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93)
393화. 가면 쓴 괴물 (5)
아이작 때문에 여명군이 실패한다.
그 말에 시에로는 움찔하며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사실 그가 평범한 사제였다면 개소리하지 말라며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활약하고 있는 성기사 때문에 여명군이 실패하다니?
아무 공도 세우고 있지 못한 제국 기사단장이 질투 때문에 헛소리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시에로는 아이작이 ‘신실한 성배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기적을 행사하는 것도 본 적 있다. 때문에 펠트런의 망언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정보기관 수장인 펠트런은 당연하게도 시에로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시에로가 아이작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성배기사와 안면이 있으시죠?”
“아, 뭐, 잠깐 얼굴만 본 정도…….”
그가 다급히 얼버무리자 펠트런은 확신했다.
시에로는 아이작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정보력으로도 닿지 않는 은밀한 비밀일 가능성이 높았다.
시에로는 헛기침하며 펠트런을 채근했다.
“그런데 대체 왜 성배기사 때문에 여명군이 실패한다는 겁니까? 성배기사는 악몽 해협을 건너 소금 사막까지 평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성지 루아를 수복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여명군 본대보다 성배기사 쪽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이죠.”
펠트런은 웃으며 말했다.
“등하맹인들은 이번 여명군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신의 뜻을 온전히 세상에 이루기 위해서일까요?”
“그야 당연히…….”
“아닙니다. 인간은 아래든 위든 똑같아요. 더 인정받고, 더 사랑받고, 더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지금 빛의 법전 수뇌부는 말 그대로 모든 걸 내던지고 여명군에 투신했죠.”
펠트런의 입가에 비웃음이 담겼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웬 놈팽이에게 모든 공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눈이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시에로는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설마 빛의 법전이 아이작을 몰아세우기라도 한다는 건가?
“간단합니다. 여명군 본대의 원정이 실패하면 됩니다. 아니, 퇴각하는 척만 해도 충분하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시에로는 펠트런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여명군이 실패하거나 퇴각한다고 해서 아이작까지 실패할까? 아이작은 아무도 뚫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악몽 해협과 소금 사막을 돌파했다. 그를 견제하는 불사 교단 병력은 거의 없으니…… 그 순간 시에로의 머리에 무언가 스쳤다.
“불사 교단 본대! 여유가 생긴 우르단투 제국의 월식군이 후방으로 빠져 성지 루아를 보호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펠트런은 빙긋 웃었다. 아주 머리 나쁜 사제는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 깨우치시니 대화가 빠르겠군요. 맞습니다. 지금은 여명군 본대의 위협 때문에 월식군이 수도 우샤크를 지키고 있지만, 압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성지 루아를 지키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겁니다.”
즉, 전선이 잠시라도 소강상태에 접어든다면 아이작이 불사교단 최정예를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물론 아이작이 새롭게 파견된 월식군마저 격파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러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반신(半神)의 업적이라고 봐야 했다. 시에로는 아이작이라면 어쩐지 그것도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근거 없는 믿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등대지기께서 그런 상황을 허락할 리가…….”
“태업에 허락이 필요하겠습니까? 무능엔 이유가 없지요. 신들의 대계인지 뭔지 나는 모르겠지만, 저는 덕분에 여명군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천사들에게 성배기사인지 뭔지가 아니라 자길 봐 달라고 어린애처럼 앙탈을 부리는 꼴이다. 펠트런도 비슷한 모습을 상상한 건지 낄낄거리며 말했다.
“천년왕국의 강림을 막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의 질투와 시기라니, 재밌지요?”
시에로는 재미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여명군은 끔찍한 사상자를 내고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불사 교단에 시체만 헌납하는 꼴이고, 아이작은 남쪽 땅에 고립되어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와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어떻게든 해보기로 약속했던 시에로는 우울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여명군은 실패해요. 제가 생각하는 건 그다음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럼 당연히 얼굴마담이 제일 먼저 끌려 나오겠지요. 데라 헤만 말입니다.”
펠트런은 웃으며 입가를 만졌다.
“저는 그때 데라 헤만을 끌고 나오는 사람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패전 뒷수습이란 고난으로 가득하겠지만, 많은 것을 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거든요.”
펠트런은 시에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시에로 사제님께서 제게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능한 교단을 비난하고, 패배한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끌어내린 다음, 그 빈 공백을 우리가 채우는 겁니다.”
“그, 그런 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펠트런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일렁였다.
“그때가 되면 발트제메르 황제가 다시 나타나 제국을 뒤엎을 테니까요.”
이미 제국에는 그가 숨겨 둔 반역의 씨가 움트고 있다.
펠트런은 숙청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선별된’ 일부 반역자는 남겨 두었다. 모두 발트제메르가 다시 권력을 휘어잡는 데 필요한 전력들이었다. 그중에는 브란트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에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이야기에 숨도 쉬기 어려웠다. 펠트런은 아무렇지도 않게 빛의 법전의 붕괴와 제국의 전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곁에 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서겠노라고 말하는 펠트런에게 시에로는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빛의 법전 신도가 아닙니까? 천년왕국까지 부정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건 대체 뭡니까?
“저는 인간의 시대를 바랍니다.”
펠트런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발트제메르가 멍청한 짓을 하면서 걷어차는 바람에 뒤로 미뤄지긴 했지만, 저는 ‘천상은 신에게, 지상은 인간에게’라는 신념을 믿습니다. 이 땅은 신과 천사의 땅이 아니라, 영웅과 왕의 땅이 될 겁니다.”
그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시에로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펠트런이 자신을 찾아온 순간, 이미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약 부정의 답을 내놓는다면 자신이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에로가 꺼낸 대답은 긍정이 아닌 다른 말이었다.
“결국 펠트런 단장의 말은 성배기사를 죽게 만들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의 계획대로라면 여명군은 실패하고 천년왕국은 강림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아이작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펠트런은 입가를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꼭 성배기사가 죽을 필요가 없긴 하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펠트런은 입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사실 이쪽이 진짜 용건이자,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성배기사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가능합니다. 교단의 어리석은 행보에 영웅이 죽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시에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저 먼 땅에 있는 아이작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알리고 설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펠트런 말대로 여명군이 실패하고, 교단이 그토록 이기적이라면 아이작을 도울 방법은 협조하는 것뿐이다.
필요한 것은 마지막 확인이었다. 최소한의 안전.
“페, 펠트런 단장의 말씀은 믿지만…… 감히 교단에 대들고도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십시오.”
펠트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제 뒤는 모든 음모와 기만의 주인께서 지켜주고 계십니다.”
***
미궁 계곡은 아주 오래전 이 땅에 있었던 거대한 범람의 흔적이었다.
어떤 복잡한 현상으로 탄탄한 땅과 부드러운 땅이 어지럽게 뒤얽혔던 지반 위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거대한 대홍수가 있었다. 대홍수는 한동안 이 땅 전체를 집어삼키고 휩쓸었다.
물이 빠진 뒤, 대자연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계곡이 남았다.
물이 계속해서 흘렀다면 어느 정도 크고 작은 강으로 합쳐졌을지도 모르지만, 이후 이 땅이 사막화되고 불사 교단까지 생기면서 물은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 덕분에 미궁 계곡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복잡한 미궁이 되어 있었다.
‘직접 보니 장관이긴 하군.’
물론 아이작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미궁의 구조를 달달 외울 정도로 고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권속을 통해 위에서 내려다보면 길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계곡 곳곳에는 그가 흩뿌려 둔 권속들이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고 있었다.
권속들이 주로 사냥하고 포식하는 것은 주로 미궁 계곡에 발을 잘못 디딘 외경의 괴물들이었으나, 아이작의 목표는 그런 쇠약해지고 죽어 가는 괴물들이 아니었다.
한참을 계곡을 내려다보던 아이작의 눈이 번뜩였다.
아이작은 한쪽 눈을 가리고 이변을 발견한 지힐렛에게로 의식을 집중했다. 곧 지힐렛의 미간에 아이작의 안구가 새롭게 돋아나면서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찾았다.’
거대한 계곡 벽 틈새에, 기묘한 주름들이 수십 개 자글자글 박혀있었다. 언 듯 보기에는 지질학적 현상으로 생긴 이변처럼 보이지만, 아이작만은 알 수 있었다.
저게 바로 이 미궁 계곡의 최악의 위협 중 하나였다.
‘전부 위치로 모여. 이사크레아 군이 오기 전에 저것만큼은 치워야 한다.’
물론 병사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괴물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도 있긴 했지만, 탐나는 포식 상대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소금 사막을 깨뜨리기 위한 신성한 제물 중 하나였으니까.
즉, 막대한 신성력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쉽게 지힐렛이 있는 위치까지 다가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그의 귓가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하아…….”
아이작은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으며 카훌린을 뽑아 들었다. 루앗딘 열쇠는 분열된 아이작에게 맡겨뒀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가 칼을 뽑기 무섭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칼에 충돌했다.
[기기기기기긱!]언데드 특유의 정신적 파장이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작을 덮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백골과 새의 날개뼈를 그럴듯하게 합친 듯한 인조(人鳥) 언데드였다. 거대한 대낫, 혹은 창을 든 언데드들은 깃털도 없는 주제에 날개를 펄럭이며 아이작 주변을 맴돌았다.
“하늘 위에서 언제 내려오나 했지.”
미궁 계곡을 지키는 이 언데드들은 ‘죽음의 천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불경한 이름이었지만 이놈들을 만들고 이름 지어준 당사자가 다름 아닌 창백이었기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죽음의 천사들은 계곡의 틈새에 숨어 있다가 불운한 희생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소리 없이 덮쳐서 목을 치는 역할을 갖고 있었다. 데스나이트처럼 활용한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과 새의 영혼이 조잡하게 합쳐진 탓에 지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기기기기기!]죽음의 천사 하나가 일격에 몸통이 베여 나갔지만, 놈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나운 까마귀 떼처럼 울부짖으면서 아이작의 빈틈을 노리며 맴돌았다. 아이작이 쓰고 있는 ‘기어오는 공포’ 가면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미궁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저지해야 한다는 목적 사이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촉수를 뻗어도 닿기 애매한 거리에 아이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이시여, 도움이 필요하나이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헤카틀리가 주의 깊게 물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코웃음치며 부정했다. 대신 아이작은 손안에 저 너머의 색채를 품고 있다가, 단숨에 허공에 흩뿌렸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색채가 연막처럼 죽음의 천사들을 휘감자 놈들은 급히 날개를 퍼덕였으나, 이내 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연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경한 존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너머의 색채 속에서 촉수들이 튀어나와 죽음의 천사들을 휘감았다. 촉수들은 자비 없이 단숨에 척추와 날개, 두개골을 으스러뜨리면서 시커먼 색채 너머로 끌고 갔다.
몇몇 죽음의 천사들이 발악하며 발버둥 치며 빠져나왔다. 그때 아이작이 끌어내린 죽음의 천사 중 하나를 움켜쥐며 포식 효과를 발동했다.
[어두운 성찬례 효과가 발동합니다.]촉수가 모처럼 주어진 성찬에 감동하며 불경한 예배를 올렸다. 일대에 있던 죽음의 천사들이 공포에 잠식되었다.
어설픈 지능이 오히려 해악이 되었다.
동물이 갑작스럽게 공포에 빠지면 심장이 멈추고 몸이 얼어붙듯, 죽음의 천사들은 이미 죽었음에도 날개를 접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계곡 아래로 추락한 죽음의 천사들이 바스러지는 꼴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효과가 전보다 강해진 것 같군. 이 정도면 광역 공포기로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촉수로 먹는 꼴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게 영 어렵단 말이지…….’
물론 그의 권속들은 아이작의 식사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찬사와 기쁨의 뜻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호들갑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힐렛으로부터 다급한 의지가 전해져 왔다.
‘계곡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