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94)
394화. 세상의 껍질 아래 (1)
쿠르르르…….
미궁 계곡 전체가 거세게 진동하면서 곳곳의 돌조각과 먼지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실은 단지 무언가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 원인을 알고 있었지만, 돌발적인 상황에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계곡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지힐렛이 보았던, 아이작이 막 향하려 했던 위치였다. 쿵. 육중한 굉음이 미궁 계곡을 들썩이게 했다. 아까와는 다른 충격에 바위가 무너지고 일부 지형에서는 산사태까지 일어났다.
쿠르르르…… 쿵. 쿠르르르…… 쿵.
지친 무언가가 힘겹게 몸을 끌고 오는 듯한 소리. 그 소리는 아이작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작은 놈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권속들은 이곳으로! 방해가 될 만한 죽음의 천사들은 발견 즉시 제거해라.’
아이작의 의지에 따라 권속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계곡이 들썩거리자 절벽 틈새에 매복하고 있던 죽음의 천사들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천사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아이작을 향해 다가오는 거체 위를 맴돌았다.
마침내 아이작은 계곡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그것과 마주했다.
외경의 신성한 괴물. 일명 ‘산상노인’.
백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였지만 크고 두터운 가죽의 주름을 바닥까지 질질 끌고 있어서, 마치 허리 굽은 노인이 온몸을 덮는 넝마를 뒤집어쓰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두꺼운 가죽 아래 출렁거리는 검붉은 촉수들과 수십 개의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저 눈동자들이 지힐렛이 발견한 주름의 정체였다.
절반 이상이 감겨있고, 일부는 똑바로 뜨고 있어도 빛을 잃은 채 흐리멍덩했지만 수십 개의 눈동자들은 아이작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저걸 어떻게 잡는다.’
원래 아이작의 계획은 산상노인이 눈을 뜨기 전에 때려잡는 것이었다. 놈은 덩치가 커 어지간한 공격 따위는 통하지도 않지만, 깨어나지 않으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뭔가가 놈을 자극한 것 같았다.
‘설마 어두운 성찬례 효과 때문에 자극받은 건가?’
타이밍을 고려하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정면승부를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계곡을 지나갈 때 놈이 깨어 있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테니.
그렇다면 놈이 어두운 성찬례 효과에 감동받은 건지, 아니면 공포에 질린 건지가 관건이었다.
지금까지 혼돈에 속한 괴물들이 기본적으로 적대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오오오오오!]산상노인이 갑작스레 포효를 내질렀다.
아이작은 혀를 차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공포에 대한 반응은 겁에 질리는 것만이 아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듯, 상대방을 향해 달려드는 경우도 있다.
‘먹어 치워야겠군.’
***
산상노인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질학적 규모의 역사를 가진 계곡의 껍질이 벗겨지고 파괴되었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아이작을 향해 들이받을 듯 달려오면서, 동시에 가죽 아래로 무언가를 꿀렁대며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배설물처럼 보이는 저 덩어리들은 사실 저 너머의 색채와 같은 계열의 힘이다.
‘인면거미군.’
색채 덩어리는 빠르게 분열하더니 이내 수십 마리의 인면거미가 되어 계곡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루주베르크에서 종말처리자가 배설했던 인면거미보다 훨씬 더 크고 생김새도 흉악했다. 그리고 혼돈의 괴물답게 다리 개수나, 생김새가 제각각이었다.
‘울가레, 들이받아라.’
아이작은 산상노인이 더 다가오기 전에 새롭게 들인 권속, 울가레에게 명령을 내렸다. 계곡 아래를 기어다니며 추락한 죽음의 천사들을 뜯어먹던 울가레가 산상노인을 향해 돌격했다.
솔직히 덩치 차이를 보면 짓밟혀 으스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돌부리에 걸리는 정도의 충격만 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울가레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 주었다.
[구우우우우!]쾅. 울가레의 덩치도 집채만 하지만, 놈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산상노인을 주저 없이 들이받았다. 동시에 산상노인은 휘청거리더니, 옆의 절벽 쪽으로 넘어졌다.
어마어마한 붕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충격에도 울가레는 으스러지거나 부서지는 대신, 몸을 둥글게 말며 튕겨 나갈 뿐이었다.
‘생각보다 튼튼하군. 게다가 빠르고.’
공벌레처럼 생긴 외형은 괜한 게 아닌 모양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성문 정도는 가볍게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상노인은 잠시 휘청거리긴 했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아니었다. 녀석은 가죽 아래 다리들을 놀려 다시 일어나려 애썼다. 그 사이 놈이 싸질러놓은 인면거미가 절벽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아이작은 울가레가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고 이 자리를 자신의 권속들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헤카틀리, 네 차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작의 지시에 헤카틀리가 절벽 틈새에서 마치 피어나듯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은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미인의 형상이지만, 코 위쪽으로는 춤추는 촉수 다발의 형상을 가진 그녀는 말 그대로 절벽의 꽃 같았다.
헤카틀리는 손과 머리 위의 촉수들을 놀려 순식간에 기어오르던 거미들을 낚아챘다. 그리곤 거칠게 제 입과 머리 위의 수술 안쪽으로 쑤셔 넣었다. 끝없는 허기가 주둥이를 벌린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인면거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입가의 체액을 닦아내더니, 인면거미의 다리 하나를 똑 떼어내 입에 넣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녀를 보고 있던 인면거미들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내 인면거미들이 스스로의 사지를 입에 쑤셔 넣고 포식하기 시작했다.
자가포식의 저주.
끝없는 허기에 굶주리는 저주를 받은 인간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먹어 치우고, 가족들까지 먹은 다음,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까지 먹었다는 신화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끝없는 허기에 시달리는 혼돈의 권속들에게 잘 통할법한 강력한 저주였다.
‘헤카틀리가 스스로 적들을 분석하고 약점을 공략할 줄 안다는 거군. 혼돈의 권속들에 대해 이 정도로 잘 이해한다는 것은 내 권속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마녀였던 시절부터 쌓은 지식인가?’
아이작은 흥미를 느꼈지만, 어느 한 가지라고 특정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헤카틀리 역시 울가레처럼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인면거미만이 아니라 인면지네, 인면벼룩 비슷한 것들까지 기고 뛰며 올라왔지만, 헤카틀리의 저주와 허기진 손길을 통과하는 놈은 별로 없었다.
쿵.
그 사이, 산상노인은 일어나 다시 아이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조용히 자신만의 직무를 수행하던 지힐렛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이작이 지힐렛에게 기대한 역할은 쥐새끼 출신다운 잠입과 암살이었다. 그동안 암살을 헤사벨이 맡게 되면서 지힐렛은 한동안 잠입 외엔 일이 없었는데, 일단 임무에 투입하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산상노인이 그 거대한 체구를 끌고 아이작을 향해 돌격하려던 순간, 갑자기 놈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내 수십 개의 눈알들이 사방팔방으로 제멋대로 돌아갔다. 산상노인은 그 거대한 몸뚱이로 경련이라도 하듯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갑작스레 격렬한 체액을 쏟아냈다.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하나둘 넘어가더니, 이내 모든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었다. 산상노인은 온몸에서 체액을 쏟아내며 쓰러졌다. 이내 산상노인의 눈알 하나를 파괴하고 지힐렛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산상노인의 두꺼운 가죽을 뚫을 틈이 안 보이자, 인면거미들을 배설할 때 그 틈새로 파고들어 몸 내부로 들어간 것이다.
‘처리했습니다.’
“고생했다.”
아이작은 게임상에서는 그렇게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그것도 깨어났을 때에는 난이도가 수직 상승했던 산상노인을 이렇게 쉽게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산상노인이 약한 것이 아니라 아이작 본인의 힘과 권속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아문달라스가 말했듯이, 아이작은 이제 인간의 반열이 아닌 천사들과 겨뤄야 격이 맞는 수준에 도달했다.
헤사벨만이 아니라 모두들 크게 성장한 것이다.
‘트라엘굴도 시험해 보면 좋겠지만, 녀석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지키고 있으니.’
하지만 권속들이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권속들이 주교급 내지는 소드마스터 수준은 될 거라 보았다.
게다가 각 권속이 자잘한 수하들까지 거느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작에게는 숨겨진 또 하나의 군대가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주인님.”
헤카틀리가 갈증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것을…… 저희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헤카틀리는 산상노인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혼돈의 권속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채울 수 없는 식욕과 허기에 시달리며, 무엇이든 먹어 치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평소에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닌데도.
물론 아이작도 힘을 크게 쓰고 허기진 상태에 빠지면 정말 책상이라도 씹어먹고 싶은 기분이 되기 때문에 이해했다.
그때 지힐렛이 눈치 빠르게 산상노인의 내부에서 무언가를 뽑아 가져왔다.
[산상노인의 정수입니다. 혼돈의 주인께 바치나이다.]마치 우두머리가 가장 먼저 귀한 것을 입에 넣어야 하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키지 않아도 이런 짓도 이제 잘하는 걸 보면 능력만이 아니라 지능도 제법 상승한 것 같다. 그 말은 반대로 더 엄격하게 통제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뜻이었다.
“잘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먹어 치우도록.”
아이작은 왼손의 촉수를 꺼내 정수를 휘감았다.
사실 죽은 신의 내장에 산상노인의 고기를 가득 채우면 아이작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이미 충분히 성장한 아이작에게는 그보다 정수 안에 가득 든 신성력이 더 탐스러웠다.
산상노인의 사체 전부를 먹어 치워도 채울 수 없는 힘이 이 정수 안에 깃들어 있었다.
아이작은 단숨에 검붉은 정수를 으스러뜨려 포식하려다가, 문득 산상노인도 혼돈의 권속인 이상 ‘부름’에 응하리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다면 부름에 저항하겠지만 사체라면 먹어 치우는 것보다 부름을 행하는 것이 효율이 더 높다. 소실되는 것 없이 온전히 먹어 치우는 기술이니까.
아이작은 산상노인의 정수에 ‘부름’을 행했다.
***
어제. 그저 서 있었다.
헤매고 헤매다가,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돌아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내일도 똑같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 계곡의 바위가 되어갔다. 영원히.
태양이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넘어갔다.
138년 전.
나는 그저 땅을 걷고 있었다. 외경을 넘어 떠돈 지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쪽으로 갈수록 몸은 쇠약해지고 관절은 굳어간다. 이곳이 나를 부정하는 영역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모른다. 견딜 수 없는 갈망이 나를 저 안쪽으로 부른다. 기이한 모습의 계곡을 발견했다. 잠시 이 계곡에서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다.
다시 또, 태양이 거꾸로 돌아간다.
264년 전.
외경에는 오늘과 내일과 어제의 구분이 없다.
302년 전.
빠르게 돌아가는 태양 볕 아래에서,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얽힌 손이 보인다. 손에는 단검을 쥐고 있고, 온통 피투성이다. 하인들이 급히 다가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 준다.
어르신. 하인이 속삭인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하인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더니, 흰 모래가 되어 무너진다.
내 앞에 노란 옷을 입은 노인이 서 있다. 노인은 내 손에 단검을 쥐여준다.
이걸로 베셰크를 죽여. 이대로 두면 그가 멸망을 막는 방파제가 될 거다.
나는 단검을 움켜쥐고 베셰크 주교를 찾아간다.
나는 이미 베셰크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맞이한다. 단검으로 배를 후벼파기 전,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친다.
베셰크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린다.
“아이작?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