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6)
386화. 혼돈에 맞서는 방파제 (5)
쉽게 잠들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은 창백은 잠들기를 포기하고 지난 싸움을 복기했다.
사실 복기란 창백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사 교단의 명천사들은 다른 신앙의 명천사들처럼 우르반수스를 헤맬 수 없다. 그들에게 우르반수스는 이미 그들의 땅에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되짚을 과거도 없으며, 나아갈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뿐이다.
때문에 다른 신앙의 명천사들도 불사 교단의 영역에서만큼은 우르반수스를 조작할 수 없었다. 가장 위험한 무기가 불사 교단을 상대할 때만큼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창백은 어색하게나마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본다는 개념을 힘겹게 떠올렸다.
그녀는 결코 그 싸움에서 지리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절대로 본체의 형상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과 힘겨루기를 하던 와중, 갑자기 나타나 창백의 머리를 두들긴 괴물이 문제였다. 창백은 명천사가 된 이후로 얼굴을 그렇게 얻어맞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혹감과 모멸감이 전투의 균형을 깨뜨렸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창백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창백은 아이작이 대체 어떻게 그런 존재를 만들고, 기꺼이 희생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사 황제시여, 그 괴물이 진정…… 당신의 곁에 둘 만한 자입니까?’
창백은 불사 황제의 명령을 되새기며 속으로 비명을 추슬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인간치고는 가능성 있으나, 괴물은 괴물이다. 빛의 세기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고대신이라는 이름의 괴물들이 얼마나 드글거렸던가. 하지만 새로운 신들은 그들을 싸그리 멸종시키거나 수족으로 삼았다.
딱 그 정도 수준이다. 괴물에게 허락된 삶이란.
창백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충실한 신도이자 명천사로서, 불사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 따윈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죽은 십이월이나 교만하기 짝이 없는 묘지 군주와는 다르다.
‘어차피 내가 이 요새를 지키는 한 아이작은 이곳을 뚫지 못한다. 몸이 회복되고 다시 겨뤄보면 된다.’
싸우기 전에는 간단하게 아이작을 죽인 다음 심문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불사 황제도 정 여의치 않다면 죽여도 된다고 했으니까. 당장 써먹지는 못해도 나머지 놈들을 인질로 삼아서 고문하면 될 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놈들을 천천히 탈진시키자. 어차피 이곳에서는 보급도 어렵고, 지원 병력도 오지 않는다. 서서히 기온을 올리는 척하다가 갑자기 밤중에 떨어뜨리자. 얼어 죽은 놈들 몇몇을 좀비로 만들면 혼란을 줄 수 있겠지.’
창백은 즐거운 상상을 이어갔다.
‘사기를 계속 떨어뜨리면 성배기사의 위신에도 문제가 생길 터. 놈이 승부를 걸려고 요새로 뛰어들면 그때 반격하자. 공성전 과정에서 시체가 무더기로 생길 테니 징집은 그때 시작하면 돼…….’
쾅. 갑작스레 그녀의 즐거운 계획을 깨뜨리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푸스스…… 내성의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지는 모습에 창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폭음이었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의 까다로운 성물. 그것이 지난 며칠간 요새를 헤집어 놨지만, 이번만큼 큰 충격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지? 성벽이 무너졌나?]창백은 성벽을 지키는 언데드들에게서 당혹감을 읽고 물었다. 하지만 놈들도 상황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감각을 확장시켰지만 성벽은 멀쩡했다.
거트루드 요새를 향한 돌격도 시작되지 않았고, 기적으로 벼락을 떨어뜨린 것도 아니었다.
‘뭐지?’
쾅, 쿠쿵.
그사이 폭발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창백은 참지 못하고 새 일부를 날려 보내 주변을 둘러보게 했다.
거트루드 요새 곳곳이 폭발하며 붕괴하고 있었다. 그제야 창백은 언데드들의 당혹감 어린 비명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하늘!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집니다!]***
“오오…… 좋아요. 생각보다 잘 되는군요.”
“흐음, 시제품이지만 괜찮은 것 같군. 나쁘지 않아.”
투할린과 아이작, 그리고 로튼해머와 성기사들은 본영에 쭉 늘어선 채 거트루드 요새에 떨어지는 포탄의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맹렬한 폭발이 일어나며 성벽 너머를 뒤흔들었다.
“자네가 알려준 방법, 제법 괜찮은 것 같군.”
“감사합니다. 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의 뛰어난 기술력이 있기 때문이죠.”
아이작이 알려준 것은 박격포에 대한 개념이었다.
투할린은 처음엔 직격이 아니라 가파른 곡사로 포탄을 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격포의 개념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포환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목표를 타격하는 것은 투석기로도 가능한 것이니까. 구조가 단순한 만큼 떠올리기도 쉽다.
다만 정교한 탄착군을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아직 포술과 탄도학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일한 대포 설계와 정교한 가공을 확인한 아이작은 대포를 약간만 손보는 것으로 분명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정교한 대포를 만든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포술에 대해 무지한 것은 지식 유출을 우려해 실전을 거의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크들 역시 정교한 조준을 전부 조상님에게 맡겨버렸으니, 포술 따위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포술이 성립하려면 계산한 대로 포탄이 떨어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대포 양식이 제멋대로면 그게 불가능하니.’
하지만 세상의 용광로 교단이 준비한 대포는 총 다섯 문.
전부 같은 제원, 같은 재질,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박격포로 개량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건 그렇고, 화로 장인들의 기술력이 대단하긴 하군.’
아아, 모르는 건가. 이게 바로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라고 허세를 부리고 싶었지만 대단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 장인들이다.
아이작은 살짝 떠밀었을 뿐이지 뭔가 획기적인 발상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투할린과 화로 장인들은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 자리에서 강철을 찰흙 주무르듯 뚝딱 개량해 버렸다. 그리곤 몇 번의 시험 사격으로 화약량까지 조절해서 정확한 위치에 떨어뜨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심지어 세상의 용광로 교단은 쇳덩이만 날려 보내던 올칸 규율과 달리, 위력의 수준이 다른 작열탄을 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포탄도 가공하고 싶었지만, 그건 설비 없이 이 자리에서 급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포가 과열됐다! 그거 가져와!”
화로 장인들이 달려와 과열된 포신에 ‘예비된 자의 영대’를 칭칭 휘감았다. 화로 장인들은 사제된 몸으로 차마 기도문을 외울 수 없었기에, 아이작이 대신해서 기도문을 읊자, 순식간에 포가 식으면서 원상태로 돌아왔다.
세상의 용광로 교단과 불사 교단의 완벽한 콜라보였다.
물론 리치들이 본다면 미쳐 날뛰겠지만 포탄을 좀 더 먹여주면 차분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성이 더 이상 전략적 거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대포보단 박격포가 개발된 후였지.’
아이작과 세상의 용광로 쪽 사람들이 즐겁게 폭발하는 포탄의 비를 지켜보는 동안, 로튼해머와 성기사들은 다소 질린 모습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대포 자체는 이미 올칸 규율과 싸우면서 보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대처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일단 사거리와 정확도가 미쳤고, 이런 걸 기적 없이도 찍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다.
오직 직사만 가능한 올칸 규율의 대포와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지금처럼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동맹’이라는 사실에 감사한 적은 없었다.
“아, 남쪽으로 20보, 동쪽으로 30보 정도 표적을 옮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쪽에 중요해 보이는 건물이 있다는군요.”
심지어 하늘에선 넬을 탄 헤사벨이 착탄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관제까지 완벽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거트루드 요새는 속절없이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었다. 투할린은 드워프의 손끝으로만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으로 박격포의 각도를 살짝 조정했다.
“흠, 이렇게?”
쾅! 아이작은 성벽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예. 정확하군요.”
쿠르르르르…… 아이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덕 너머에서 새하얀 물결이 일어났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정말 정확한 지점을 찔렀군요.”
창백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수한 백골 새 떼가 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오르자, 하늘을 날던 넬이 벼락의 포효를 토해냈다.
콰르르르르르! 마른하늘에 천둥 벼락이 치면서 수많은 백골 새 떼를 지져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 공백은 순식간에 메워졌고, 넬을 향해 새 떼들이 달려들었다.
‘물러나라, 헤사벨.’
이미 넬과 헤사벨은 재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더 이상 관제가 불가능해졌지만 상관없었다.
아이작은 투할린에게 지시했다.
“됐습니다. 이제 포격은 중단하고 돌격 준비를 하죠.”
“벌써? 창백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놈들을 더 괴롭혀도 되지 않나?”
“아뇨. 지금이 정확한 타이밍입니다. 창백의 출현이 신호였거든요.”
투할린은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다가 이내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에 감탄했다.
***
‘아이작!’
창백은 너무 화가 나서 정신적 파장을 일으키는 대신 머릿속으로 외쳤다.
새 떼들은 난폭하게 날아오르며 뭐든지 쪼고 할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창백의 몸이 쇠약해지긴 했지만, 새들의 부리와 발톱은 단검 같은 강도를 자랑했다. 어지간한 인간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뽑아내기엔 충분했다.
[반드시 죽인다! 사지를 찢어서 평생 찾아 헤매게 만들어 주마!]불사 교단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고문법이었으나, 그녀의 바람이 이뤄지기에는 현실적인 장벽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뛰쳐나온 것은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미 거트루드 요새는 더 이상 요새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언데드들은 쏟아지는 포탄 속에 무력하게 터져나가다가 완전히 군대가 와해할 때쯤 적들이 진입할 것이다. 포격을 피하려면 참호를 파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개념도 창백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아직 전력이 아직 온전할 때 최대한 피해를 강요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창백은 거트루드 요새의 언데드들의 전멸을 각오했다.
그녀의 목적은 최대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이작, 혹은 적 수뇌부 중 일부라도 암살하는 것이었다. 명천사가 암살을 택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치욕적이었지만 그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창백은 카랑카랑한 나팔 소리를 들었다. 맹렬한 말발굽 소리가 북처럼 울려 퍼졌다. 남쪽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빠른 속도로 거트루드 요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창백은 금방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엘릴의 개들! 그런데…… 어떻게 저기서?]창백은 접근해오는 엘릴군의 위치에 경악했다.
엘릴군은 투할린과 아이작처럼 절벽 아래가 아닌, 단차 위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제야 뒤늦게 창백은 남쪽으로 갈라졌던 엘릴군이 일찌감치 단차를 우회하여 거트루드 요새 후방으로 접근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백이 의도했던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분열이 후방을 열어주는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사실은 창백에게 다시 충격을 주었다.
‘어떻게? 놈들에게 지도라도 있는 건가? 여명군 자체가 이 땅에 온 게 처음일 텐데?’
창백의 생각은 정확했다. 아이작이 만든 정교한 지도 덕분에 우회하는 길을 찾아낸 거니까.
사실 아이작이 기억을 더듬어 만든 지도라 정확하다 말하긴 힘들었지만, 대충 중요한 위치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거트루드 요새의 까다로운 부분과, 남쪽으로 우회하는 루트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전략 회의를 하면서 에델레드에게 이야기해둔 사실이었다.
그리고 거트루드 요새는 그 아찔한 경사의 언덕을 제외하면, 투할린 말마따나 그저 ‘돌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후방이라면 더더욱.
명천사 창백을 신호탄 삼아 돌격을 시작한 에델레드는 눈앞의 벽을 보고 코웃음 쳤다.
“저 울타리를 뭉개 줘라! 돌격!”
에델레드는 거트루드 요새를 울타리 수준으로 격하시키며 일제히 기사들을 진입시켰다. 혼돈에 맞서는 방파제라 불리던 거트루드 요새 안쪽으로 순식간에 적들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이사크레아 여명군 본대가 밀어닥쳤다.
가장 먼저 라울록이 이끄는 라이칸스로프 전사대가 뛰쳐 들어왔다. 이미 수 차례의 돌파 시도로 이골이 난 라이칸스로프 전사들이 언데드 병사들을 단숨에 박살 냈다.
“창백!”
그 혼란 속에서 창백이 또 한 번 ‘후퇴’라는 굴욕적인 선택지를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작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아이작이 그녀를 향해 칼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 머리가 떨어졌으니 ‘장백’이라고만 부르면 되나? 아니면 그냥 백? 어느 쪽이 좋지?”
창백은 분노로 머리가 돌아 버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