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97)
397화. 등잔 아래 (1)
아이작은 갑작스레 자신이 우주 한가운데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춥고 외로운 존재였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것은 끝없는 허기에 시달리는 잔혹하고 무감정한 폭력의 덩어리들뿐. 이방인이었던 그는 그렇게나 이 세상에 애정을 바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으며, 추방되어야 할 존재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하지만…….’
아이작은 이렇게 춥고 쓸쓸했던 날을 기억한다.
시커먼 겨울비 속에서 헤매던 날, 혼자 길을 걷든 그의 손을 붙잡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한다. 그가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을 때 붙잡아 끌어내어 준 곧고 바른 한 이단심문관을 기억한다.
그녀를 떠올리자 아이작은 서서히 발아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단단한 땅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질서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혼돈이 아니라.
‘그렇군.’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스케일만 조금 커졌을 뿐이지, 그는 여전히 수도원에 있었던 시절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정체를 들키면 죽을까 봐 걱정하지 않았던가.
온 세상이 그를 적대하고 죽이려 든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온 세상이 자신을 적대할’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벨, 이솔데, 에델레드, 로튼해머…… 이 세상에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이 있는 한 아이작 역시 이 세상을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명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등대지기고 불사 황제고 간에…… 아무튼 개같이 굴면 싹 다 죽는 거야.’
그는 ‘세계적 규모’로 땡깡 피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
“지켜야 할 것은 목숨이 아니라 영혼이다! 죽더라도 배교하지 말아라! 천국의 문이 눈앞에 있는데 왜 돌아선단 말이냐?”
사제의 열정적인 포효에 여명군은 서서히 전진해 나갔다. 카틀란 능선에서의 혈투는 여명군의 극적인 승리로 끝났다. 오월의 검이 묘지 군주를 쓰러뜨리면서 전선이 단숨에 무너진 것이다.
정확히는 오월의 검의 지원을 받은 데라 헤만이 승리를 거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데라 헤만은 아무리 오월의 검의 전폭적인 힘을 받았다지만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묘지 군주를 찍어 눌렀고, 마침내 그의 반신을 쪼개는 데 성공했다.
“상대가 안 좋았지요.”
로헨 오터는 화려하게 황금으로 치장된 마차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여명군 군세를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데라 헤만은 우리 교단에서 최대한 숨기고 있던 대천사 비밀병기입니다. 신성을 포식하는 그자의 성체는 천사도 상대하기 어려운 능력이지요.”
인간을 상대할 때는 그리 강한 능력이 아니지만, 검술로도 데라 헤만은 이미 인간 중 최강자 급이다. 사실상 결점이 없다시피 하다.
“머저리들은 데라 헤만을 리히트하임만 지킬 줄 아는 집 지키는 개처럼 취급하던데, 우리가 보안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겁니다. 데라 헤만이 칼센에게 패배했을 때도 얼마나 공을 들여 숨겼었는데요.”
사실 묘지 군주와의 전투에서 데라 헤만 또한 큰 부상을 입었다. 사제들 수십이 들러붙어 번갈아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전장에서 활약하기 어려울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앞의 상대가 알 필요는 없었다.
[확실히 이런 병기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마차 안에 탄 또 다른 사람─제복으로 살갗 하나 보이지 않게 전신을 가린 남자가 정신적 파장으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과 패배감이 담겨 있었지만, 분노나 울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의 정체는 알 빌라에트라는 이름의 리치였다.
리치가 여명군 한복판에서, 그것도 추기경과 단독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이 경악하겠지만, 둘은 태연히 대화를 이어 갔다.
로헨은 다시 한번 그를 도발하는 이야기를 꺼내 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도 설마 묘지 군주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패배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은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노력 중인데 쉽지 않군요. 덕분에 전선이 수도 우샤크 방면까지 쭉 밀릴 줄 알았습니다만…… 어째 전선이 지지부진한 느낌이군요?]로헨은 미소 지었다.
“묘지 군주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불사 교단은 여전히 불사 교단이지요. 죽지 않는 자들의 군대는 패잔병이라도 상대하기 난감합니다. 전선이 분열되는 바람에 피해가 오히려 커지거든요.”
보통 패잔병들은 패주하면서 후방에서 수습되거나 인근 도시, 마을에서 붙잡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죽음의 공포 없이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게릴라전, 혹은 매복을 결행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수십 년도 매복할 수 있는 언데드들의 암습은 끔찍하다. 때문에 여명군은 암매장당한 시신을 찾는 수색 작업 수준의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글쎄요, 여명군은 지금까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진격 속도를 줄인 적 없는 걸로 압니다만?]알 빌라에트의 웃음기 어린 말에 로헨은 미소 지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매복? 게릴라? 그따위 잡스러운 일들은 압도적인 군세가 휩쓸고 지나가면 미약한 파편만 남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파편 따위로 여명군을 위협할 수는 없다.
[이 와중에 만남을 청한 것을 보니, 제안할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대화의 창구는 열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 중에도 외교를 위한 대화 창구를 열어 두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그들이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협잡질에 가까웠지만.
[들어봅시다.]“사실…… 우리 여명군 안쪽에 다소 불쾌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불쾌한 소문이라…….]알 빌라에트는 로헨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은 죽은 자의 지식을 엿듣는다. 천사나 신들의 비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지라도, 인간이 아는 수준의 소문 정도라면 가볍게 알 수 있었다. 불사 교단을 상대로 복잡한 전략이 의미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성배기사에 관련된 그 소문인가 보군요.]“예…… 다소 당황스럽습니다만, 성지 루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가…… 이단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요.”
알 빌라에트는 한참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이런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진작에 여명군을 최우선시했다면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매달거나 불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소문이 돈다는 것은, 이 소문을 퍼뜨리는 주체가 사제들이라는 뜻이군.’
그 근원은 아마도 눈앞의 상대, 로헨 오터 추기경일 것이다. 알 빌라에트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빛의 법전은 이미 수많은 배교자를 낳지 않았습니까? 이제 슬슬 새삼 놀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요.]“경전의 말씀에 오늘 뜬 태양의 찬란함은 늘 어제와 같으니, 그 아름다움에 항상 한결같은 기쁨과 감사하라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늘 같은 어둠이 찾아들더라도 한결같은 분노와 슬픔을 느껴야겠지요.”
역시 아이작이 진짜 배교자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알 빌라에트는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저런…… 뛰어난 영웅에게는 교만과 유혹이 뒤따르는 법이지요.]“그렇지요…… 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성배기사는 우리의 소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부르기에도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난처한 상황입니다.”
[같은 신앙인으로서 그 고통과 심정을 이해하는 바입니다.]“아무래도 이런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여명군도 사기를 잃고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성배기사가 스스로 이 헛소문을 바로잡아 주면 좋겠습니다만…….”
로헨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배기사가 거슬린다. 너희가 대신 잡아줘라. 대신 여명군 진격을 늦춰 주겠음.’
알 빌라에트는 고민에 빠졌다.
불사 교단 입장에서도 아이작은 골칫거리였다. 이사크레아 여명군만으로 성지 루아를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는 명천사 창백을 소멸시키는 경악스러운 업적마저 이뤘다.
당장이라도 그를 제압할 병력을 보내고 싶지만, 수도 우샤크 코앞에 여명군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돌리기도 어려웠다. 성지 루아 자체의 방어력을 믿는 수밖에.
[글쎄요. 성배기사가 스스로의 죄 사함을 청하려면 좀 더 시국이 안정된 다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교전이 치열한 상황에선 한 명의 군인으로서 전투를 우선시해야겠지요.]‘겨우 그 정도로? 좀 더 불러봐.’
“흠, 귀한 조언이십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앙의 간증이 필요한 시점에, 단지 전투의 공을 세웠다고 천국의 문 가장 앞에 서는 것은 불경한 일일지도요…… 더 큰 대의를 위해 물러서는 것도 방법일지도 모르겠군요.”
‘받고, 진격을 멈추는 걸 넘어서 전선을 물리는 것도 고려하겠음.’
알 빌라에트는 이 파격적이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불사 교단과의 전쟁에서 ‘전선을 뒤로 물린다’는 개념은 일반적인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선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여명군이 아무리 열심히 태운다고 해도 수습하지 못한 시체와 잔해들이 잔뜩 있다.
전선을 뒤로 물린다는 것은 그 많은 ‘병력’들을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심지어 사기 충만하게 진격만 하던 여명군이 뒤로 물러서는 순간, 그들은 광신도의 자아에서 깨어나 평범한 농민으로 자각할지도 모른다.
[추기경 님의 신앙심과 신중함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귀하께서 추구하는 대계를 어지럽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군요…….]‘너네 그거 천사들 허락은 받고 하는 거냐????’
“걱정 마십시오. 대계는 사소한 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로헨은 미소 지으면서 작게 기도문을 읊조렸다. 갑작스레, 로헨의 눈이 불타오르면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알 빌라에트는 즉시 로헨의 몸에 명천사가 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천사와 인간의 목소리로 동시에 말했다.
“불타는 처녀께서 이단을 심문하시라 하십니다. 그분께서 크나큰 아량으로 진격이 더뎌지는 것을 용납하시고, 성배기사에게 ‘시련’을 내리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
아이작은 아직 미궁 계곡 위쪽, 바람 부는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쉴 새 없이 귓가에 재잘거렸지만 그가 듣고 있는 것은 이곳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지금 여명군에는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네.]“그렇군.”
다름 아닌 시에로였다.
아이작이 예전에 시에로의 귀를 떼어 낸 대신 ‘저 너머의 기생충’으로 만들어 준 귀.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시에로는 오랜만에 그것의 기능과 사용법을 떠올리며 아이작에게 연락을 취했다.
덕분에 아이작은 빛의 법전 내부에서 돌고 있는 소문과 최근 여명군의 움직임, 그리고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 사제들의 기밀까지 거의 전부 전해 들었다. 물론 파수자 회의나 천사들 간에 오가는 정보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결론을 추론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여유가 생긴 불사 교단에서 나한테 병력을 파견하겠군.”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추기경들은 눈에 거슬리는 자네를 없애고, 수도 우샤크를 지키는 불사 교단 병력도 유출시킬 수 있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여명군 본대 분위기는 영 뒤숭숭하지만.]파수자 회의 놈들은 적의 손을 써서 꼴 보기 싫은 놈을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뻔한 협잡질이었지만 아이작은 이 흐름이 뭔가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명천사들이 이 계획에 찬성할 리가 없는데.’
성지 수복하라고 아이작의 등을 떠민 것은 다름 아닌 등대지기와 명천사들이다.
명천사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파수자 회의가 여명군의 진격을 중단하고 자신을 사실상 배신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다른 수작이 있는 건가?’
[내 생각에는…… 자네가 잠시 물러나는 것은 어떨까 싶네.]그때 시에로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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