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5)
385화. 혼돈에 맞서는 방파제 (4)
투할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을 응시했다.
요새라는 것은 무기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개량되고 진화하기 마련이어서, 벨슬라프와 같은 최전선의 신식 요새 같은 경우 해자, 총안, 옹성, 현안, 방어탑 등등 온갖 흉악한 것들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거트루드 요새는 그 별명처럼 성곽이라기보다 방파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성벽은 낮고 곳곳이 낡고 허술했으며, 보루조차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천년이나 변방에 위치한 요새니 별다른 발전 없이 방치된 것은 당연했다.
전사이기 전에 장인, 동시에 드워프로서 건축가로서의 소양까지 갖춘 투할린에게 이런 빈약한 물건은 요새라고 부를 수도 없는 누추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 ‘거트루드 돌담’이 감히 자신을 막아선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을 수가 없군.”
“참으셔야 할걸요.”
옆에서 라이칸스로프 전사대 전사장 라울록이 이죽대며 놀렸다.
투할린은 망치로 그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라울록의 머리통은 거트루드 돌담에 처박아야 하기 때문에 아껴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기도 했다.
“저 미친…… 지형은 뭐냐.”
거트루드 요새가 오랫동안 관리받지 않고도 외경의 괴물을 막아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위치가 절묘하기 때문이었다.
거트루드 요새는 대략 경사가 45도까지 이르는 거대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 언덕이 북쪽에서 남동쪽까지 쭉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떤 거대한 지각 변동이 저 동쪽 땅을 들어 올리면서 거대한 단차가 생겨버린 것이다.
거트루드 요새는 그 거대한 단차 중 그나마 경사가 ‘완만한’ 곳에 세워져 방어력을 집중시키는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우회하자니 경사가 6, 70도 이상의 백여 미터 거리 언덕, 아니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은 경사가 45도만 되어도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원래 요새라는 게 위치 하나 잘 잡고 뻐기는 거죠. 그래도 늑대 가죽을 입으면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닌데, 밤중에 어떻게 좀 해볼까요?”
“언데드 놈들은 밤눈이 밝다. 밤에 움직이는 건 소용없어. 놈들이 잠을 잘 리도 없고. 그러다 네놈들만 고립된다. 그냥 성배기사와 상의했던 대로 진행하자.”
우회할까도 생각했지만 아이작이 그려 준 지도에 의하면, 이 아득한 지리적 단차는 백여 킬로미터에 이른다. 그마저도 처음부터 우회하기로 하고 약속했다면 모를까, 다른 여명군과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한 마당에 혼자 우회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다. 저 거지 같은 돌담에 발목 잡힐 수는 없지. 이렇게 됐으니 놈들에게 공성이라는 게 뭔지 보여주자고.”
투할린은 가져온 짐들을 꺼내 공성 준비를 시작했다.
수백 년간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선보이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지식의 결정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커먼 금속 덩어리들을 이리저리 조합하자 이내 매끈한 형체의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육중한 크기의 대포였다.
여명군에 참전한 뒤에도 오로지 자신의 육신만으로 싸워 온 그들이 처음으로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이었다.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먼저 걸레짝을 만들어 놓자고.”
***
안타까운 일이지만 투할린의 목표는 절반의 성공으로 그쳤다.
거트루드 요새의 성벽을 걸레짝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성벽의 일부는 무너지다 못해 아예 지반이 허물어져서 투할린이 있는 바닥까지 흘러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애당초 거트루드 요새의 본체는 성벽보다는 언덕 그 자체다.
저 천연 장애물을 어찌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뭐, 그렇게 됐네.”
투할린은 어느새 도착한 아이작에게 애써 담담한 척하며 보고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세상의 용광로가 숨긴 힘까지 드러내며 공략하려 했던 것인데 결국 아이작이 먼저 도착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아이작은 실망하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아뇨,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거트루드 요새가 쉽게 떨어질 거라곤 생각도 안 했습니다. 엘릴군도 아직 오지 않았는걸요. 뭣보다 투할린의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으음. 사실 우리 전력만으로도 공략할 뻔했긴 했네만…….”
평범한 사람들은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경사의 언덕이지만, 라이칸스로프 전사대에게는 순식간에 뛰어 올라갈 수 있는 거리다. 투할린의 대포가 성벽을 박살 내자마자 라울록이 이끄는 라이칸스로프 전사들이 울부짖으며 단숨에 돌파했다.
하지만 성벽 내부에 기다리고 있는 언데드에 비하면 전사대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라울록은 성벽을 더 많이 무너뜨려서 진입지점을 늘리면 공략할 수 있다고 했네만…….”
투할린은 이를 갈면서 거트루드 요새를 노려보았다.
사막의 색을 닮아 노란빛을 띠고 있던 거대한 단차는 이전과 다르게 희뿌연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무슨 흔적인지 알아차렸다.
“창백이 나타났군요.”
“그래. 갑자기 하늘 위에 웬 거지 같은 새 떼가 몰려들더니, 절벽을 얼어붙게 만들더군. 라이칸스로프 전사대가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것을 보고 그냥 물러나라고 지시했네.”
창백은 이전처럼 열죽음의 영역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예 자신의 힘보다 요새를 강화시키는 것에 힘을 쏟아붓기로 했는지 투할린이 뭉개놓은 성벽마저 얼음과 돌, 모래로 급조해 버렸다.
철근 콘크리트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얼음도 그 안에 여러 가지 성분이 섞이면 훨씬 단단한 얼음이 된다.
가파른 경사와 그녀가 다루는 냉기의 힘이 조합되자 한층 더 단단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만들어졌다.
‘하긴, 그게 원래 창백의 장기지.’
창백이 냉기를 다루는 힘은 뛰어나지만 그건 그녀가 ‘예술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녀가 명천사가 될 수 있었던 기반, 천재성을 발휘하는 부분은 겨울아귀 같은 창작 쪽에 있다. 지금은 거트루드 요새를 그녀의 캔버스로 삼았을 뿐이다.
“제가 준 성물은 써보셨어요?”
“안 그래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투할린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우리 교단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쓰려고 했네. 시체 무리가 아무리 차갑다 한들 화로의 열기가 저놈들보다 못하겠나?”
결국 자존심 때문에 쓰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세상의 용광로가 꽁꽁 숨기고 있던 전력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니, 아이작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공성전은 명천사의 가호를 받는 화로 장인과 절대영도의 힘을 다루는 명천사의 창작물 대결이 된 것이다.
아이작은 먼저 투할린의 창작물부터 심사하기로 했다.
“공성에 사용하신 세상의 용광로 교단의 성물부터 살펴봐도 될까요?”
“음, 그렇게 하지.”
***
투할린은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만들어 낸 대포 쪽으로 안내했다. 눈이 닿지 않게 덮어 두었던 헝겊을 벗겨내자,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늑대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의 쇳덩이가 나타났다.
아이작은 잠깐 사고가 정지되었지만, 곧 이게 세상의 용광로 교단의 대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그 대포를 보자마자 약간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올칸 규율이 쓰던 것보다는 작군.’
물론 비교하는 발언을 입 밖에 내면 투할린의 인종차별적인 혐오 발언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이 분명했기에 내색하진 않았다. 애초에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올칸 규율이 쓰는 대포는 포신째로 들고 다니다가 땅에 고정시켜 놓고 쏘는 무겁고 미개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 대포는 투할린이 원정 내내 무리 없이 들고 다닐 정도로 작고 가벼웠다. 그렇다 해도 어지간한 성인만 한 크기였지만. 그리고 오크들이 쓰는 대포는 세상의 용광로 교단에서 훔쳐낸 지식이자 열화판이다. 그 사이 세상의 용광로 교단은 그 설계를 훨씬 다듬고 진보시킨 대포를 만들어 냈다.
아이작은 대포를 약간 살펴보다가 떠보듯 말했다.
“주물이나 단조가 아니라 천공식이군요?”
투할린의 얼굴에 경악이 담겼다.
“자네 대화로에 방문한 적이라도 있나?”
보통 이 시대의 대포란 판을 휘어서 포신을 만드는 단조식이나, 쇳물을 부어 틀을 잡는 주물식이다. 전자는 통일된 규격을 만들기 힘들어서 군대에서 써먹기가 어렵고, 후자가 오크들이 쓰던 방식이었다.
올칸 규율이 쓰던 대포는 주물식이다. 청동을 재료로 쓰면 더 질기고 안정성도 높아지지만, 환생 덕분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오크들은 더 흔하고 다루기 쉬운 철을 썼다. 뭣보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에서 빼돌린 설계 자체가 철을 쓰기도 했고.
하지만 세상의 용광로 교단은 그보다 훨씬 진보한, 천공식을 썼다. 훨씬 순도 높고 단단한 통짜 쇠를 천공기로 관통해서 훨씬 가볍고, 훨씬 단단하며, 훨씬 안정성 높은 대포를 만든 것이다.
“그냥 조금 아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그냥 게임상의 지식과 소소한 잡지식으로 아는 척할 뿐이었다. 투할린에게 조언하려면 아주 무지한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될 테니까.
아이작은 짐짓 아는 척하며 대포의 균형과 반동을 잡아주는 포가(砲架)와 내부에 파인 강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물론 겉핥기 수준의 지식이라는 것은 투할린도 금방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이 비밀스러운 지식의 편린이나마 알고 있다는 사실에 투할린은 눈이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자네를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군. 대체 그런 지식은 어디서 들은 건가? 이건 울스텐도 듣지 못한 최신식 성물인데.”
여기서 올칸 규율과 세상의 용광로 교단 사이의 아쉬운 차이점이 드러났다.
올칸 규율에게 지식은 실용적인 전쟁 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의 용광로 교단에게는 귀한 은총이며 숨겨야 할 지혜다. 실제로 이 대포 역시 대포로서의 기능은 충실히 하겠지만, 그보다 아름다운 예술품에 가까웠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것뿐입니다. 그보다 투할린, 이 대포는 나무랄 만한 데가 없습니다만…… 몇 가지 조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조언?”
“사실 올칸 규율이 만들어 낸 조잡하고 열등한 하등품을 보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했습니다. 이 성물에 약간의 ‘개선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세상의 용광로 교단의 아쉬운 점은 다른 신앙과 뒤섞이길 싫어하고 지식을 공유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진보는 섞이고 부딪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미 수많은 지식들이 쉴 새 없이 부딪치고 뒤섞이던 세상에서 왔다.
그에겐 이미 투할린의 대포를 지금보다 몇 단계 뛰어넘어 강화할 아이디어가 몇 가지 있었다.
투할린은 잠시 생각했다.
다른 신앙, 그것도 기술자도 아닌 성기사가 조언을 한다고? 다른 사람이라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망치로 대가리를 후려쳤겠지만, 아이작은 최소한 무지하진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강렬한 동기가 투할린을 이끌었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추구하는 가치는 변화와 진보.
두드릴수록 더 단단해지고, 융해될수록 더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 더 나아지고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할린을 부추겼다.
“좋아. 한번 이야기해 보세.”
***
거트루드 요새 한쪽.
빈약하지만 내성이라고 할 만한 건물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새하얀 무더기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주변의 대기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와 벽과 바닥에 생긴 서리 때문에 마치 눈이라도 쌓인 것 같았지만, 그것은 전부 새들의 뼈였다.
명천사 창백은 고요와 침묵 속에서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언데드에게는 수면이 필요 없다. 하지만 영적인 상처를 입은 창백은 수면과 비슷한,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져 찢겨 나간 영혼을 일부나마 수복하고자 애썼다.
‘아이작…….’
하지만 그녀의 휴식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잠들려 하면 통증이 분노와 함께 찾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창백이 은은한 분노를 느낄 때마다 벽면이 냉기에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그 괴물, 어떻게 한 거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