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95)
395화. 세상의 껍질 아래 (2)
베셰크가 이름을 부른 순간, 빠르게 아이작의 의식이 떠올랐다.
‘나’는 사라지고 그 몸을 대신 차지한 것은 아이작의 자아였다. 낯선 장소였지만, 아이작은 이 상황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짧게 심호흡한 뒤 베셰크에게 물었다.
“여기는 우르반수스인가?”
아이작은 ‘예’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베셰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다릅니다.”
“다르다고?”
“여기는 지워진 역사입니다. 이 역사에서는 제가 칼에 찔려 죽지요.”
베셰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작은 잠시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했지만, 이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우르반수스의 개정.
원래 바다 교단이 등대지기를 보내주고 영광을 누렸던 역사가 있었으나 우르반수스 개정으로 수백 년의 세월이 지워진 것처럼, 베셰크도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당신을 살리려고…….”
베셰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빛의 법전 명천사…… 아마도 등대지기가 저를 살리려고 이 역사를 없던 일로 만들었던 것이겠지요.”
아이작은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즉, 등대지기는 빛의 법전 최대의 적, 천년왕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어 낸 셈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보았다.
노란 옷을 입은 노인.
그가 자신에게 이 단검을 주면서 ‘베셰크가 멸망을 막는 방파제가 될 거다’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등대지기는 베셰크를 방파제로 쓰기 위해 살려 두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등대지기가 좀 인명을 경시하는 경향은 있지만,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상한데.”
“뭐가 말이죠? 아,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차라도 마시지 않겠습니까?”
베셰크는 아이작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교회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졸지에 베셰크를 암살하러 왔다가 갑자기 차를 마시게 된 아이작은 말로 설명 못 할 기분을 느끼며 따라갔다.
베셰크는 이미 끓인 차와 말린 대추를 준비 중이었다. 원래부터 이 몸, 산상노인과 대화하려 했던 모양이다.
“앉으시죠.”
아이작은 홀린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베셰크는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상하다는 건 압니다. 저도 이런 곳에서 귀하를 만날 줄 몰랐으니까요.”
“그래. 그거 말이야. 불사 교단은 우르반수스가 없지 않나? 우르반수스를 이미 지상에 끌어내려 융화시켰잖아. 저승과 이승의 구분이 없는 신앙이라고.”
“맞습니다. 여긴 불사 교단의 우르반수스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워진 역사지요.”
“지워진 역사는…… 찾을 수 없는 것 아니었나?”
아문달라스도 그랬다. 보여 주고 싶어도 지워진 역사는 보여 줄 수 없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니 문득 아이작은 이미 지워진 역사를 본 적 있었다. 어부의 집에서 부르는 자의 살점을 먹었을 때. 그때 아이작은 소금 의회가 생기지 않은 역사를 보았다.
지금과의 공통점이라면, ‘신’이 이 시간에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은 지워진 역사도 볼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베셰크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신도 지워진 역사를 끌고 올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귀하가 어떻게 이 기억을 들여다보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힌트가 될 겁니다.”
아이작은 산상노인의 정수를 먹어 치우고 이곳에 왔다. 소금사막에서도 사드라자의 정수를 먹었었다. 정수를 먹으면 지워진 기억을 볼 수 있는 건가, 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러다 아이작은 문득 공통점을 깨달았다.
“외경의 괴물들?”
베셰크가 빙긋 웃었다.
“맞습니다. 귀하께서 본 기억들은 외경의 괴물들이 품고 온 기억들이지요.”
역사에서 지워진 기억을 품고 있는 자들. 외경의 괴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지워진 역사의 한 페이지인 셈이다.
아이작은 그 사실을 알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외경의 괴물들은 지워진 역사의 희생자들인가?”
베셰크가 미소 지었다.
“역시 머리가 좋군요.”
***
아이작은 외경의 괴물들이 그저 이름 없는 혼돈이 만들어 낸 괴물들…… 그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힘이 만들어낸 파편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이름 없는 혼돈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괴물들이기도 했으니까.
베셰크는 거기에 설명을 덧댔다.
“귀하께서 입고 오신 그 육신, 그 기억의 주인은 ‘산상노인’, 알 야하메드라는 이름의 노인입니다. 멸망한 고대 제국의 귀족 후예지요. 하지만 여전히 거느린 부하들이 아주 많은 지역 토호였는데, 교단을 상대로 여러 번 암살을 저질렀습니다.”
“교단을 상대로?”
“예. 저를 포함해서요. 하지만 이 당시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요. 이때 저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거든요.”
베셰크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베셰크가 무슨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는지 관심 없었다.
“나는 외경의 괴물들이 이름 없는 혼돈이 만들어 낸 괴물인 줄 알았는데.”
“글쎄요, 빛의 법전에 의하면…….”
베셰크가 담담히 교리에 대해 언급했다.
“모든 정보는 지워지지 않고 어딘가에 반드시 남는다고 합니다. 설령 우르반수스에 의해 역사가 개정되더라도, 원래 있었던 일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치워지지요. 우르반수스에는 정순한 ‘선택된 역사’가 단단한 껍질로 남지만, 그 아래에는…….”
“……지워진 모든 역사들은 ‘외경’으로 밀려나는 건가?”
베셰크는 대답 대신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외경을 접해왔습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자멸하는 광경도 보았지요. 저는 이름 없는 혼돈을…… 빛의 법전의 ‘나머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머지?”
“산수는 할 줄 알지요? 어떤 수를 나누고 나면 남는 숫자가 있잖습니까. 저는 이름 없는 혼돈이 바로 그 나머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빛의 법전이 딱 떨어지는 정수들로 규율을 세우고 나면, 그 규율에 맞지 않는 모든 수를 품는 자.”
정해진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 정형화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육신의 소유자들,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 정해진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망을 바라는 자들…… 그런 나머지를 위한 신앙이 이름 없는 혼돈이라고, 베셰크는 말하고 있었다.
“저는 이름 없는 혼돈이란 외경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괴물들이 자신더러 ‘배신자’라고 부르짖던 꼴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빛의 법전의 성자.
그러나 그 뱃속에는 이름 없는 혼돈의 괴물을 품고 있다.
‘배신자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군.’
하지만 그 내막에는 무언가 더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은 그 내막이 궁금하면서도, 더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을 느꼈다. 성지 루아를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이작은 비밀스러운 역사를 파헤치고 있었다.
불사 교단과의 싸움은 과거와의 투쟁이다.
아이작조차도 그 투쟁을 피해 갈 순 없는 것 같았다.
“신과 천사들이 우르반수스를 마음대로 주물러댈 때마다 외경이 크게 출렁이지요.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역사를 선택할 뿐이지만, 그때마다 수많은 삶이 정제되지 않은 혼돈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겁니다.”
“…….”
아이작도 외경이 어떤 지옥인지는 안다. 간혹 넘어오는 괴물들만 봐도 그곳이 인간은커녕 어떤 생명도 살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외경에선 가혹한 환경을 불행하다고 느낄 만한 자아나 지성마저도 마모될 것이란 점이다.
남는 것은 극한 환경이 만들어 낸 허기와 폭력성뿐.
***
“……나한테 이런 걸 왜 알려주는 거지?”
아이작은 베셰크의 친절에 떨떠름하면서도 경계심을 느꼈다.
우르반수스에 대한 지식은 신들이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지식이다. 그중에서도 지워진 역사라면, 아이작과 협력하던 천사들조차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베셰크는 숨김없이 알려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추측까지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냥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지? 나는 네 적인데?”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베셰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귀하를 귀하게 쓸 생각입니다. 아직은 허락 없이 목숨을 빼앗아 노예로 굴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이작은 베셰크가 ‘아직’이라고 말한 단어에 초점을 맞췄다.
베셰크는 지금 호의를 베풀고 있지만, 이대로 아이작이 성지 루아를 향해 나아가면 그는 결국 성지 루아와 귀한 인재 사이에서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친절을 베풀다 보면 내가 넘어올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당신이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베셰크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당신은 지금 미궁 계곡에 있군요. 동료들도, 친구들도, 부하들도 뒤에 둔 채. 단지 성장을 위해 앞서 온 것 같지는 않고, 그들을 보호하거나 감싸기 위함입니까?”
“비슷해.”
“하지만 이렇게 가정해 보지요. 만약 당신의 군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작은 즉시 적개심 어린 눈으로 베셰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베셰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당신의 군대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분들도 모두 귀한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 품으로 끌어안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게 생각하겠지요. 제가 말하는 상황은, 당신이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가 당신을 공격할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
아이작은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빛의 법전이 나를 공격하는 경우…… 를 말하는 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베셰크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그에게서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천사들조차 아이작을 보고 금방 알아차렸으니. 때문에 아이작은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했다. 명천사들의 명령에 고분고분 복종하면서 협력하는 식으로,
심지어 지금은 여명군 최전선에서 성지 루아 수복을 가장 가까이 두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 힘들었다.
“빛의 법전 교단에서 나를 거부하고 부정한다면…….”
어떻게 하겠다고도 말하기 힘들었다.
아이작은 어쨌든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 좋았기에 그들의 편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고, 심지어 주변 사람들을 해치기까지 한다면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까?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귀하의 인성과 성품으로 볼 때, 혼돈을 고르리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한 불사 교단이라는 건가?”
불사 교단은 생전의 회한과 아쉬움, 두려움의 잔재가 만들어 낸 신앙이다.
불사 교단 자체가 뭔가 특별한 교리와 믿음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백골에 대한 집착은 그냥 그들의 문화일 뿐이다.
불사 교단은 그저 ‘죽지 말고 지상에서 계속 원하던 걸 하라’고 제안한다.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베셰크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네가 등대지기와 협잡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베셰크는 웃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지요.”
아이작은 놀라지 않았다.
“등대지기의 목적이 뭐지?”
“그 점은 저와 같습니다.”
베셰크는 손가락들을 마주 닿게 두드리며 말했다.
“더 이상 필멸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 단단한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