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4)
384화. 혼돈에 맞서는 방파제 (3)
“어르신이 황제 폐하께 그 잔을 ‘선물’하시는 자리에 그저 제가 함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알 테오도르는 레오노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레오노라는 기적도, 가호해 주는 천사도 없다.
하지만 그 ‘무해함’은 그녀의 무기이기도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오로지 이득만 되는 존재. 심지어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립이 절정에 달한 지금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겠지만 불사 황제께선 이런 성물에 연연하지 않으시네.]“알고 있습니다.”
지상을 거니는 신성이며 기적인 존재다. 그가 머무는 자리가 바로 성지고, 손대는 것마다 성물이나 다름없다. 역사는 짧은 대신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는 신이 불사 황제 베셰크였다.
“하지만 그분은 신인 동시에 황제이십니다. 천상의 권좌가 그분의 것이듯이, 지상의 가장 귀한 것 역시 당연히 그분께서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레오노라가 가져온 성물이 ‘가장 귀하다’고 할 정도의 물건은 아니지만, 귀한 것은 맞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수백 년 만에 세상에 드러낸 시제품이다. 어차피 보고를 위해서라도 알 테오도르는 불사 황제를 만나야 했다.
[그러고 보니 레오노라 양은 이미 황제 폐하를 만난 적 있었지.]레오노라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때 불사 황제와 직접 사망보험 계약을 맺었다. 그 보험은 영혼을 저당 잡힌 것이나 다름없지만, 반대로 불사 교단이 결코 그녀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제약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알 테오도르는 레오노라가 불사 황제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가 무례라도 저지르면 자신의 체면이 깎일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좋아. 레오노라 양이라면 실례되는 짓을 저지를 사람도 아니니 내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보겠네. 하지만 불사 황제 폐하를 만나 뵙는 것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시기와 운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르단투 제국은 ‘통치’라는 것이 거의 필요 없다. 백성들을 먹여 살릴 필요도 없고, 재해가 터져도 아무도 죽지 않는다. 전 국민이 전부 불사 황제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 있으니 반역에 대한 염려도 없다.
그나마 할 만한 일은 외교나 사치품 수출입, 전쟁, 예산 편성 정도인데, 이마저도 천사들이 대부분 지시를 수행하는 완벽한 신정일치 국가였다. 때문에 베셰크는 황제이면서도 정처 없이 방랑하다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나 불현듯 나타나 지시하곤 했다.
백성들은 이 사실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불사 황제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며,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천사조차 보기 힘들던 일반인들에게. 신을 직접 배알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평생의 믿음을 뒤흔들기 충분한 일이다.
[헌데 무슨 일로 황제 폐하를 뵙고 싶은지 물어도 되겠나?]레오노라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배기사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 그 소문의 명천사 후보자 말인가? 이름은 익히 들었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어차피 죽은 자의 지식을 들을 수 있는 황제 폐하께 무지의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네.]알 테오도르는 빨리 털어놓으라고 꼬드겼지만 레오노라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흥, 상관없지. 조만간 청을 올릴 테니 당분간 이 저택에 머물러도 좋네.]“감사합니다.”
***
레오노라는 알 테오도르와 헤어진 뒤 방으로 안내받았다. 알 테오도르는 그가 가진 부만큼이나 거대한 저택을 가지고 있어서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샬록은 성큼성큼 걷는 레오노라의 뒤를 따라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여기서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제발 농담이었다고 말하길 바랐지만, 레오노라는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도 이 시체들과 섞여 지내는 게 썩 유쾌하진 않다. 원래는 외곽에서 야영이라도 할까 했지만, 지금 알 테오도르의 저택만큼 현재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기 쉬운 곳도 없지.”
“세계의 정세요? 수도 우샤크도 아닌데 여기서 무슨 정보를 알아냅니까? 따로 정보원들이 드나드는 것 같지도 않은데…….”
레오노라는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그녀를 안내하던 노예가 그녀가 머물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한 노예는 정신적 파장을 내는 대신 성대를 울려 말했다.
“레오노라 님은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방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레오노라의 부탁에 노예는 별생각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자마자 레오노라는 노예의 어깨를 콱 붙들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놀란 노예가 발버둥 치려 했지만,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샬록이 노예의 어깨 관절을 뽑아 버리면서 저항을 못 하게 만들었다.
레오노라는 노예가 비명 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은 채, 품속에서 향초 하나를 꺼내 그의 코 아래쪽에 거칠게 문질렀다. 알싸한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흐리멍덩하던 노예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들기 시작했다.
레오노라는 그제야 그의 입에서 손을 뗐다.
“여긴…….”
“이름.”
“누, 누구.”
“이름. 어디 출신이지?”
노예는 허둥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비…… 비나부르크 수도원 출신 토드 레넘입니다. 여, 여긴 어디죠?”
레오노라와 샬록은 긴장된 눈빛을 서로에게 보냈다.
이 자는 빛의 법전 사제 출신이었다.
불사 교단이 신도 겸 인구를 늘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사망보험을 통해 사후에 자동적으로 받거나, 산 사람을 시체로 만든 뒤 영혼이 빠져나가기 전에 육신에 묶어 두고서 ‘설득’하는 것. 설득되지 않으면 정신이 억압된 상태로 영원히 노예로 살게 된다.
벗어날 방법은 개종하기 전에 시체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뿐이다.
자발적으로 불사 교단에 개종하더라도 살점이 전부 제거되기 전까지는 이등 국민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이후에도 수많은 계급들이 자잘하게 있지만, 외면만으로 구분하자면 노예─살덩어리─백골 정도로 구분할 수 있겠다. 뒤로 갈수록 귀한 신분이다.
레오노라가 이 빛의 법전 출신 사제, 토드의 코에 문지른 것은 일시적으로 정신 억압 상태를 깨뜨리는 향초였다. 본래 레오노라 자신이 중독되는 사태에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던 것이지만, 언데드의 정신 억압마저 일시적으로 깨뜨릴 정도로 강력했다.
“토드 레넘.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토드는 사제였지만 레오노라의 고압적인 태도에 본능적으로 주눅이 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는 데 익숙한 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저, 저는 분명, 여명군에 참전했었는데, 벨슬라프에서…… 그러니까……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았는데, 그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토드는 약물 효과로 각성 상태가 되긴 했지만 정신 억압 탓인지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하지만 레오노라는 단어의 편린과 토드의 상태,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오노라는 토드의 눈꺼풀을 열어보고 확신했다.
“뭡니까?”
“그을린 자다.”
다른 부위는 은은하게 썩어 들어 거무튀튀하게 변색되었음에도 토드의 눈꺼풀 안쪽 눈동자만은 반질반질했다.
“천국의 빛에 영혼이 노출된 인간 검댕. 빛의 법전 교단이 천년 왕국을 이끌 전사들이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 자들이지. 불에 타지도 않고, 눈에서는 광채를 뿜고, 죽지도 않는다고 들었는데 마지막은 와전된 건가 보군. 썩어 가는 걸 보니.”
“예, 예? 제, 제가 죽었습니까?”
레오노라는 토드의 말을 무시하고 샬록과 대화를 나눴다.
“이 자 말고도 ‘증표’라고 할 만한 자들이 이 저택에 여럿 있었어. 확실해. 알 테오도르는 다가오는 천국의 징조들을 수집하고 있다. 꼴을 보아하니 여러 가지 실험도 하고 있는 모양이군. 알 테오도르 같은 거부가 이런 하급 노예를 거느릴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노, 노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여기는 어디죠? 저를 수도원이나 교회로 좀 데려다주십시오. 후사하겠…….”
레오노라가 눈짓을 보내자 샬록이 재빠르게 토드의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덜컥. 목뼈가 탈골되면서 머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토드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빠져나왔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약물의 각성 효과가 전부 사라진 뒤일 것이다.
“이래서 아가씨가 알 테오도르의 저택에 머무는 것이 정황을 파악하기 편할 것 같다고 했군요.”
“흠. 백색 여명초를 그렇게 태워댈 때부터 뭔가 숨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 불사 황제를 만나기 전까지 머물면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자. 신들의 계획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이득이야.”
레오노라의 말에 샬록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불사 황제를 굳이 만나겠다는 건…… 역시 이번 전쟁에서 불사 교단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레오노라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레오노라 아가씨는 아이작의 승리에 배팅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불사 교단이 성지 루아를 빼앗기고, 명천사들이 전부 다 소멸하고, 우르단투 제국이 산산조각 나고, 천년 왕국이 나타나더라도 불사 교단은 멸망하지 않아. 등대지기가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이만큼 신용 있는 사업자는 드물지.”
빛의 법전은 불사 교단을 의도적으로 키워주고 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단장 린데가 추측했듯이, 레오노라 역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 크게 어려운 추측은 아니었다.
황금 우상 상단은 빛의 법전과 불사 교단 양쪽과 동시에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알아채기 쉬운 점도 있었다.
“다만 성배기사가 대계에 얼마나 찬동할지 모르겠군. 그의 됨됨이를 본다면 이변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유일한 변수도 그뿐이니까.”
레오노라는 고개를 돌려 서남부, 아마도 아이작이 다가오고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 거트루드 요새를 통과했으려나?”
***
“아직 거트루드 요새에 도착하지도 못했군. 이러면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지겠는데.”
창백을 퇴치한 후,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은 서둘러 투할린에게 합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이번 ‘분열’로 일정이 일주일 가까이 지체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각 세력의 갈등과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명천사 창백을 퇴치했다는 점은 큰 이득이다. 하지만 여명군과 같은 대규모 원정은 일정이 흐트러져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투할린이 잘해 주고 있길 바라는 수밖에요.”
거트루드 요새는 전략적 거점이라고 보기 힘든 만큼 빈틈도 많고 상주 인원도 적었다. 투할린이 이미 요새를 떨어뜨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래도 전력이 부족할 것 같긴 했다.
아이작은 그가 공성 준비만 마쳐 두었어도 만족하기로 했다.
로튼해머는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곳에 거트루드 요새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네. 여기에 천 년 넘은 요새가 있다고?”
“예. 상주 인원은 얼마 없지만, 꽤 오랫동안 서 있던 요새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이쪽 사막에 아무도 드나들지 못했는데 뭐 하러 요새를 세웠지? 소금 사막이 있던 시절에는 여명군이 감히 발도 딛지 못하지 않았나?”
아이작은 그야 천 년 전에는 소금 사막도 없었고, 불사 교단도 없었으니까…… 라는 뻔한 말 대신 로튼해머가 진짜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변을 꺼냈다.
“그야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요새가 아니니까요.”
“인간이 아니면 뭐…… 아.”
“예. 외경의 범람을 우려해서 세운 요새입니다. 한동안 버려져 있다가 외경이 다가오면서 통일 제국 시절 재건해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이후엔 불사 교단이 접수해서 쓰고 있고.”
불사 교단의 영토는 거의 대부분이 외경과 맞닿아 있다. 외경의 괴물이 침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거트루드 요새는 그런 괴물들에 맞서 방어하고 필요할 때는 요격하기 위한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래서 따로 붙은 별명도 있습니다. ‘혼돈에 맞서는 방파제’라고.”
“멋진 별명이군. 흥. 불사 교단 놈들에게 맡겨두기 딱인걸.”
아이작은 웃으려다가 문득 로튼해머의 말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의 지도를 보면 빛의 법전 영토는 중앙에 있고, 다른 신앙들이 외곽을 둥글게 둘러싼 형태다.
그중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불사 교단이다.
그런 맥락로 보면 ‘혼돈에 맞서는 방파제’라는 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사 교단에 어울리는 호칭이기도 했다.
“성배기사님!”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찰대로 나갔던 인원이 돌아오면서 외친 소리였다. 아이작은 그가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아이작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정찰대로 나갔던 성기사가 돌아오면서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백골 상태의 새 머리뼈였다. 단순히 멋진 장식품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온 것은 아닐 것이다.
“동쪽 방향에서 백골 새들의 사체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창백의 표식이 아닌가 싶어서 보고드립니다!”
로튼해머의 표정 역시 일그러졌다. 창백이 죽어간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보다는 부상을 당한 뒤 영적인 피를 흘리면서 도망친 흔적이라 봐야 할 것이다.
창백은 이미 거트루드 요새에 도착해 있을 확률이 높다.
“서둘러야겠군요.”
그곳에 상처 입고 분노한 명천사가 몸을 추스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