 칼을 겨누라는 것이 그분의 명령이라면, 그렇게 해야지.]린데는 비아냥인지 아닌지 모를 말투로 말했다.
아이작은 린데의 말로 깨달았다.
린데는 배신당한 것도, 희생당한 것도 아니다.
“당신들은 그러면…….”
[나는 배교가 아니라 순교한 것이다.]린데는 머리를 천천히 비틀며 말했다.
[등대지기는 나와 내 성기사단더러 음지로 가 빛을 섬기라 명령한 것이다. 그럼 내가 배교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즉, 그분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죽이는 것만이 내 유일한 복수이자 기도라는 뜻이지.]아이작은 등대지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윤곽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게벨은 예전에 아발란체 성기사단 외에도 많은 성기사단이 무의미하게 희생되거나 죽은 적 있다고 했다.
바슐은 빛의 법전 교단의 수뇌부에 불사 교단과 내통하는 등하맹인들이 있으며, 부정한 결탁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칼센은 빛의 법전의 명천사로 점지받기까지 했으나, 자신의 성기사단을 불사 교단에 헌납하고 그들의 지식을 전수받아 신이 되려 했다.
지난 300년간, 빛의 법전은 무려 13번이나 여명군을 일으켰다.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불사 교단의 영토로 가서 목숨을 던졌다.
가장 많은 신도들이 참전한 것도,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신도들을 불사 교단에 ‘헌납한’ 것도 빛의 법전이다.
‘불사 교단은 빛의 법전에 종속되어 있다.’
아이작은 이 섬뜩한 개념에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등대지기는 애초에 성지 루아에 관심이 없다.’
그는 여명군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이 여명군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대한 연극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단 말인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의문이었지만, 그로 인해 얻는 결과물을 생각하자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사람이 많이 죽으면, 그만큼 저승으로 가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런데 우르반수스는 과거의 총합이다.
그것은 인류 공통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선대가, 조상이,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쌓아 올린 단단한 사회적 개념.
아이를 보호하고, 웃어른을 존경하고, 어려운 사람은 돕게 되는 본능에 새겨진 무의식.
이 세상을 사는 이상 그 무의식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우르반수스를 맑은 물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우르반수스를 한두 명의 의지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 수백, 수천만 명의 목숨을 던져 넣는다면?
그것도 모두 밀도 높은 한가지 의지와 감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면?
‘우르반수스가 한 가지 감정의 색채로 물들게 되겠지.’
비슷한 짓을 또 저지르려는 미친놈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변화하지 않는 거대한 기억의 덩어리가 우르반수스에 남을 것이다.
즉, 우르반수스를 원하는 빛깔로 물들일 수 있게 된다.
등대지기는 장장 300년간에 걸쳐 천국을 피로 도색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등대지기가 태어난 이래 쭉, 천년에 걸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천년 왕국…….”
***
“아이작?”
아이작의 속삭임을 들은 게벨이 문득 말을 걸었다.
“천년 왕국이라니, 무슨 말이냐?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서.”
등대지기가 만들려는 천년 왕국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방대하고 곤혹스러웠기에 아이작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전부 추정에 불과하고, 그 어떤 진실도 정확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등대지기가 ‘무엇을 위해’ 천국을 도색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섣불리 적의 의도를 확신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불현듯 자신이 등대지기를 ‘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순간에도 등대지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적대 신앙으로 플레이하던 시절에도 등대지기는 상대해선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등대지기가 무수한 인명을 무의미하게 불사 교단에 갈아 넣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 불사 교단이 탄생한 배경인 이름 없는 혼돈의 자살 또한…… 혹시 등대지기가 의도한 건가?’
아이작은 그건 너무 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불사 교단이 단단히 세상에 뿌리내리게 도운 것은 다른 이도 아닌 등대지기다.
그렇다면 그 탄생 배경에 무관하리라고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어쩌면 불사 황제 베셰크조차도 린데처럼 ‘죽으라고’ 명령받은 걸지도 모른다.
린데는 아이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우리 신입은 잘생기고 힘세고 능력도 좋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은 모양이군.]“뭔가 아는 것이 더 있으십니까?”
[글쎄, 나도 죽은 이래 줄곧 등대지기의 생각을 추측해 보려 했지만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등대지기의 계획표대로라면 이번 여명군이 마지막 여명군이 되리라는 것만은 알아. 우리 신입이 이 역사적 책갈피에서 무슨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르겠군.]린데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다만 신들의 대계에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포기하지는 말게.]“……왜죠?”
어차피 포기할 생각 따윈 없지만 아이작은 린데가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아이작의 질문에 린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언데드가 된 이유와 똑같지. 등대지기가 ‘천년 왕국’을 약속했기 때문이다.]그러곤 그녀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아이작은 무슨 혼자만 아는 농담을 던진 건가 했지만 이내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등대지기가 말한 ‘천년 왕국’은 아마도 ‘천년째에 찾아오는 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왜 천년인가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즉, 그의 책은 천년까지만 만들어져 있다.
버티고 버틴다면, 그다음 페이지부터는 아이작이 써 내려갈 수 있었다.
게임 엔딩 스크롤이 올라간다고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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