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89)
389화. 가면 쓴 괴물 (1)
“자살 행진?”
아이작은 여명군이 등대지기의 음모라는 추측을 떠올리며 물었다. 불사 교단의 명천사인 창백이라면 뭔가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창백은 느슨하게 팔짱을 낀 채 아이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빛의 법전은 이때까지 1차와 3차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성지 루아를 탈환한 적 없었다. 심지어 1차 여명군을 주도한 여명 주교 빌라에르는 명천사 ‘죽은 십이월’이 되었고, 3차 여명군을 성공시킨 사르카 누아 왕은 명천사 ‘묘지 군주’가 되었지.”
그저 역사 강의인가 하는 싶어서 아이작은 약간 실망했다.
저 둘은 워낙 유명해서 아이작도 이미 잘 아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빈곤한 예술가 출신인 창백의 정체가 더 비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 막둥이로 네가 들어왔고. 빛의 법전이 불사 교단의 전력 강화에 큰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지.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라고 단언하는 건가?”
아이작은 좀 더 비밀을 끌어내기 위해 모르는 척 발끈하는 모습을 취했다. 창백이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딱 튕기자 시커먼 심상 세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의자가 돋아났다. 아이작은 자신의 심상 세계를 자기 집처럼 이용하는 어이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어떻게 한 거지?”
“왜? 의자가 뭔지 모르냐?”
창백은 되려 의아한 듯 묻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이 빈곤하고 누추한 공간은 우르반수스가 아닌가? 망각의 숲 어디겠거니 했는데?”
‘여기가 저승이라고?’
그야 이 공간은 아이작 뱃속에 들어와야 거주 가능한 곳이니 저승과 크게 차이 없긴 하다. 그보다 창백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에게 포식당해서 다른 신앙의 사후세계로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이 착각을 정정하지 않는 쪽이 심문에 더 유리하겠다고 생각했다.
“망각의 숲이 맞긴 하지. 그런데 그렇게 뭘 소환하는 건 처음 보는군.”
“그럼 공부해. 하긴, 얼굴이 예쁘면 조금 멍청한 쪽이 낫긴 하지.”
아이작은 잠깐 그 멍청한 쓰레기통에게 잡아먹힌 건 누군지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그가 약간 의식을 집중해 의자의 형태를 떠올리자, 곧 익숙한 나무 의자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이런 일이 우르반수스에서도 가능하던가?’
누구나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이작은 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뜻밖의 지식에 창백을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창백은 다리를 꼰 채 아이작에게 말을 이어갔다.
“계속 이야기하지. 너희는 불사 황제의 대의(大義)를 모른다. 등대지기가 무슨 대계를 꾸려나가고 있든, 붉은 성배가 무슨 음험한 음모를 꾸미든, 세상의 용광로가 어떤 씨앗을 숨기고 있든, 모두 대의 아래 미미한 것들뿐이지. 다 하잘것없고 쓸모없다는 뜻이다.”
창백은 차갑게 말했다.
“이번 여명군을 통해, 불사 교단이 대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더 앞당겨졌을 뿐이지.”
“글쎄, 그런 거치고 등대지기는 너무 잘하고 있지 않나? 지금 여명군 본대의 기세가 이전과 달리 보통이 아닌 걸로 아는데. 게다가 이번 여명군이 마지막이라는 말도 있고.”
창백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여명군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더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여명군은 말 그대로 제국 전력을 다 쏟아 낸 ‘진심 100%’ 상태였으니까.
이런 전력을 막아 내기 위해 불사 교단도 모든 명천사와 모든 시체들을 동원해 막아 내야 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후방을 치고 들어오면서 전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작이 개입하기 전보다는 방어하기 훨씬 어려워졌을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불사 황제가 등대지기에게 속고 있는 거 아닌가?”
아이작은 가지고 있던 추측 일부를 슬쩍 드러냈다. 린데조차도 하고 있던 추측이니, 아이작이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
그러나 돌아온 창백의 반응은 비웃음뿐이었다.
“등대지기는 대단한 천사지. 일개 명천사 주제에 신에 대적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하지만 그 교만함! 교만은 항상 명천사들의 적이다. 그 교만 덕분에 얼마나 많은 명천사들이 추락했는지 넌 모를걸.”
능력 있는 자들이 교만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명천사들은 전부 신조차도 그 능력을 인정한 자들이다. 아이작은 역사 속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명천사가 얼마나 있었을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불사 황제께서는 등대지기의 대계조차도 품는 뜻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의 계획은 모자란 자들의 것과 달리 복잡함도, 어려움도 없어. 그저 뜻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뿐이니까.”
역시 속고 속이는 것이 일상화된 우르반수스, 누구 하나 만만한 놈들이 없다.
애초에 우르반수스, 결정된 역사 자체가 신과 천사들의 조작과 거짓, 기만, 사기, 협잡으로 이뤄낸 결과물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대의가 뭔데?”
“불사.”
창백은 무슨 뻔한 이야기 하냐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불사 교단은 패배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노력하고 계시다. 심지어 너 같은 괴물 찌꺼기에도.”
창백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작은 창백이 한 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녀의 말은 불사 교단의 목표와 일치했고, 불사 황제가 나아가는 방향과도 맞았다. 역사는 짧아도 명백한 신격인 불사 황제가 명천사인 등대지기에게 속아 이용당하고 있다는 추측은, 아이작이 보기에도 조금 과했다.
‘그럼 거꾸로, 등대지기가 불사 황제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둘 다거나, 아니면 궁극적으로 둘이 지향하는 방향이 맞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신들의 싸움에 수많은 목숨들이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불사 황제는 그러면 어쨌든 이번 여명군을 막을 생각인 거지?”
“당연하지. 그들은 모두 불사 교단의 새로운 전력이 될 것이다. 데라 헤만 정도라면 명천사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만약이라도 여명군이 성지 루아를 점령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
창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웃으며 아이작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아이작도 마주 웃어 주며 채근했다.
“넌 어차피 불사 황제에게 버림받았잖아. 기왕 버려진 거 이상한 똥통보다는 예쁘고 멍청한 쓰레기통이 낫지.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털어놓지 그래?”
“뒤끝이 길군…….”
창백은 차갑게 웃고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네가 말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하지만 일어난다면…….”
창백은 담담히 대답했다.
“불행하게도, 불사 황제의 대의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천년 일찍 보게 될 것이다.”
***
아이작은 창백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눠 봤다. 하지만 창백은 ‘여명군이 성지 루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할 경우’에 대해 이야기한 후 부쩍 말수가 줄어들어 영양가 있는 정보는 얻지 못했다.
아이작은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애초에 창백이 소화됐는지 안 됐는지를 확인하려던 것이니 이 정도면 시간 낭비는 아니었어.’
아이작은 그렇게 명상을 접으려던 순간, 문득 무언가 떠올라 창백에게 물었다.
“여기서 혹시 성기사 하나 못 봤나?”
창백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대답해 줘야 할 이유라도?”
“혹시 몰라서. 너도 이웃 하나라도 있는 쪽이 낫지 않나? 칼센 밀터라고, 너도 알 만한 친구인데.”
칼센은 그의 기사단원들을 불사 교단으로 배교시킨 상태였다. 그 역시도 일이 수틀리면 그럴 생각이었고. 명천사인 창백이라면 알지도 모른다. 역시나 창백은 눈을 크게 떴다.
“칼센 밀터? 그 배교자, 갑자기 사라졌다 싶었더니 네 놈이 먹은 거였나? 아니, 잠깐. 너 스무 살 정도 아닌가? 칼센이 사라진 건 10년도 넘었는데, 대체 몇 살 때 먹어 치운 거야?”
“봤어, 못 봤어? 그것만 말해.”
“……별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봤다만 전부 다 보지는 못했어. 천천히 확인해 보마.”
창백은 비협조적이었지만, 그녀 역시 사정이 궁금한 듯했다. 칼센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상관없지만, 아직 여전히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그 찜찜함을 해소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었다.
아이작은 명상을 종료하고 주둔지로 향했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주둔지로 복귀하자 함께 걸어가고 있던 투할린과 에델레드가 아이작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에델레드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성배기사? 아까 우리와 숙소에서 대화하지 않았소? 언제 나갔다 들어왔소?”
아이작은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창백의 잔해를 한 번 더 살펴보고 왔습니다. 필요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아하, 아까 에델레드 폐하께서 명천사가 그렇게 쉽게 소멸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한 게 신경 쓰였나 보구먼.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투할린의 말에 아이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창백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군. 그럼 남은 건 죽은 십이월과 묘지 군주인가? 그 둘이 이쪽으로 오면 여명군 본대를 막을 전력은 없을 테니 앞으로 성지 루아까지는 크게 걱정이 없겠군.”
“기천사들과 정예인 월식군, 경계해야 할 전력은 많습니다. 계속 주의하지요.”
투할린과 아이작의 물 흐르는 듯한 대화에 에델레드는 금방 넘어갔다. 경험이 풍부하다면 대화에서 위화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는 아직 어린 왕이었다.
아이작이 지나가기 전, 투할린이 그의 소매를 붙잡고 속삭였다.
“자네 막사의 그 장난감, 뭔지는 몰라도 자주 쓰지는 않는 게 좋겠군. 잘못하면 성배기사가 요상한 짓을 한다는 소문이 돌지도 몰라. 자네가 혼자 나돌길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아이작은 투할린을 속일 수 없었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주의하겠습니다. 투할린.”
***
아이작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그와 똑같은 얼굴의 또 다른 아이작이었다. 또 다른 아이작은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고 다가와 담담하게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부름’이 발동하면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것이 아이작이 창백을 포식한 후 얻은 능력, ‘분열의 형태’였다.
[분열의 형태(S+)] [스스로를 잘게 쪼개는 고행으로, 마침내 당신은 여섯 번째 손가락을 갖게 되었습니다. 힘과 육신의 일부를 쪼개 정교한 자신의 ‘복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복제는 부름을 통해 영혼이 있는 쪽으로 다시 회수할 수 있으며, 지식과 힘 모두 흡수됩니다. ‘원본’은 영혼이 있는 위치로 결정됩니다.]기본적으로 창백의 몸과 같은 방식이었다. 영혼을 가진 본체가 있고, 그 본체가 모든 주도권을 갖는다. 하지만 복제체를 잃으면 그만큼의 힘을 잃는다.
창백을 만나러 가기 전에 주둔지를 비운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시험 삼아 만들어 본 복제체였다. 능력 설명에 나온 대로, 아이작이 그것을 회수하자마자 투할린과 에델레드가 나눴던 대화가 스며들듯 들어왔다.
대화 내용은 평범한 작전 회의였다.
앞으로의 여정 방향, 미궁 계곡 공략 방법, 다른 명천사가 올지 안 올지 추측하는 과정에서 창백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다. 그 대화 속에서 투할린도 딱히 위화감을 느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막사 밖에서 나를 발견하고 이질감을 깨달은 모양이군.’
이 복제체는 완벽한 아이작의 복제체다. 힘은 쪼개져 있지만 이성과 감정, 모든 행동 방식은 아이작과 일치했다.
하지만 화로 장인인 투할린이 보기에는 어딘가 다른 점이 보였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딱히 정체성의 위기나 불안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복제 아이작은 그저 그에게 손가락이 하나 더 돋아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혹은 창백의 경험이 스며들고 있는 걸지도.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다고 해서 다른 손가락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는 것처럼, 아이작은 익숙하게 복제체를 대했다.
‘애초에 촉수를 쪼개서 만든 것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